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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 국립중앙박물관

by 강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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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를 전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그 유물 수가 적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돌이 전혀 나지 않는, 모래로만 이루어진 지형이었다. 벽돌 유물이 대부분이었던 3000년 전의 문명이 남긴 유산은 그다지 많지 않다. <메소포니미아, 저 기록의 땅>은 총 66점의 유물을 통해 기원전 4000년부터 기원전 539년까지, 약 3000년의 역사를 소개해야 하는 도전이다.

국립 중앙 박물관과 메트로 폴리탄의 학예사들은 이 도전을 헤쳐나가기 위한 열쇠를 ‘기록’이라는 키워드에서 찾았다. 고대 도시의 수로를 전시장에 가져올 수는 없지만, 수로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있고, 지구라트를 직접 보여줄 수는 없지만, 신전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있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는 세계 최초의 문자인 쐐기문자의 발상지이기까지 하니, '기록'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리라.

총 3부로 기획된 이 전시의 1부 ‘문화 혁신’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전시이다. 1부에 전시된 13점의 쐐기문자 점토판 문서와 11점의 인장은 각각 신전, 수로, 농사 등 초기 도시 탄생 전반의 주요한 모습들에 대한 설명들부터 계약 문서, 상속 문서, 심지어는 구구단의 기록들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다. 모래더미 위의 벽돌로 빚어낸 문명은 기록과 상상으로 그 형체를 갖춘다.


1부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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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전시장을 들어서면, 유물의 크기에 비해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 상당히 넓음을 느낄 수 있다. 점토판과 인장은 필연적으로, 많은 부연 설명들을 요구한다. 쐐기문자로 된 조그마한 점토판을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는 무엇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로 난잡해 보일 수 있는 이 전시장을 쾌적하게 만드는 전략은 두 가지다. 첫째, 여백의 활용이다. 의도적으로 흰색의 타일로 만든 벽을 아주 높은 위치까지 배치했다. 격자무늬의 타일은 여백과 여백이 아닌 곳 사이의 대비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여 시각적인 쾌적함을 준다. 타이포그래피 역시 가독성이 높은 고딕체를 활용하였으며, 한글 제목, 한글설명, 영어제목, 영어 설명 사이를 십자형으로 나누고 간격을 맞추어 통일성을 높였다. 백색의 타일 안에 흑색의 선과 글씨만을 활용하여 시선이 분산되는 것을 막은 덕분에 자연스레 유물에게로 눈이 간다. 상단에는 3000년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를 연표로 표현하였다. 연도 사이의 간격이 넓게 배치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방대한 시간과 역사의 규모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연표의 위치가 많이 높고 아래 유물과의 사이에 여백이 뚜렷하게 존재하는 덕분에, 연표는 관람자가 유물을 볼 때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두 번째 전략은 가로와 세로 나누기이다. 벽에 놓인 작품들이 아닌, 가운데에 놓인 작품들의 경우 그 캡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봐야 볼 수 있게끔 배치했다. 덕분에 전시관 전경을 바라볼 때 이 텍스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관람자가 캡션을 볼 때 바닥을 향해 고개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불편함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지나치게 많은 캡션의 존재로 인해 관객이 입구에서부터 부담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연출이다.

KakaoTalk_20240603_220036716_18.jpg 1부 전시장 모니터들.

그러나 1부 전시장의 연출이 모두 뛰어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장 구석 한 편에는 돌을 깎아 인장을 만드는 방식을 설명하는 영상 그리고 인장에 대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큐레이터의 해설 영상이 모니터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인장과 그 인장을 굴린 점토판이 함께 전시되어 있을 때, 관객이 인장과 점토판 사이의 관계를 모를 수도 있기에, 이 큐레이션 영상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방문한 날 도슨트 해설 도중, 한 관람자가 도슨트에게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인장의 제작 방식에 호기심을 가질 관객들도 분명 존재하기에 제작 영상 역시 아주 적절하고 필수적인 영상으로 보인다. 이들을 재생하는 모니터 역시, 그 크기와 모양에 있어 벽의 격자무늬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덕분에, 공간에 잘 어우러진다. 그러나 문제는, 공간을 구성한 이가 모니터와 유물 뒤에 서서 작품을 관람할 이들의 동선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두 모니터는 전시실의 꼭짓점에 배치되어 있는데 어떤 각도에서 관람자가 관람을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다른 관람자가 모니터 혹은 그 옆의 유물캡션을 보는 시야를 가릴 수밖에 없게끔, 좁은 공간에 배치되었다.

2부 전시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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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예술과 정체성’은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부에서 전시실의 사방의 벽이 전부 흰색의 타일이었던데 반해 2부는 양쪽 벽이 까만색으로 칠해진 좁은 복도 형태이기에, 관람객은 이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으로 전시의 한 챕터가 끝나고 새 챕터가 시작되었음을 인지할 수 있다.

