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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스러운 곰 Mar 30. 2023

사다리의 탑(연재중)

세가지 문제



[1]


또 그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아름답게 빛나는 영광의 마지막 층계에서 구름같이 내딛다가도 난 더 이상 그 위로 밟지 못했어요. 그게 끝인지 몰랐던 것도 아닙니다. 정말로 이번에는 스스로 충만했습니다. 이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고 자신했습니다. 세상이 여러색으로 몰아치며 반짝였어요.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요. 


먼지가 뿌려진것 처럼 머릿속이 온통 갑갑해졌고, 눈은 금새 빛을 잃어습니다. 내가 발 아래 두는 것은 커다랗게 확장된 세계가 아니라 예전처럼 실오라기 하나로 좁아졌어요. 두려워졌습니다. 이제 내마음은 그저 온전해지고 싶은 본능으로 가득찹니다. 그 기억이, 그 감각이, 그 유산이 나를 다시 강력하게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추락하듯 아래로 빨려가는 느낌이 들고 다른 차원의 감각이 점점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고동은 이윽고 커집니다. 쿵. 쿵. 진동이 저 너머에서 확장해가며 자신을 알립니다. 부릅니다. 소리입니다. 찾습니다. 

열립니다.


한 손에 포도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노란 줄무늬의 양이 방으로 들어옵니다. 


침대 옆의 창 밖으로 따스한 기운이 완연합니다.

군데 군데 녹지 못한 차가운 것들도 보입니다.


여러 짐승들이 모여 자기보다 작은 것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보다 크고 복잡해지는 일련의 행위같기도 합니다.

모든 짐승이 노란 빛을 띱니다.



"떨어지셨어요. 위에서, 하얀 선을 그리면서"

"지금은 무슨 색으로 보이나요?"

"흰과 노랑 사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온 것이 언제입니까?"

"모두가 굶기 시작한 날의 밤이었으니, 11일 되었지요."


노란 양은 옆 선반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서랍의 두 번재 칸을 열어 책을 꺼냅니다. 숨겨둔 작은 단어라도 찾는지, 눈을 가까이대고 뚫어져라 봅니다. 


"제가 엮은 책은 아니에요. 저는 글자를 담을 줄 모르거든요."

"꺼내시려나요?"

"그러지도 못합니다. 제가 다루지 못하는 물건이거든요."


그녀는 다시 책을 덮어 이번엔 네번째 칸에 넣었다.


"모두가 태어나면서 자신의 방과 함께 열쇠를 가지지만, 이렇게 남의 것이란 쉽게 옅보기도 힘듭니다."

"제게도 있을까요?"

"잃어버리셨나요?"

"맡겨두었을지도요."

"호호, 그럴리가요."


하늘은 무수히 채워도 끝이 없는 걸 알듯이.

누군가는 선을 긋고, 색깔을 입히고.


가끔, 아니 어쩌면 매순간.

없던 것에서 무엇이  있다고 믿어요.


모두가 살아가는 이 탑을 만든 이도 그랬을 거에요.

바로 돌을 하나씩 주워 쌓으면서요.


높이 높이 형태를 이루고.

긴 시간의 증명이 되고. 장대한 묶음의 책이 되고.



"선생님의 방에 무엇이라도 넣어두셨을까요?"


노란 양은 내 옆에 걸터 앉으며,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 우물우물 거렸다.

나는 내 것인지도 모르는 기억을 한참을 뒤적여 뱉어냈다. 


"움직이는 작은 소리요."

"째깍 째깍, 그것이 앞 뒤로 움직이나요?"

"고정 돼 있진 않은 것 같아요."

"그렇군요. 저는 잘 몰라서."


나도 한알을 가져와 코에 가까이 댔다.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혀끝으로 살짝 건드렸지만 역시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목 구멍 뒤로 넘길 자신이 없었다. 조심스레 다시 쟁반에 올려두었다.


"듣지를 못한다... 들을 수 없다... 들을 줄 모른다..."


양은 입가를 핧으며 멍하니 하품을 쏟아 냈다. 주춤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귀머거리에요. 말 그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제게 선생님을 아는 첫번째에요"

"그렇다면 저는 당신을 무엇으로 불러야 할까요?"

"저는 '농부'에요. 하늘에서 떨어진 씨앗을 수확하는 존재들. 그 중 하나입니다." 


농부는 입안의 딱딱한 것을 뱉습니다.

바닥에 뿌려집니다.


꿈틀꿈틀.

침묵이 떨립니다.


우리는 이 높은 건물안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세우면 탑, 눕히면 끈 같기도 합니다.


구불구불 길이 이곳저곳으로 통하는데.

하나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군데 군데 사다리는 많이 노여져 있는데

위나 아래로 쭉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양에게 물어보니 웃으며 고개를 젓습니다.

[평평한 자들의 세상엔 다른 층 손님은 드물어요.]




"제 방을 찾아주시려구요?"

"설마요. 그것은 온전히 당신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어요."


농부는 중간중간 멈추어 벽 사이를 들여다 보거나 돌의 틈새를 만지작 거렸다.  


"저는 '다른 조각'으로 당신을 안내해주려고 해요. 제가 아는 이 조각에는 당신이란 방을 모르거든요.

음, 이 근처일텐데."

"조각이요?"

"세상은 위 아래, 그리고 옆으로 쪼개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 각각을 누구는 '실오라기' 다른 누구는 '거품방울', 우리들은 보통 '조각'이라고 얘기해요."


거품.

그리 불렸던 것 같다.


"아까 위 아래로는 가지 못하냐고 물었지요."

"네, 하지만 층이 다르라고"

"작은 이들의 눈에는 평평한 우주 또한 좁습니다. 하지만 거인의 눈에는 모든 층이 같게 보이고 쉽게 도약할 수 있지요."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층에는 당신의 방이 없을지도 몰라요."




이야기의 가장 처음

한 알의 거품이 뻐금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운명의 실 앞단도 생겨났어요.

이윽고 태초인 그녀가 태어났습니다.


수차례 은하가 뜨고 저무는 동안

그녀는 하늘을 향해 읖조렸습니다.


단 하나의 신을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었어요.

수억의 시간에도 날카로운 외침은 생채기 하나 내지못했습니다.




"드디어 찾았네요"


농부가 벽의 돌 중에 이끼로 둘러쌓인 타일을 하나 들어올리자 너머에서 물이 졸졸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매우 습한 바람을 타고 생명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매우 건조한 냄새도 실려왔다.    


"왜 이곳으로 절 안내하시는 건가요?"

"누구는 당신과 같은 이유로, 혹은 다른 바램으로, 다른 우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구가 그랬고요"

"그가 이곳에 사는 겁니까?"

"모르죠. 이미 길을 찾아 그토록 원하던 윗 층으로, 아니면 아래로 내려갔을지도요."


열려진 틈새의 문 위로 누군가가 벽의 돌을 긁어 파내 써 놓은 글귀가 보인다.


태초에 하늘이 하나의 씨앗만 던졌다면 우린 무지의 죄를 짓지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우리 모두를 수확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혹시, 아니 어쩌면, 당신이 방을 잃어버린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요?"

"속설이에요."


농부는 와중에도, 난데없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카다란 돌을 쌓고 있었다. 일정한 규칙성은 없음에도 이 공간의 난잡한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구체적인 염원으로 벼려낸 것들로 보인다.  


