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KIDS를 직접 목격하다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일그러진 아이들 표정에서 상황이 파악됐다. 마침 이미 주문을 마친 부모님이 상황을 목격했다. 사장님과 몇 마디를 나눴지만, 결국 결제를 취소하고 아이들과 카페를 나섰다.
듣던 대로 주변 풍경마저 ‘맛집’인 곳. 이곳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다름 아닌 ‘분위기’였다. 다른 카페보다 더 조용한 탓에, 잔잔한 음악은 알맞은 백색소음이 되었다. 완벽한 ‘쉼’의 환경. 모두 아이들을 배제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당황한 아이들의 표정과 카페에서 나가던 가족의 뒷모습이 커피를 마시는 내내 걸렸다. 더 이상 그 공간은 내겐 완벽한 쉼터가 아니었다.
‘노키즈존’은 각 업장의 선택 영역이다. 해당 방침의 적용은 천차만별. 소비자는 카페마다 전혀 다른 분위기를 경험한다. 정적이고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는 것은 하나의 ‘취향’이다. 여기에 갖가지 이유를 더해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것은 업주의 자유일 수 있다.
그런데 카페, 음식점 등은 단순한 상업적 공간일까? 이는 노키즈존을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인식적 오류를 뒷받침한다. 오로지 사고파는 구조 안에서, NO KIDS를 파는 주체의 자유와 권리로 규정짓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이루는 모든 곳은 ‘사회적 공간’에 해당한다. 상업적 규칙이 기본인 곳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민주주의는 절대 훼손될 수 없다. ‘배제할 자유’가 그 자체로 틀린 배경이다.
민주주의는 천부적인 ‘인권’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국가, 인종, 성별 등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부여받는 보편적인 권리. 카페에서 쫓겨난 아이들 또한 인권을 부여받은 우리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다. 인권은 ‘천부적’이기에, 법률에 명시된 수많은 자유와 권리에 우선할 수밖에 없다. 실제 법률상으로도 직업과 영업의 자유는 인권의 침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어떠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를 잠재적 가해자로 단정 지어 쫓아내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그 사람의 인격권을 박탈한 폭력적 행위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토종견을 기르는 나는 ‘배제’를 자주 경험한다. 대형견도 입장되는 반려견 카페에서, 진돗개라는 이유로 발걸음을 돌린 경우가 수두룩하다. 심지어 같은 반려인의 차별도 비일비재다. “얘도 집에서 키워요?”, “사납죠?”, “(본인 반려견에게) 너 물리면 죽어, 큰일 나”. 이 모든 차별과 배제는 토종견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다. 옛날부터 토종견은 1m 남짓 되는 목줄을 하고 마당에서 살았으며, 기질적으로 사나운 것이 보통이라는 편견. 노키즈존도 결국 ‘아이들은 시끄럽고 성가신 존재’라는 편견에 편승한 사회적 결과물이 아닐까.
카페에서 퇴장하는 가족의 뒷모습이 더욱더 쓸쓸해 보였던 것은 나 또한 차별과 배제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이런 대상화를 겪지 않아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에 모두가 더 예민해질 수 있었으면 한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존엄을 완성하는 데에는 온 사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