2부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은 <구데아 왕의 상>이다. 돌이 귀한 메소포타미아에서 섬록암으로 만들어진 유물이기에, 보자마자 첫눈에 이 유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유물인지 알 수 있었다. 이집트 왕들의 대부분의 상이 그러했듯이, 이 조각상 역시 왕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 이상화시킨 모습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건강한 신체를 강조하기 위해 다부진 체격으로 묘사했으며 특히 오른팔의 근육이 두드러져 보인다. 맞잡은 두 손과 커다란 눈은 사려 깊고 경건한 성정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상화된 모습의 상임에도 이 유물이 구데아 왕의 것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작품에 새겨진 문자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작품의 주제 키워드인 ‘기록’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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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구데아 왕의 상 / (오른쪽) 쿠쉬룩과 그 옆의 복도

2부에서 3부로 넘어가기 전, 2부 복도 제일 마지막 공간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면, 미디어아트 <쿠쉬룩>이 등장한다. 수메르어로 상자를 의미하는 쿠쉬룩은, 4미터 높이의 미디어 큐브로써, 메소포타미아의 땅과 강 그리고 쐐기문자의 이미지가 시시각각 변화하며 각 면에 등장하는 구조물이다. 유물의 절대적인 개수가 약점인 이 전시에서 4미터의 미디어 큐브를 통해

주제를 환기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연출이다. 공간 분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2부 전시장의 복도와 쿠쉬룩 사이에 커다란 벽을 놓음으로써 관객이 2부 관람 시에 시야를 방해받는 것을 막았고, 쿠쉬룩의 실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문을 들어서자마자 4m 크기의 큐브와 마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쿠쉬록의 전시 공간의 경우, 쿠쉬룩의 4개의 면 모두를 둘러볼 수 있게끔 길을 터두었고 또한 어떤 배경음도 있는 이 전시에서 유일하게 이 공간에만 웅장하면서도 고요한 사운드를 배치한 덕분에, 이질적인 공간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다만, 쿠쉬룩 주변에 관객이 걸을 수 있는 공간을 지나치게 좁게 만든 탓에 쿠쉬룩이 시야 전체에 제대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다.


3.

3부 ‘제국의 시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두 제국인 신-앗슈르(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리(바빌로니아) 제국의 예술품을 담았다. 그 입구에 라미수 그림을 배치함으로써, 거대한 제국의 왕궁의 입구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간접적으로 받게끔 했는데, 라미수를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닌, 흐릿한 미디어 효과를 추가함으로써 오히려 그 직관성을 잃은 것이 아쉬웠다.

3부 입구의 라미수

라미수가 지키고 있는 입구 맞은편에는, 두 개로 분리된 공간이 등장한다. 두 공간 중 하나는 아시리아의 왕궁을, 다른 하나는 바빌로니아의 왕궁의 모습을 담았다. 비록 우리가 볼 수 있는 유물은 왕궁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전시 공간을 웅장한 모습으로 제작하여 간접적으로나마 제국의 위용을 느낄 수 있게 유도한 점이 좋았다.

특히나 앗쉬르 제국 전시 공간의 경우, 사르곤 2세의 성채의 4m에 달하는 문의 위용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그 출구의 모습을 미디어 기술을 이용해 성벽의 모습으로 디자인했다. 아쉬운 점은, 이 성벽 디자인 역시 입구의 라미수처럼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닌,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 하는 불필요한 미디어 효과를 추가함으로써 직관성을 잃었다는 점이다. 앗쉬르 제국 전시 공간에는 두 개의 사자 벽돌 패널이 전시되어 있다. 색깔 표현의 다채로움과 사자의 표정까지 디테일하게 표현해 낸 점이 놀라웠다. 도슨트 해설에 의하면 실제 왕궁에는 이 같은 패널이 총 120개가 놓여있었다고 한다.

출구에는 알아보기 힘든, 한 유물의 부분 부분을 천천히 훑는 영상이 전시된 거대한 벽이 놓여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영상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으며, 그 스크린의 크기에 비해 바로 앞의 공간이 출구로 연결되어 있기에, 적절한 위치에서 감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훌륭한 전시의 아쉬운 마무리였다.


4.

세계 최초로 ‘문자’를 발명하여 ‘선사’ 시대가 아닌 ‘역사’ 시대를 살았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을 표현하기에도, 66편의 유물만으로 메소포타미아 3000년 역사를 전부 설명해 내기에도 ‘기록’이라는 주제는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다. 뚜렷한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섬세한 공간 연출 덕분에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던 전시였다. 그러나 미디어 기술의 활용들이 아쉬웠다.

메소포타미아는 우리에게 다른 문명들에 비해 너무나도 생소한 문명이다. 이 전시는 국립 박물관에서 최초로 진행되는 메소포타미아 전시인만큼, 관람객들 중 거의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물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기획되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를 전혀 모르는 이도 분명 이 전시에서 메소포타미아 3000년 역사의 전반적인 흐름을 대략적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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