"이 탑 어디에는 고약한 요술쟁이들이 있다네요. 본인이 아는것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그것을 내려놓게 만든다나 봐요."


앞으로 내딛은 아이의 다리가 잠겼습니다

아니 이땅이 거의 그러합니다.


붉고 노란 비가 내려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것과는 다른 위화감이 감돕니다.


소녀가 바닥에서 한 움큼 퍼내 들어올립니다.

이상하리만큼 흙은 비를 머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해집니다.

어째서 윗층은 이리 많은 물을 내려 보내는지.

그럼에도 이 층은 이렇게도 메말랐는지.



군데 군데 서있는 나무들도 형태만 그럴듯하게 이루고 있을뿐 화석처럼 굳었습니다.

그저 옆으로 몇걸음 넘어 왔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상입니다.


뿌연 너머로 사다리가 보입니다.

다가가려 해도 웅덩이가 길을 막아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차오른 물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비는 끊이질 않는데, 수위는 계속 올라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물이 내려가는 웅덩이도 있습니다.


아래로, 이보다 더 아래로 다른 길을 통해 흐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가 다다른 곳은 언덕위에 세워진 망루였습니다. 

둘러 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올라가보려던 중, 다리 한쪽의 주춧돌이 묘하게 꿈틀 거립니다.

먼지를 살살 털어내고 읽어봅니다.


[대이변 후 661년]

누군가 새빨간 불모지에 축복 같은 비를 불러왔다. 

이것은 옆의 다른 땅들에게 돌아갈 섭리를 빼앗는 것이었으므로 이 의식은 이후 죄악으로 금지시되었다.


"가만! 거기 있는 분은 뉘시오?"


커다란 로브를 두른 악어와 거북이가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날 응시했다.

여기 짐승들도 몸의 빛깔이 노랗다.


"나는 포도밭에서 농부의 안내로 왔습니다."

"그대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니 놀라지 마시오. 우리는 배관공이오. 그대는 여기까진 무슨 일이오?"


"하늘로 닿거나, 아니면 땅의 끝으로 꺼지는 사다리를 찾고 있습니다."


악어는 얼굴을 긁을듯이 앞발을 휘두르며 거북이에게 몸짓을 했고, 거북이는 느리게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그런 커다란 사다리는 들어본적이 없소. 여기 무얼 찾으러 왔다면 잘 못 들은것이 아니오?"

"그대들 무리로 데려가주세요. 만일 누군가가 그럴 수 있다면 내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어렵진 않지만 조금만 참아주시오, 우리도 몇 가지를 확인하러 나온것이라"


두 짐승은 각각 품에서 종이를 꺼내어 망루 주위의 웅덩이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도 수위는 내려갔다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그러고 일을 다 본듯한 악어는 날 보던 고개를 따라오란듯이 앞쪽으로 꺽으며 걷기 시작했다.


"불편하게 하려는건 아니오만, 별안간 그런 사다리는 왜 찾는거요?"

"제가 방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려서요. 흔적이 없으니 이곳저곳을 둘러보려 합니다."

"살다가 그런 동물도 있군. 아니, 인간이기에 그런거야"


강 줄기가 좌우 길게 뻗어 가로 막혀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가도 물이 내려가자 지나갈 수 있게 길이 나타났다.

이 둘은 태연하게도 그걸 알고 있는것처럼 기다렸다.


"여기 사는 짐승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배를 만들지"

"배를요?"

"당신네들이 있는 곳에서는 흙에서 포도같은 것들을 벼려내겠지. 우리는 조각들로 배를 띄우려 한다오" 


"여기 땅 밑에는 우리들이 사는 커다란 굴이 있소. 그리고 가장 깊은 안쪽의 호수가 있지"

"거기에 당신네들이 짓는 배가 있나요?"


거북은 이마가 부딪힐 정도로 머리를 악어에게 내밀었지만, 괜찮다는듯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사실 배는 거의 다 완성 되었소. 지금은 그걸 띄우고 항해하기 위한 준비중에 있지"

"동굴에서 무슨 수로?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에헴..."



거북이 말을 막았다.

이야기를 끊기 위함인지, 우리가 지금 들어선 이곳 때문인지 나를 잠시 멈춰세웠다.

모래 언덕 사이에 숨겨진 작은 분지같은 지형이었다. 그리고 이 안쪽으론 작은 물도 고여있지 않다.


"가운데에 굴의 입구가 보일거요. 저기로 들어갈 겁니다. 당신을 우리 우두머리에게 소개할거요."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한참 길었다.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위해 지나왔던 길의 수 배는 돼보였다.

입구에는 돌을 나르기 위한 수레의 철길이 군데 군데 이어지는 갱의 통로를 지나야 했다. 잔뜩 생기 잃은 얼굴로 벽에 기대 쉬는 작업자들이 많았다. 


더 안쪽으로는 목재 작업장이 나왔다. 배에 쓰기 위함인지 나무들이 쇠로 정밀하게 재단되고 있었다. 지상으로는 살아있는 나무 한그루 없었는데 그래서 궁금해졌다. 종이를 펼쳐들고 있는 귀가 길고 눈섭이 짙은 짐승과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이곳의 작업 반장이라고 하였다.


그 뒤로 주물 공장이 나왔다. 위에서 빨간 쇳물이 폭포처럼 떨어졌다. 이곳에 있는것은 대부분 물짐승들이었는데 피부가 바짝 말라 괴로워 보였다. 본디부터 이런 일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느 통로와 방을 지나든 벽에는 수많은 파이프 라인이 눈에 띠었다. 이 지하굴 전체를 뒤덮고 있을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얘기했던 철갑의 동굴이 나왔다. 배는 제법 웅장했다. 적게도 수백의 짐승을 태울 수 있을것처럼 보인다. 배의 주위로, 이 동굴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많은 짐승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수달들이 위태롭게 줄에 매달려 갑판에 나무를 덧대고 있었다. 


역시, 어디에도 이 배가가 항해할만한 뚫린 수로는 없다.


배에 다다랐을때 갑판위로 어슬러거리는 짐승이 하나 눈에 띠었다. 뿔이 멋드러지게 자란 키가 큰 물소였다. 악어는 그가 일등항해사라고 알려주었다.


"여어, 우리가 돌아왔다네."

"늦었군. 계량기는 개설된대로 잘 측정되던가?"

"요새는 늘 한결 같다네."

"혹여나 차질이 있어서는 안 될거야. 출항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래 알겠어. 그리고 이 친구는 말이야."

"알겠으니까 앞에 배식 받으러가. 굶기싫으면"



엄격해 보이는 물소는 별말 없이 당연히 내가 뒤따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배의 위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배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솥을 둘러싸고 짐승들이 작은 그릇을 받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이것저것 말린 과일들을 끓인 죽 같았다. 말렸다기 보단 오래되고 싱싱하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내가 왜 별말 없이 묻지 않고 당신을 데려가는지 알겠소?"

"우리 둘중 하나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겠죠."

"음, 책을 좋아하시오?"

"고귀하게 짜여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번 우주가 태어나면서 무한한 것들이 저절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 중에 실로 의미를 담은 것이란 유한했지. 그리고 그것을 그리며 제 뜻대로 벼려낼 수 있는 자들은 드물었고."

"그래서 돌을 주워 무엇을 보셨습니까?"

