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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적휘적 Apr 08. 2021

이야기가 우리에게 이야기해

문학을 사유함으로 완성되는 삶의 철학


스무 살, 대학교 1학년 시절, 어문학의 이해라는 수업에서 발표자에게 모난 질문을 하다가 큰일 치를 뻔한 적이 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의 발표에 어떤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발표자를 공격하려던 질문인 건 확실하다. 그 수업은 그렇게 질문을 던져야 교수님이 좋아하고 학점도 잘 나오는 수업이었으니까. 그래서 매 시간마다 공격성 질문을 하곤 했는데(사실 난 아무리 학점 잘 준다고 해도 자발적으로 발표하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다만 같은 조에 있던 다섯 학번 선배가 시켰을 뿐이다. 조별로 질문 하나씩 해야 했던 게 그 수업 룰이었다), 내 질문을 듣고 계시던 교수님께서 대뜸 내게 시학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그게 뭔지 알 길이 없던 나는 모른다는 대답은 무책임하니 절대 하지 말라고 역시 다섯 학번 선배에게 배웠기 때문에, 다음 시간까지 조사해서 발표하겠다고 무리수를 던졌다. 교수님은 몹시 흡족해하시며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발표를 하지 않았다. 다만 시학에 대한 논문을 두어 개 프린트해서 가방에 들고 다니며 학부 1학년인데 논문 본다 이거야, 하고 허세를 부리고 다녔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시간이 지나 4학년이 되어 부전공 수업에 들어갔을 때 시학을 잠시 다룬 교수님이 계셨다. 문학이라는 큰 학문에 들어가기 앞서 문학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언급하셨던 것인데, 그 이름이 굉장히 익숙해서 가만히 생각하다가 6년 전 신입생 시절의 객기가 떠올라서 적잖이 창피했다.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창피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혼자 속으로 허공을 향해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문학의 필요성을 설명하셨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문학은 유흥거리에 불과하며 인생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플라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쓴 책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어필했다.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이란 단순한 유흥거리가 아닌, ‘삶에서 철학의 목표를 이뤄나가는 인간의 행위’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에 문학이 왜 필요한가,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일상은 숱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먼저 시학에서 말하는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Poem)가 아니라 비극, 희극, 서사시, 서정시를 모두 포함하는 창작물인 ‘문학’의 개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헷갈리지 않게 문학이라고 쓰련다. 암튼 이야기가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한다면 틀림없이 문학이 철학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보며 그 속에서 좋아하는 인물에 자신을 투영시키고 겹치려 한다. 그 인물의 행동과 말을 따라하거나 인용하고 생각을 함께하기도 한다. 또한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현실의 우리에게 많은 부분 귀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 화를 내고 반면교사하면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읽으며, 또는 보며 자신만의 카타르시스와 함께 메시지를 얻는다. 메시지는 교훈으로 풀 수도 있겠는데, 사실 그게 교훈이 되어 삶에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그 메시지를 통해 사고의 폭이 넓어지리란 것은 확실한 바이다(넓어질지 편협해질지 또한 미지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통해 플롯이 어떻고 구성이 어떻고 비극의 요소가 어떻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중요한 건 이 책을 그가 '왜' 썼느냐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문학이란 삶을 이끄는 철학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 그러니까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플롯과 구성과 대사와 비극과 서사시 등에 대한 것은 문학이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철학적 요소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닐까. 무의식중에, 자신도 모르는 새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문학의 철학적 요소를 분석적으로 취한 것이다.

 

그러니까 모방의 예술, 시의 역사, 시가 희극과 비극으로 진화한 과정 블라블라 블라블라 장황하게 쓰여 있는 것들은 그냥 읽고 알아두면 되는 것들이고, 이 속에서 우리가 캐치해야 하는 건 문학은 어떻게 철학이 되어 우리 삶에 들어오는지, 그것이 우리를 어떻게 이끌 수 있고,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일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카타르시스를 얻는다. 그저 쾌락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보여준 상황을 우리 삶에 대입해보며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와 같은 질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보통의 철학이며 우리는 이것을 일상적으로 사유한다. 타인의 삶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로써 문학을 사유하기 전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까지 더듬어 찾을 수 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한 사람이 지고 있는 삶의 방향을 조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찮은 객기를 부리던 시절을 통과해 문학에 눈을 뜨고 시학을 읽기까지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8년 동안 책과 친해지고 여러 문학 작품을 접하며 삶의 방향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써야 위에 쓴 말에 더 힘이 실릴 것 같다. 진짜 달라지기도 했고). 달라진 방향은,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볼 때 퍽 맘에 든다. 지금의 내 모습과 내가 걷는 방향은 과거의 무수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동시에 내일을 살아갈 이유가 된다. 여기에는 문학의 입김이 상당했으리라고 확신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토니의 숭고한 희생과 무슨 음식이 가장 먹고 싶냐는 질문에 ‘치즈버거’라고 대답하는 모건의 아릿한 모습 또한 지금 내 시간에 담겨 있다(영화 또한 이야기라는 범주에서 문학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란 단순히 유흥을 위한 수단이 아닌,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지탱해주며, 완성될 수 있도록 다져주는 자양분이라는 것이다. 지루하게 써놨지만, 어쨌든 이것만으로 우리가 문학을 사유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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