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일 -3
당돌한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사수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저... 퇴근하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금요일의 퇴근길에 사수와 나는 근처의 카페로 갔다.
"사실, 요즘 L대리님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아시는 것처럼 저는 야근 안 하려고 업무시간에 집중하잖아요?
일이 많으면 남는 건 당연한데, 일이 없어도 다른 팀 상사 때문에 굳이 남아서 야근을 하는 건 좀 억지라고 느껴져요. 그리고 솔직히 L대리님은 상사분들 다 출장 가시면 맨날 무단지각에, 업무시간에도 게임하고 담배 피우러 하루에도 몇 번씩 가서 한참 있다가 오시는데... 그런 시간 줄이면 야근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강개군날돌들막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부분, 저도 느끼고 있었어요. 사실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시는 것처럼 제가 사장님 가족이다 보니깐 그런 부분을 바로 윗 선에 말씀드리기도 조심스럽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말씀드릴게요. 사실 강개군날돌들막씨 말처럼 업무시간에 집중하고 야근은 안 하는 게 맞는 거죠."
그랬다. 나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너무나 무지한 사회인이었다.
그 당시의 회사의 업무량은 굳이 야근을 하지 않아도 업무시간에 집중하면 충분히 해 낼 수 있는 양이었으며, 야근수당도 따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야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도 없는 회사에서 굳이 불편하게 상사와 식사를 하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일이 시간낭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사수인 내 선배에게 나의 불만과 정당함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때 L대리의 '길들이기'가 한창이었기 때문에 나는 처음 느껴보는 부당한 지시에 너무나 힘이 들었고 이렇게 하면 그가 나서서 무언가를 해결해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이번 일 역시 내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다.
항상 지각을 하던 L대리가 나보다 먼저 출근을 했다.
나보다 먼저 출근해있는 L대리를 보고는 내심 사수가 L대리에게 잘 말해서 이렇게 상황이 달라졌구나 진즉에 말할 걸 그랬나 뿌듯한 감정도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L대리가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른 팀 사람이니까 나도 무시하면 돼.'
나는 솔직히 L대리를 무시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상사들의 눈을 피해서 지각을 밥먹듯이 하고 게임이나 해대면서 '대장'놀이를 하는 그가 게으른 베짱이와 같아 보여서 한심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작정하고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내 사수는 표면적으로는 L대리와 잘 지냈었다.
어차피 그도 사장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입사 한 달 차 신입사원이었고 표면적으로는 직원들의 화합을 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역시 L대리 때문에 강제로 함께 남아 저녁식사를 했고 불필요한 야근을 했었다.
그도 나와 같은 불만이 쌓여갔지만 이런 일을 곧이곧대로 사장님께 알렸다가는 자신의 위치가 곤란해지고 회사에서 도태될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그에게 좋은 먹잇감을 제공해주었다.
나는 그를 아르바이트 한 번 해보지 않았다고 내심 무시했지만 그는 나보다 사회생활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나는 사수가 윗선에 L대리의 근무태만을 보고하여 L대리에게 강력한 경고를 줄 것을 바랐다.
하지만 그는 내 예상과 다르게 이번 일을 윗선이 아닌 L대리에게만 이야기하였다.
아마도 추측컨대 그는 신입사원인 강개군날돌들막씨가 이렇게 불만을 토로했다고 나를 빌미로 L대리에게 암묵적인 경고를 주었지 싶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인데 사실 L대리는 그동안 다니는 회사마다 근무태만으로 퇴사를 당했다고 한다.
내가 전에 근무했던 회사는 우연찮게도 L대리 위의 직급들이 자주 출장을 다녀 사무실이 비어있는 일이 잦았고, 또 그는 자기 위의 상사가 출근을 할 때면 정말 성실하고 일을 찾아서 하는 직원처럼 연기를 잘했기 때문에 운 좋게 계속해서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L대리는 그동안 편안하게 '대장' 노릇을 하며 몇 년 동안 회사를 편안하게 잘 다녔는데 갑자기 신입사원이 나타나서 자기에게 경고를 주니 나를 밀어내기로 작정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