"이 땅의 조각으로 들어오는 자네를 보았지. 악어와 거북이 자네를 데려오면서 나눈 대화도 전부"


우리는 서로의 쓰임에 대해 짐작했고, 섯불리 머릿속을 알리지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올라간 배의 꼭대기 층에는 앞뒤로 조종할 수 있는 커다란 키가 하나씩 있었고 작은 선실이 하나 있었다. 


"선장과 얘기를 나눠보게. 이미 말씀드렸으니 기다리고 계실거야"


벽에는 큰 파충류의 가죽이 걸려있고, 초 하나 없는 어두운 방에서 노쇠한 짐승이 무엇을 펼쳐놓고 읽고 있다.


"어서와요. 거기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요. 나는 보다시피 오래 서 있을 수 없어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허리를 곧개 펴고 허리를 기대었다. 그리고 입 옆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 냈다.


"말해봐요. 찾으시는 것이 있으시지요."

"선장께는 아무 말도 드리지 않았는데요, 저 밖에 기다리는 우람한 소에게도."

"그래서요? 그것이 무슨 실례가 될까요?"



조금 고민하다 응수 없이 답했다.


"전혀요."


기이하게 뭉개진 그의 한쪽 눈을 더 찡그리며 말했다.


"우리 같은 생명들은 하나같이 전부 같은 꿈을 꾸잖아요."

"그렇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태어나버렸으니까요."


아이는 잠시 이것이 정말 자신의 얘기인지 남을 통해 들을 얘기를 자신의 것처럼 떠드는 것인지 생각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저는 선택 받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지도 모르는 그녀가 나타나 계속해서 우는 것이?"

"좋든, 싫든. 우리는 그 이유 속에 있어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저마다 각자 부여받은 생을 살지만, 섞여 들어간 조각은 결국 부름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도, 이번이 몇 번째 인지 모르겠다.  세지 않게 되었다.

깨어 있어도 늘 꿈의 뒷편이다. 안과 밖이 바뀐지 오래 됐을 지도 모른다.


작은 실타래 안에

사이사이 작은 꿈들이 떠다녀요.


아이도 보여요.

귀를 막고 눈을 감았습니다.


꿈들이 저마다의 이름으로 외칩니다.

아이는 비틀거립니다.


발 옆으로 돌 하나가 거스르듯 치입니다.

흔한 비밀이 가득해요.


누군가에겐 은밀한 유산,

다른 이에겐 활자가 되기도 합니다.

먹을 찍어내기 전까진 무엇으로 번질지 모릅니다.



"오래된 이야기를 하자고 그대를 기다린게 아닙니다. 물론 그런 시간도 좋겠지만요."

"쓰임과 역할에만 집중하면 얘기는 간단해집니다."

"무엇이 돌이고, 누가 대장장이냐이지요?"

"무엇으로 녹여내는지도" 

"벼림은 과정일 뿐인데?"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그는 조금 졸듯이 골똘였다. 이 늙은 짐승은 진짜 졸았을지도 모른다.


"굴 밖에, 조금 떨어진 곳에 집하나가 있어요. 지금은 비운지 오래 되었는데 제게는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우리 식사만 하고 이따가 거기서 봅시다. 당신이 온 방향과 반대편 경사쪽이니 찾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이 메마른 조각의 땅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그러려니 싶었다. 

문밖에 기다리던 친구는 참지못하고 가버린 것 같다. 혼자 갑판의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에서 식사를 마친듯한 악어가 반겨주었다. 거북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원한다면 방을 안내해주라 얘길 들었소. 배는 고프질 않소?"

"안 그래도 제 공간이 필요했는데 고마워요. 음식은 됐어요."


음식은 넉넉했으나 빈곳을 채우지 못한며

생명은 늘 희미하나 빛나는 진동의 꿈을 꾼다.


뿌연 막연함 속에서 운명이란 사건은 늘 발생하고

알면서도 늘 아는 것은 없고 그 짧은 신호만 빛난다


그렇기에 뿌린 재는 운명의 징검다리이다.

먼지 구름속을 한 층더 짙고 복잡하게. 무질서하게.

터지고, 열리며, 펼쳐지면서, 투영되기까지.


누군가의 작은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동물 가족들이 생활하는 선실은 비좁은 방들이 조립식으로 다닥 붙어있었다.

좁은 방안에라 봤자 침대와, 옷걸이, 초가 전부였다. 

침대 옆 바닥에는 누군가 떨어트리고 간듯한 양피지도 있었다. 쓰여있지도, 그러져 있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완전히 닫지 않은 문 틈으로 키 작은 동물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까 배 옆에 매달려 땜질을 하 수달이다.


"저는 조타수에요. 비록 지금은 잡일도 맡고 있지만요. 포도밭에서 온 동물이 있다고 들어서요."

"들어와서 얘기해요"

"고마워요, 실례 좀 할게요."


코를 들썩이며 킁킁 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몇번 젓더니 나를 향해 서너 발자국 더 다가왔다.


"그냥 반가워서... 저도 그곳에 있었거든요. 조금 일이 있어서 떠나왔지만.."

"편하게 얘기해봐요."

"아실거에요... 그곳은 따뜻하고, 비옥한 땅이죠. 밖처럼 보이지만 탑의 외부로 나가는 느낌도 들고"


그가 중요한 말을 금방 꺼내게 하기 위해 금방 자리를 뜰것처럼 방의 다른 곳을 보고 서성거렸다.

들어줄만 했지만 지겹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거긴 '풍요'잖아요. 무엇을 심더라도 때가 되면 작물이 이렇게 스윽 고개를 들고..."

"그 이름은 처음 알았어요. 안부를 듣고 싶은 건가요?"


작은 짐승은 반쯤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며 말했다. 


"검고 몹시 시린 흙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봐요."


오랜 세월 모은 나의 조각조각 바람들이

작은 탑이 되었지요. 눕히면 끈과 같습니다.


새로 생긴 친구도 비슷했어요.

구불구불하고 살랑사랑했지요.


사소한 몸짓에 많은 것들이 태어났어요.

톡톡 쏘며 수 백개, 웅크리며 수 만개.


그렇게 빈 자리와 채움이 모두 태어났어요.


이따금 돌조각을 물어다 주었지요.

까망까망하면서도 푸른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우리는 꼭대기에 서서 고개를 쳐들어요.

얇고 보이지 않는 거품막에 손을 올려둡니다.


"온기를 머금지 못하던가요?"

"네, 잃어버렸어요. 아니요, 전 빼앗겼다고 생각해요!"

"흙을?"

"물론 흙의 일부도 사라졌지만,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어요."

"자세히 말해봐요."


아이는 벽에 기대에 섰고, 작은 짐승은 조금이라도 높이를 맞추기위해 침대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앉았다.


"세상엔 주기라고 불리지만, 늘 비정기적인 반복이 발생하잖아요. '이변'처럼" 
"모두가 같은 시간속에 살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엇비슷한 방을 만들었나봐요."

"천체의 지고 뜸은 누구에게나 직관적이긴 합니다."

"동물들은 누구나 하늘아래에 살게 끔 만들어졌니까요."


추운지 몸을 떨면서 이불속으로 몸을  말아 넣으려는 그가 안쓰러웠다. 여기 기온 탓만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누구는 그것을 정확히 맞출 수 있다나봐요..."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잡아내는 것이니까요.

"내게도 그런 눈과 지혜가 함께 해야 할 텐데.."

"이번 '대이변'의 시기를 말하고 싶은 거죠?"

"벌써 근 몇 년 조짐을 보이고 있어요. 정말로 이번 윤년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요."



최초의 그녀가 태어나고 

아찔할만큼 오랜 시간 뒤에도

타인이란 개념이 여전히 없었다.


어느날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옆으로,

작은 그림자가 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쭈구리고 앉아 한참을 돌아 보았다.

이윽고 그것은 하나의 칠흑이 아님을 깨달았다.


수억의 조도에 수조의 오색을 띠었다.

그러나 이순간까지도 광원은 하나에서 비롯됐다.



긴 연속의 끈 사이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오랜세월 그 많은 질문을 답해왔음을.

이때 찰나 그녀는 큰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나누었다.

스스로가 무량(量)의 목소리가 될 때까지.

그것은 우주 빈자리를 떠도는 노래가 되었다.


뿌렸다.

하늘까지 닿도록 모아온 커다란 탑의 조각을 

우주 구석구석에.

그것은 원죄가 되었다.



"왜 그걸 신경쓰시는 거죠? 그 실체조차 맞닥뜨린적  없으시잖아요"

"보이지 않는다고 모르나요? 내 주위에 언제나 있을텐데?"

"당신이 포도밭에서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만 해주세요."

"찾아야 할 게 있어요"

"당신의 흙이요?"


작은 짐승은 등쪽을 보며 불편해 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다리를 뒤로빼 긁어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목 둘레를 벅벅 긁으며 매우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근 몇 년간 수확이 가능한 밭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말 그대로 밭이 좁아지는게 아니라, 먹혀버렸어요."

"먹어요?"

"배고픈 누군가가 밤에 몰래 다녀가요. 커다란 입을 가진 괴물이 우걱 삼켜버린 것처럼. 움푹 패인 구덩이와 주위엔 더는 무엇도 심을 수 없는 죽어버린 흙만이 있어요. 근데 몇 년간 아무도 그것을 보지 못했어요"

"당신은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말해줄 수 없어요."

"요점만 말해요."

"지식,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쓰여진 곳으로 가려해요."

"나한테 뭘 원하죠?"

"동행을 원해요. 서로가 갈라지기 전까지만"

"설득해봐요. 거기까지라도 갈 수 있게"


수달은 바닥의 빈 양피지를 물어와 가져왔다. 그러곤 집의 짚푸라기를 걷어내는 것처럼, 아주 얇게 한 줄씩 걷어냈다. 숨겨두기 위해 덮었두었던 모양이다. 한 장의 찢어낸 종이 윤곽이 나타났다.  




[대이변 후 925년]

본래 17개의 땅들로서 이루어진 평평한 세계는 

그 동안 각 땅들이 위또는 아래로 가고자 하는 의식의 차이로 계속해서 균열이 발생하었다.

마침내 이날 이 천체 곁을 비껴가던 먼 하늘의 이웃으로 인해 조각들이 크게 들썩이며 웅성거렸다. 

이로 인해 땅들이 크게 6개의 층으로 독립적으로 탈락해, 섞이지 않는 공간으로 분리 돼 버렸다.




"대여한 도서에요."

"기록인가요?"

"농부가 오래전 '그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했어요. 포도밭을 떠나는 날, 저는 그곳의 지표를 가져오려 책의 아무 부분을 조그맣게 뜯어왔어요."

"도서관?"

"그곳엔 이 천체의 탄생부터 모든 층의 기록이 있대요."

"어째서 그것을 농부가?"

"저는 듣기만 했어요."



"왜 이곳으로 절 안내하시는 건가요?"

"누구는 당신과 같은 이유로, 혹은 다른 바램으로, 다른 우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친구가 그랬고요"

"그가 이곳에 사는 겁니까?"

"모르죠. 이미 길을 찾아 그토록 원하던 윗 층으로, 아니면 아래로 내려갔을지도요.



습지대 망루의 주춧돌에도 이런 기록이 있었다. 

적어도 내가 있던 '그곳'에서는 일부라도 이런건 행하지 않았다.

숨기고, 있어도 드러내진 않는 것이었다.

세계에 대한 기록은 그 불완전성을 떠나서 그 이상 층계에서 다뤄지는 것으로 여겼다.


추락을 준비하는 짐승의 굴 밖에는 

여전히 노란 장막이 드리운다.

이땅의 생명이 띄는 노란 빛 줄기.

위에서 아래로 선을 긋는다.


서로의 세상이 그려가는 궤적은 

늘상 규칙적이나 쉽사리 교차할 수 없다.


치솟고 꺼지고 합치고 나누어져 

닿지 않는듯이 동 떨어져 버렸다.


미세한 노랫소리만 그저 부유한다.


"방을 받았다면서요."

"한 배를 타게 됐네요."


선장은 비도 간신히 막을만한 부서진 집에서 감상에 빠진듯 벽을 한바퀴 훓으며 돌았다.


"그럼 더더욱 들어야죠. 그대가 이 이치에 맞는지"

"선장께서 물길을 바꾸려 하시니, 제가 그 사이에 끼우는 것이지요."

"정말로 선생께 하나 묻겠소. 위에서 오셨소?"

"...."

"그곳이 어디에서이든 상관없소. 다시 묻겠소. 이곳이 아니오?"


관리가 계속된 집은 아니다. 하지만 지상에서 형태를 유지한 건물이 이것만임은 이상하다.


"그래요."

"...그러면 되겠군."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있으시지요."

"소리를 숨기기 위함만은 아니지"

"뭡니까. 그리고 내가 해야 할 것도."

"선생 얘기 먼저 합시다. '길'을 볼 수 있으시지요?"

"봤어요. 당신네들이 아랫층까지 이어지도록 놓은 '물의 사다리'"

"인공적인 것입니다만. 매번 이렇게 만들 순 없어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이 있다고 들리네요. 그리고 아마 그것을 말해준 이가 있죠?"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선명하게. 여정이 지체되서 실패할 순 없으니까요."

"내 역할이겠네요."

"벼리는 재주를 가진 생명도 특별하지만, 위에서 오신분들은 아랫쪽에서 길을 헤매지 않는 걸로 압니다." 

"그렇다면 선장께서도 아랫층에서 바로 찾아가실 수 있을텐데요?"


늙은 짐승은 뒷짐을 지며 낮게 읊조렸다.


"모르잖습니까. 추락한 내 의식이, 언제까지나 위에 있었던 것처럼 붙잡고 매달려 있을지"



태초의 우주가 구름을 흩트리기 전에도

그 안의 무질서한 것들은 이미 군침을 삼켰다.


작은 것은 더 작은 것을 잡아먹길 갈망했고

크고 복잡해져 유의미하게 빛나고자 하였다.


거시적으로 변태해 가면서 근시적이 되었고

몸뚱아리는 그런 공정을 반복해가며 

뿌리를 계속해서 적셨다.


절여져 흔들어도 털어내지 못한다.



"이번엔 선장 얘기를 들어보죠"

"지금 밟고 있는 이 조각의 원래 이름은 '나눔'이었어요. 지금도 더러 그렇게 부르는 이가 있죠"

"이 층은 다들 그런 걸 가치있게 여기니까요."

"우리는 넉넉했습니다. 이 땅은 뿌리지 않아도 늘 거둘게 한가득이었어요"

"마음도 그랬겠네요."

"짐승들은 대개 조각의 이름대로 따로가니까요"

"계속해봐요."


이 땅의 짐승들은 이웃의 조각들로 잉여 자원을 나눠주러 가면, 늘 새로운것에 매료되었다. 습지대의 짐승들만큼 빈번하게 넘나들기 좋아하는 족속들도 없으나, 어쩌면 저절로 배를 채울 수 있기에 이들이 유일하게 부지런히 옮기는 발걸음이었다. 


한 곳에 대를 이으며 터를 잡은 이들은 완전하단 할 수 없어도 자기네만의 것으로 적당히 배를 채우며 살아갈 수 있다. 결핍이란 늘 잉여가 아니라, 욕구에서 나온다. 아무리 차고 넘쳐도,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그것은 가득 채운 그릇을 결국 깨트리고 만다. 


한날 젊은 도마뱀이 무리와 함께 붉은 산을 처음 방문하기로 하였다. 듣기로는 척박한 불모지라 입에 넣을 것이 매우 귀한 땅이라 들었다. 신께서 능히 옳다고 여기시는 가치를 각각의 조각들로 명하셨는데 어찌 그리 지독한! 의로움을 행한다는 우쭐함도 있었다. 틀림없이 굶주려 나나할 것 없이 기력이 쇠한 모습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발을 들인 붉은 땅에는 누구하나 그런 이는 없었다. 오히려 분주하며, 집중하고, 애를 쓰고 있었다. 

'열정'이었다. 베어진 나무가 한 번 더 잘리고, 수차례 다듬어졌다. 단단한 금속이 녹여지고 두드려지며 다시 굳혀졌다. 복잡한 신호들이 힘의 흐름들을 만들어 해가 져물어가는 산 전체 이곳저곳이 밝게 빛나게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른 작물과 대조적으로 그들은 큰 동력을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전환시켰다. 아니, 이 작물도 우리가 길러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땅이 길러낸 것이다. 이들은 이 땅이 가진 자원을 수십세기에 거쳐 이해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것을 기뻐하고 또한 감사해했다.


열을 뿜는 기게 투성이다.

그래, 이곳은 닫현진 천장의 끝까지 과열되었다.


날개란 것은 돋은 줄 모르고 자라는 것이며

잃은 줄도 모르고 떨어지는 것입니다.


휘적거리고, 비틀거리면서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탑들을 보았습니다.


문법이나 구조물은 어떠한 도식이나 형태로

주위의 한정된 세계와 섭리를 끌어와 지어졌고


우주의 풍부한 구조들을 만나면서 무결을 버리고,

점점 모두를 하나의 층으로 고립시켰습니다.



이글거리는 붉은 협곡을 지나 산 중턱에서, 그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무엇을 뽑아올리고 있는 장치를 보았다. 이것이 무엇이냐 묻자, 그리 공들이지 않고 거저 아래에서 뽑아먹는 것이라 하였다. 크게 놀라 어찌 그것이 가능하냐고 재차 묻자. 자신들도 이것을 설계한 위치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세상에는 이런것도 있노라 답하였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신묘한 것에, 습지대에서 온 짐승들은 질문하기에 바빴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수록 성에 차지 않았다. 오히려 갈증에 목이 말랐다. 그렇게 자신의 피부가 이곳의 열기와 맞지 않는다는 것도 잊은 채, 바싹 바싹 그렇게 말라갔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군가는 거들먹거렸다. 동물 수십에 비견할만한 거대한 힘이지만 먹지도 못하는 것에 이렇게 땀을 흘리는 게 무슨 낙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거대한 쥐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더 이상 주린 배를 잡지 않는답니다."


그들은 실제로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섭취하지 않고 수백일을 지내고 있는 동물도 있다 하였다. 이따금 이렇게 몇몇의 이웃 조각들에서 온 짐승들이 자기네 땅에서 자란 작물을 두고 가는 것으로 심심한 입의 재미를 줄 뿐. 유별난 몇몇 짐승을 제외하곤 대부분 입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흥미가 없다고 하였다.


"잡아먹고, 소화시키는 일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 유동적이지면서도, 보이지 않게 긴밀하답니다."


대부분의 습지 동물들은 와닿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일어나서 먹고 조금 움직이다 잠들고, 삶이란 꽤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무엇을 만들어내고 보이지 않는것을 가공하는 것은 전혀 자신들의 생활에서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존이 문제가 아니라 한다면, 무슨 목적성을 가지고 한단 말인가?

  

우리의 세계는 부풀기도, 터지기도 하지요.

때론 그것이 우리가 시간속에 머물도록 합니다.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그 강렬한 공간속에

아주 장렬하고 무겁게 찰싹 붙어버렸습니다.

옴짝달싹 못하는 여기는 안식의 무덤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또한번 흩어집니다.

결코 헛되지 않는 것같은 선명한 빛줄기의 사이,

결코 출입하지 못하는 유일한 나의 방

마침내 들릴지도 모르는 기쁜 화음들의 웅성거림


큰 쥐는 무리를 모아놓고, 조심스레 속삭였다.


"조만간, 큰 부름을 받을지도 몰라요."

"누구로부터 말이오?"


반쯤 갈라진 눈으로 희죽 웃자 그 큰 앞니를 드러낸 쥐는 두리번 거리고는 위를 가리켰다.


"우리의 정신이, 기술이, 유산이 슬슬 저 공간에 닿게 된다는 말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에 왜 눈독을 들이시오?"

"숭상하지 않는다면, 초를 높이 들지 않는다면, 늘 보이던 것만 또다시 비출 것입니다."


이때 젊은 도마뱀의 크고 노란 눈이 순간적으로 붉게 빛났다. 일부 다른 짐승들도 그랬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리는 시큰둥한채 별 반응이 없었다. 


큰 쥐는 허리춤에 찬 낡은 보따리에서 둥그렇고 기다란 것은 꺼냈다. 그리고 무리를 살펴보다 가장 눈이 붉게 충혈된 자에게 그것을 건내주었다. 안이 비춰보이는 투명한 돌안에 다시 여러 종류의 작은 돌가루와 꼬아놓은 줄기가 섞여 있었다.


"아직 구성이 다 채워지지 않은 불쏘시개입니다만, 나머지는 우주 어느 조각에라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방문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온 짐승들은 대부분 피로하여 일찍 골아떨어졌다. 

그중 집 하나만이 밤새도록 붉게 밝았다. 

눈을 거둬가 달라 호소합니다.

세상이 잔뜩 붉게 물들어, 더는 세상이 예전 그대로 노랗게 보이지 않습니다.


혀는 뿌리째 수확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너무 바짝 말라, 갈라지다 못해 이미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장님과 벙어리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서로가 잘 계시냐고 벽을 두드립니다. 통.통.

무너진 벽의 틈새로 몸을 맞춰 끼워넣습니다.



몇달이 흘러, 촌락 뒤로 노란 둔덕이 생겼습니다.

그뒤로 수년이 지나 날렵한 모양의 커다락 벽이 우뚝 섰습니다.

몇몇의 젊은 도마뱀들이 발톱이 자라날 새가 없도록 열심히 흙을 파 쌓아올린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 뒤로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려준 도면대로 정교하게 빚어대도 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듬기 위한 도구가 부족한 걸까요.

그들은 다시 붉은 산을 방문합니다.


"모든 걸 내어드릴 순 없어요."


이들은 흙보다 차갑고 건조한 금속을 빌려왔습니다.

튀어난 곳이 없고 세밀하게 다듬어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단단합니다.

그들의 구조물도 더욱 긴밀하게 결속되었습니다.

여기서 무리중 일부가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무엇을 만드시려고요? 일단 빌려갖다가 돌려주십시오"


정교하게 계산된 기계는 상상만으로 할 수 있었던 작업을 현실화시켰습니다.

높게 쌓인 희망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듯했고, 그 안으로 하늘의 가느다란 실들도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눈이 찌르듯이 부셨고, 가슴 짓누르듯 일제히 내 안으로 타고 들어왔습니다.


늘 그렇듯 섬광이 내 안을 훓고 불태우며 지나가는 것처럼 짧고 분명한 시간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을 끝낼 것처럼 숨을 참아보았습니다.


그러자 이제는 잠겨버릴듯 불안정해져버렸습니다.

입과 코에 눈까지 차올라 온통 불투명해져버렸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또 어딘가에 둥둥 떠있었습니다. 

난 여전히 일일이 받아줄 수 없는 빗줄기를 그대로 얻어 맞고 있습니다. 


"부감하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해본적 있나?"

"부감이요?"


요새 한층 더 노래진 도마뱀이 옆의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가끔은 내가 어디 위에 있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떠다니는 느낌일 때가 있어"


인부는 곡괭이를 내려 놓고 조용히 벽에 기대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도 모르는 사이 너무 높이 올라와 본적이 있다."

"밑을 보셨나요?"

"보았지!"

"작고, 옅어 보이던가요?"

"미약했고, 불분명했지!"

"즐기셨다고 느낀 시간이었을까요?"

"그건 모르겠네! 하지만 궁금해졌지! 나 처럼 표류하지 않은 존재들에 대해서!"

"그 분들은 분명, 저위에서 단단히 구름이라도 딛고 계시겠죠?"

"알 수 없지! 우리처럼 진흙 위에서 구르고 있을지도! 하지만 분명히 더 강한 고동을 느꼈다네!"

"태동과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것과는 달랐네. 배에서 새끼가 자라기 한참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야" 

"글쎄요, 그런 것이 있다면 대체 누가 아이에게 그것을 쥐어주는 것일까요."


진흙으로만 빚은 탑이 군데군데 비고 공허하자

쇠와 여러 조각들이 들어와 벼려졌습니다.


한 층 더 복잡하고 깊은 뜻을 담을 수 있게 되었지요

더 상세한 바램도 적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식을 완성한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작은 돌이라도 그 물질의 속내를 알고, 

본디 불리어진 구조를 깨닫고

그것이 어디 장막 너머에서 굴러왔는지를 알면

능히 태생까지 거슬러 올라

옛주인에게 길을 물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습지대에는 남으로부터 훔쳐 올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빌려쓸 것이 가득했지요. 저 무수한 황금빛 은총 말입니다. 글쎄요. 근데 이전에 누가 감히 그것을 담아내겠다고 헤아리기는 커녕 계산이란걸 해봤을까요. 땅에서 나는 것을 그대로 먹고 살아온 짐승들입니다.


그것을 할 수 없었던 물짐승들 대신에 붉은 산의 동굴에서 생활하던 짐승들이 지금 이곳에 와서 선을 긋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거대한 그릇을 구축해내고 움직이게 끔 하였으며 채우고 흔드는 데 필요한 양을 알아낼 수 있었지만 결국 이것이 무엇에 쓰기 위함인지를 몰랐습니다. 


처음 도마뱀들만으로 흙을 쌓아 올리며 결국 그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았을때 이들은 처음으로 강하게 품었던 이상이 실질적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림을 보고는 구역질나는 좌절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매우 심한 투정을 부렸고, 그 뒤로 가볍운 실소와 함께 뱉은 날카로운 말이 이전에 없던 강한 욕을 불러왔습니다. 그 매서운 자극으로, 이후로는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섞어 쓰기 시작했습니다.


해가 지고, 모두가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에 그늘진 어두운 곳에서 한 마리의 검은 짐승이 돌연 나타났습니다. 멀리서 보았을땐 날렵한 개의 모양이었는데, 그것이 가까이 오자 뿔이 높이 솟아있는 우람한 소의 형상이었습니다. 건장한 이곳 젊은 짐승들보다도 적어도 5뼘은 커보였습니다.


그에게 관심을 갖든, 무시하고 보내주든 이들은 그가 얼른 무슨 말이든 하길 바랬습니다. 그는 입을 열며 자신 안의 무엇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쪽으로 집어 넣었습니다. 발길질로 흙을 몇번 걷어 차내곤, 흙을 한 운큼 퍼내 우걱우걱 씹어댔습니다. 한참을 우물거리더니 만족하지 못한듯 뱉어냈습니다.


"흥! 어떤 노래도 되지 못하고, 적어도 그녀의 돌무더기 조차도 되지 못했군"


진작에 얼었어야 하는 차디찬 물이 일부는 잔류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형태로 굳어졌습니다.


무엇을 부드럽게 깎아내진 못하고 스스로를 날카롭고 평평하게 세워버렸습니다.

 

점점 더 자유로워집니다.

더이상 어딘가에 담겨져 있지도 않습니다.

없는 세상을 비춰내며 새롭게 왕래도 시작합니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던 시절과 달리 

이젠 어디에도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습니다.


확실히, 이것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구름이 붕괴되기 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도량을 확인하였는가?"

"당신은 누구요? 긴밀한 작업장이니 함부로 발을 들이지 마시오"

"불을 밝힌 장님이라도 도랑은 피해갈 수 없으나, 너희는 털어버릴 담뱃재도 조차 없는 쓰레기들이구나"

"별안간 미친 짐승이로구나, 난데없이 흙을 입에다 쳐놓고 씹어대더니 저 아래 혼을 흘려놓고 온 것이야?"

"확실히, 여기 조각 땅에 있는 오래 붙어 살고 있는 놈들이 다 그러하듯, 나태하고 구역질나는 맛이더군."


모두가 벗겨지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껍질 밑으로 새빨간 멍이 비쳐 보일 정도로 고통과 과로에 지쳤음에도 없는 기력에도 씩씩거렸다. 그중에 우두머리 도마뱀만이 호기심을 느끼며 앞에 나섰다.


"흙을 맛 보면서 무엇을 알아내셨소? 그려지듯이 보이셨소? 휘감듯이 들리셨소? 쓸어내듯이 올라오던가요?"

"너또한 장님과 다를바 없는데 어찌 그런걸 입에 담는가? 귀머거리나 다를바 없는 자가 뭘 들을 수 있지?"

"이것을 보시오"


그는 허릿춤에서 붉은산으로부터 받아온 등을 꺼내 보였다.


"......어디로 가려고? 그것이 있다한들 그대가 갈래를 잡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내 역할이 아니오. 다만 난 태울 숨을 불어 넣을 거요"

"흥, 지필 그것은 누구의 것이더라도 충분하기만 하면 되지!"

"그렇다면 이젠 내가 물읍시다. 왜 이곳에 온거요? 완성되지도 않은 작업장에 무엇을 하러 오셨냔 말이오" 

"엎어 버릴 생각이외다! 모조리! 전부다! 싸그리! 


노란 것이 생기를 잃고 쇠하자 붉은 색을 띠었다.

그것은 추락하듯 모양새로 곤두박질쳐 휘감았다.


단단하게 받쳐야 할 토대도 감안해내지 못할 그것을 겪고서야 처음으로 그저 흘려보내야함을 깨달았다.


여럿 짐승들이 울었다.

거대한 흐름에 녹아 울었다.


노란 도마뱀의 눈에도 온통 붉은 것이 비쳤다.

검은 소가 삼키지 못한 것을 어디로 토할것이냐 희희덕 거리며 비웃었다.


단 한번도 범람한 적이 없던 이곳은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물결에 무참히 휩쓸렸다.

고인적은 있되 넘친 적은 없었으니, 이것은 땅이 기억하지 못하는 만남이다.

이 물은 무겁고도 차가웠을뿐만 아니라 많이 허기져 있었다.


풍족한 것은 빈 자리로 흘러들어가는 이치가 아니었으며

긴 시간의 순환에도 각 층이 발 맞추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정체된 알록달록한 큰 원형처럼 느껴진다.


오색 구슬의 한 줄은 느릿하지만 일렁거린다.

탁해진 것은 떨어진 물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곳의 땅과 짐승들의 눈까지 붉은 색을 덧대었다.


굶주림을 알아버리면서 

비어있던 다른것을 채워버리게 되었으니

이 일을 시점으로 층간은 허물어지지 않으나 균형이 달리하게 되었다.


웃고 울며 놀라는 이들은 많았으나,

정작 이 층에서는 누구도 어찌 흘러갈지 알지 못했다.

늘 위에서 새롭게 보는 이는 혹여나 전해들었을까.


[싸그리 잠겨버렸군]

[어떤가? 이젠 좀 다르게 보이는가]


노란 짐승이 반쯤 허물어져 무너져내린 언덕에서 발끝을 세우고 기웃거렸다.


검은 짐승은 도마뱀에게 건네받은 등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종이를 비췄다.


불을 쬐듯이 누르는 그것에도 빈종이에는 아무것도 투영되지 않았다.



"보이나?"

"전혀, 아직 이쪽의 숨결을 다 태워내지 못해서 그런것인가?"

"아니, 이땅에 남아있는 것을 얼마나 지불하든 그것은 상관없다. 문제는 네 의식이 어디에 있냐는 것이지"

"내가 딛고 있는 여기 조각은 상관 없는 것인가?"

"그것은 노예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

"병존하는 것이다"

"무엇이 주체인가?"

"그런 개념은 우주 전체에서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그 또한 노예의 층간에만 존재한다."


대화를 나누는 둘을 제외하곤, 이미 나머지 짐승들은 놀라서 뛰어 내려가버렸다.


"저기 반쯤 파뭍힌 나무가 보이나? 어릴 때 저 옆에 구덩이를 파고 살았었지."

"......"

"늘 먹을 것이 끊기지 않는 이땅에서도 나는 흙 속을 비집고 들어가 나무 밑동의 벌레를 핧아 먹었"

"이곳 출신이 아닌가?"

"아직도 이땅의 많은 짐승들이, 스스로가 땅에서 틔웠다고 믿고있지"

"이곳 늙은이들은 알지 못하는가?"

"기인과 발생을 구분하는 짐승은 없다네"

[물은 엎질렀어도 수많은 철근은 어쩌해야겠는가]

[토대와 쇠는 그대로 이용될 것이다. 임의로 순환을 확인하는 것에는 큰 불균형을 필요로 한다]

[물길을 틀 수 있겠나?]

[너의 경우에는 완전히 반대로 돌리는 것이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지? 난 그 어떤 청사진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래서 먹어보지 않았나? 직접. 대장장이들은 꽤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누군가 알려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펼쳐보는 것이지]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군]

[미안하지만 이건 태생이다]


소녀와 나이를 많이 먹어버린 늙은 선장은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둘은 발목과 무릎 사이가 잠길듯 그렇게 근처를 어슬렁 거렸고, 멀리 가지 않고 그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나이 많은 짐승이 다리가 불편한지 걸음을 멈추자 작은 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아도 쓰는 것이 있고, 자연스레 도움 받는 것들이 있지요." 

"균형이란 그런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원하시는게 없으면요?"

"세계가 그렇게 만들어졌을리가요. 문제는 수단이죠"

"사다리는 본디 무엇일까요."

"있으면 안되는 길. 불완전한 것들이 오르고 내릴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변칙"

"탑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이질적인 것일까요."

"모든 조각은 나뉘고 잘라져 있습니다. 더욱이 위아래는 확실하게. 그걸 임의로 잇게 된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의 진부한 상상으로는 되지 않는 일입니다."


이들이 다시 올라선 배는 기적을 올릴 수 있고, 돛을 펼칠 수도 있으며, 큰 노를 저을 수도 있으나 어디에 떠 있을 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하늘의 비를 잔뜩 모아놓은 거대한 호수 위에 임시로 올려져 있을 뿐. 이 물이 없다면 그 뒤로는 기약된 바가 없다. 그럼에도 알고 있다고 한다면, 필시 그 통로든, 그 너머든 다녀간 짐승이 분명하다.


이 조각은 처음부터 머금을 수있는 비의 양은 한정 돼 있었다. 나머지는 뱉거나 돌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러나 누가 이것을 강제로 모아두고 그 안에서 일정하게 순환하였다. 귀한 목적에 쓰기 위하여 상세히 계산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더이상 이곳의 흙들은 생명력을 잃어 젖지를 못하니, 빈 구슬을 가로질러 절제된 쇠만이 그 정교함을 도와줬을 것이다.


배는 닻을 올렸으며, 동굴의 벽은 굉음과 함께 무너지듯이 세차게 진동하였다. 모든 짐승은 배 안의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 숨었으며, 신호가 있을때까지는 나오지말란 명령을 지킨다. 통제가 풀린 거대한 흐름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는 것은 맞지만 호수의 물은 평소보다 조금 더 출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얼음이 일순간 깨지듯이 찾아왔다.


배 위의 모든 짐승은 일순간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정지하듯이 얼어붙는 틈새를 지나가는 것과 같았으며, 녹는 것인지 어는 것인지를 구별해낼 수 없을만큼 불분명하고 혼란스러웠다. 마법처럼 과장된 이 시간속에서 우리의 순간이 영속된 것인지 찰나인지 깨닫지 못했, 몸이 떠오르고 있는 것인지 추락하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느낌은 마치 감정과 생사의 중간정도에서 외줄을 타는 것 같았다. 오색 물감이 머리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대는데, 동시에 나는 어느 방향으로 분명이 휩쓸려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길을 잃는다는 경험과도 비슷했다. 그래서 이곳은 내가 어디에 서 있든 중요한 느낌은 아니었다. 조금 옮겨가 위치를 바꾸어도 그것이 간극을 발생했다는 심상을 안겨주진 못했다. 그리고 아이는 굳이 더 달라지지 않아도 그것이 나를 찾아왔음을 알았다.


[다시 한 번 실례.]

흰 여우였다.


[오, 선생님. 저희가 만난 적이 있나요?]

[모르겠어요]

[잊으셨죠? 분명 기억을 잃은거야! 그렇지?]

[제게 말을 거는 당신은 누구죠?]

[어느 여우가 그랬을까, 혹시 나인가! 글쎄, 언제였을까! 모르지, 아니! 사실 분명한데도 말이야!]

바쁘게 말하는 것처럼 종알 대지만 그는 한가롭게 작은 열매를 꺼내서 먹고 있다. 그러다 눈이 확 동그래져서 아이를 쳐다보다가도 김이 식어 다시 흐리멍텅해졌다.


[음, 인과랑 시간이 너무 작은 단위로 걸어 들어가버린 걸까. 그때 그 욕심쟁이가 그랬으리라고?!]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거죠?"

"너 얘기, 당신, 선생님, 흰 인간"

"이전에 난 누구였죠?"

"무슨 황당한 농담인가. 선생님께서는 이전이 없으시지. 늘 다시 시작하시는데!"

"이전의 내가 없다니요? 그렇다면 시작하기전의 나는?"

"죽었겠지. 아니면 그것과 비슷한 것이거나."

"그럴리가요! 난 분명 희미하지만 무엇을 잡은 채 여기 떨어졌어요. 당신말대로 아직 빛깔도 희고요!"

"음, 그러고보니 당신.... 이상하긴해! 이번에는 매번 헛디딜 때처럼 식어있질 못하네?"

"내가 어디를 오르려 했는데요?"

"흐음, 무슨 일이지......"

"이 흰 짐승은 좀처럼 대화가 되지 않는군."


여우는 폴짝 폴짝 벽을 타며 뛰어도 보고 바닥에 선을 그어가며 슥삭슥삭 지워가며 애썼다. 보기에는 어린 짐승이 혼자 노는것과  다를 바 없고, 누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혹시, 뒷걸음이라 친 것인가?"


아이는 애써 장단을 맞춰주듯 발을 뒤로 빼며 걸어주었다.


"무질서하게 사는 짐승이 아주 작은 틈새로 역행을 해본 것인가. 그래서 본디 시간에 맞겨둔 기억도, 이전에 뽑아 둔 실을 따라 덮어 감아 버린 걸지도. 이상하다 미련 많은 짐승이 무슨 재주로 그리했을까?"


흰 여우의 중얼거림이 끝날때까지 아이는 좀더 이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우선 벽 한쪽에 글자를 남기려 하였다. 투명하게 반사 되어 무엇도 새겨지지 않았다. 소리가 울릴 때가지 괴성을 질러보았다. 먹먹한 듯 그자리에서 끊겨 버렸다. 이곳은 공허하다 못해 철저하게 비어있었다. 누군가가 찾아내지 못하도록 커다란 공간 속에 투명한 막으로 숨겨둔 것 같다. 


여우가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고보는 아이의 손 바닥을 파해치듯이 햘퀴었다. 몸 뚱아리가 내는 빛깔이 무색하게 육체의 피가 튀었다. 


"이것은 제가 선생님께 드리는 물음이자, 선택이며, 자체로 답입니다."


양 쪽 손바닥에 새겨져 이윽고 곪더니 순식간에 선명한 흉이 되었다. 여우는 만족한듯이 웃었다.




 도착과 시작은 서로가 주인이라고 반대쪽을 잡아 당깁니다. 

이대로 태어난 그 순간으로 누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노쇠해 이번 생의 반대편으로 서겠습니까?




공중의 층간에 존재하던 빙벽은 눈 부스러기 녹듯이 깨지고, 수직으로 이은 거대한 물줄기를 따라 배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기름 같이 무거운 검은 바다는 깨트릴듯이 반겨주었다. 밤과 같은 이곳의 하늘은, 늘상 이렇게 시리게 보이는 것인지 빛나게 적막하다.


잠자코 지켜보면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두개의 달이 조금씩 도망다니며 쫓고 있는데, 멀어지려하면 붙고, 따라 잡으려하면 약오르듯 반대쪽에서 떠올랐다. 그 사이에 보이는 수많은 별들은 안개가 느리게 얼어 붙다가 찢어지고 깨진 것같이 아스라이 빛났다. 


하늘까지 닿을것 같은 높은 흰 기둥들을 모든 방위에서 볼 수 있었으며,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족히 세 보아도 수십은 돼 보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들리는 노래가 있습니다.

매우 얇은 가닥들이 사각거리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시간에 살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나뉘며 교란되고, 

어김없이 하나라 믿었던 수만 갈래의 실을 스치며

빚으며, 깎고, 다듬어도 우리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단 하나라고, 자신이 그것이라고...


결국 자신의 몸 뚱아리 조각을 

하나씩 때어나 멀리 던져 깨트리며, 

다시 그 사이 시간의 간격에 씨앗을 뿌립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 갑판 위로 몇몇의 짐승만 분주하게 뛰어다닙니다. 

잔뜩 휘몰아치던 밖이 고요해진것으로 보아 무슨 사단이 났든 일단락된 모양입니다.

대신 배 모든 곳에서 속삭이듯 좋지 않은 울음 소리가 납니다.


모두가 이전보다 한층 가빠진 숨과, 차가워진 공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아래로는 이전에 누리던 보다 많은 것이 잠겨 있지만 모두를 생각할때 많은 양이 아닙니다.


아이는 쉴새 없이 위로 옆으로 아래로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너머에서 숨을 쉬는, 그 뒤의 그 뒤까지 생명의 빛을 확인합니다.


노란 층의 짐승들이, 나눔의 조각에서 추락한 짐승들에게서 이전에 없던 저급한 빛이 일렁입니다.

귀하게 쓰실 분으로부터 피해 아래로 도망쳤으니, 이젠 스스로를 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참동안 노를 젓지 않으니 돛을 펴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일절 바람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갑판 쪽에서는 날짐승들이 푸드럭 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물짐승들만 있을것 같은 이 배안에도 여러 이형의 짐승들이 함께 머물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아직 진짜 이형(形)을 조우한적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 방안에 있는 짐승들은 하늘의 천체도 확인 할 수도 없는 검은 시간의 윤곽에서 벌써 몇 바퀴나 저 날짐승들이 주위를 배회한 것을 모를 것입니다. 교대로 날아올라 꽤 위에서, 제법 멀리까지 살펴 보고 돌아왔습니다.

이젠 닻이 내려집니다.


뿔 피리가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방을 나온 짐승들이 가장 먼저한 것은 불을 쬐고 밥을 먹는 것입니다.


둥글게 모여 앉아 그들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는 허기를 달래기 시작한다.


직물로 젖어버린 듯 떨려오는 자신의 몸을 감싸고 하나 둘 위에서 가져온 음식을 베어문다.


 무리중 일부는 늘 먹던 이것이 이곳에서 먹으니 매우 달고 시어 몸을 바늘러 찌르듯이 황홀하다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짐승들이 자신의 공복을 호소했던 것과는 달리 병약해진 것마냥 음식을 잘 삼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정찰하던 날짐승들이 거칠게 헐떡거리며 돌아왔다.

이들도 이곳에 오자마자 분주히 움직인만큼 몹시 시장할 것이나 배의 가장 위쪽에서 그들이 보고 온 것을 조잘거리고나서야 접시의 국물이라도 핧을 수 있을 것이다.


배를 어느정도 채우고나서야 이들은 낯선 공간에 들어서고 시작된 불안감을 조금 해소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곳의 시간을 전혀 알 수 없으니, 하늘의 떠 있는 구체를 보며 하염없이 깜박였다.

조금 뒤, 닻을 올리고 아주 느린속도로 노가 저어지기 시작했다. 돛을 펼쳐도 쓸모가 없다.


여기는 조금도 바다가 일렁이지 않는다. 검게 묵직하다. 가라 앉는것도 아니며 누군가가 위에서 짓누르고

아래에서 밀어내듯이 제자리에서 침묵하다. 비어있지 않지만 가운데 공허하다는 것은 이런 느낌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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