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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08. 2024

정온(靜穩)의 밤

story 12. 여행자의 이름을 한 당신에게

그러나 이곳 샹그리라에서는 모든 것이 깊은 정온(靜穩) 속에 있었다.
달 없는 밤하늘 가득히 별들이 반짝이고 카라칼의 산정은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 [제임스 힐턴, 잃어버린 지평선]

2019.10.23 (08:00) Sto Domingo de la Canzada - Belorado (15:30) (22km)


「요 며칠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문득 당신이 찾아 떠난다던 샹그릴라를 기어코 찾아내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어젯밤에는 당신과 어느 나라의 허름한 호스텔 앞 간이의자에 앉아 싸구려 와인을 병째로 들고 건배를 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흐르는 이야기와 함께 달큰히 취해갔고 당신은 그 투박한 손으로 간간이 담배를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날의 밤처럼 얼굴이 불콰해져, 그 색이 꼭 와인을 닮아가는 새벽을 보냈습니다. / 그날 밤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던가요, 꿈에서는 어디선가 노를 젓는 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어째서였는지 나는 다리를 잃고 구걸하는 노인의 손바닥도 보았습니다. 너무도 작고 허멀건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던 탓에 나는 다홍색 자갈을 꼼질거리다 그 위에 올려주었습니다. 노인이 크게 한 입을 베어 물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웃었습니다. 아주 밝게. 별들이 피운 꽃보다도 밝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 꿈에서 깨고 나니 그날에 당신이 일러주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실은 아직까지도 조금 혼곤한 탓에 꿈이었는지, 실로 그랬는지 가뭇해져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잠시 멈추라 했던가요, 천천히 가라 했던가요. 사람이 지쳐버리는 이유는 너무도 빠르게 달려온 탓에 저들의 영혼이 미처 따라오지를 못해 그런 거라고 했던가요. 철저히 외로운 시간을 통해 영혼이 나를 만나게 하라고 했었던가요. / 하기야 당신이 정확히 무어라 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게 되어버렸습니다. 당신의 얼굴조차도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게 되어버렸으니까요......」

Sto Domingo de la Canzada를 벗어나는 길에 있었던 작은 성당

정온(靜穩)의 밤, 쉽게 잠이 찾아오지 않아 글을 적었다. 흐린 정신으로 적어 내린 글을 뇌까리며 살펴보니 꿈에서 꿈을 적은 모양새다. 노인의 주름은 물결처럼 반짝였던가. 손톱은 코끼리의 상아처럼 구부러졌던가. 공기가 빈자리를 차지한 숙소는 유난히 적막했고 멀리서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만 아슴아슴 들렸다. 무심히 찾아온 아침에 침대를 벗어났다.

새벽에 나서던 길, 날이 흐린 길을 홀로 걸었다.

길을 나서고 보니 날이 흐렸다. 오전 내내 비가 내려 판초를 뒤집어쓰고 걸어야 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만 빠끔 내어놓은 채 무슨 생각을 하며 하염없이 걸었을까. 어떠한 깊은 사색들에 잠겨 가라앉고 푹푹 꺼지기도, 빠지기도, 사라지거나 날아가기도 했을까, 하고 보란 듯이 묻는대도 대답할 길이 없다. '길을 걸으며 생각들을 그리 한다는데, 난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무슨 생각들을 해야 하는지 생각한 셈이다.

홀로 만들어먹은 나만의 타파스

그 시시한 사색놀이에 빠져 길을 헤맸다. 엉성한 자존심에 혼자 걷겠노라 으름장을 놓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다른 순례자들의 안내로 뒷덜미를 물려 되돌아온 꼴이다. 홀로 외딴 길을 갈 뻔한 소외의 위기감 때문인지 허튼 거리를 돌아온 체력의 소모 때문인지 애먼 배가 주려왔다. 근처 음식점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어제 먹고 남은 빵과 치즈, 올리브유를 곁들여 나름대로의 타파스(Tapas)를 만들어 먹었다.

belorado로 가는 길

Belorado는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라고 글을 적고 보니 의아하다. 정말 어렵지 않았나. 이렇게 쉽게 어려웠던 날을 잊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온갖 사색에 절여졌던 것만 같다. 눅눅한 판초 속에서 마음도 습하게 젖었다는 생각. Belorado에서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와인 한 잔을 먹으며 숙소를 찾아보는려는데 우연히 호텔도 운영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순례길에 올라 자그마치 호텔이라니, 홀로 정해놓은 순례길 제 몇 조 몇 항 어쩌고 철칙 '숙소는 알베르게에서 해결한다'를 고수하고자 고개를 가로저으려니 'Shower Tub'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 되어 마음에 박히고는 빠지지 않았다. 가격도 35€니 합리적이겠다, 철칙은 개뿔. 이미 욕조에 마음을 빼앗긴 나는 숙소를 예약하기도 전에 흐리멍덩한 눈빛이 되었다.

Belorado 미처 못가 나왔던 Villamayor del Río 라는 마을

35€짜리 호텔이라 큰 기대를 하지도 않았건만 큰 침대가 두 개에 너른 방이 공연히 마음만 적적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욕조는 즐겨야 할 터, 급히 씻고 가까운 가게로 와인을 사러 나갔다. 치즈와 올리브, 뽈보(Pulvo) 통조림을 사들고 돌아와 와인과 곁들이며 목욕을 즐겼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에서의 '본 것'이 의미하는 특유의 싱거운 우아함은 그 흉내의 모양새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위로를 주기에 충분했다. 맹랑한 술기운이 올라 느닷없이 담그고 있던 물에 올리브유를 떨어트렸다. 맨몸을 담그고 있는 모양새가 벌거벗은 닭처럼 숭했던 건지 백숙을 삶을 생각이었던 걸까. 술기운에 홀려버렸던 내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취기가 싹 달아나버릴 만큼 미끌거리는 욕조를 닦고, 닦고, 또다시 닦아내야만 했다.

목욕과 함께 즐긴 만찬

무슨 일이든 단단히 벼르면 그르치게 된다. 더운 물 속에서 와인을 마시자니 얼굴이 쉽사리 달아올랐다. 급히 목욕을 마무리하고 나왔다. 모처럼 얻은 온전한 휴식이라 생각하니 이대로 잠에 드는 것이 한없이 아쉽기만 한데 쏟아지는 눈꺼풀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 열흘만에 처음 가지는 편안한 잠자리에 황송한 팔다리가 몸둘바를 모르고 녹아내렸다.


코를 고는 이도, 다른 층 같은 침대에서 뒤척이는 이도 없다. 사부작거리는 작은 몸짓들도 없고 소곤거리는 말소리도 없다. 침묵. 자의이거나 타의이거나 관계의 한 중심에서 부대끼며 지내다가 이탈된 것만 같다. 사람들과 이렇게 저렇게 얼크러져 울고 웃으며 지내는 것이 좋았을까. 몸은 편하다 하면서도 자꾸만 적적해지는 마음에 무릎을 끌어안고 옹송그렸다. 자꾸만 어젯 밤에 적어놓은 글을 마음에 갖다댄다. '그리고 당신이 웃었습니다. 아주 밝게. 별들이 피운 꽃보다도 밝다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몇 줄을 더 기대어 쓴다. '나는 그저 당신이 우수에 잠겨 이야기하던 샹그릴라를 찾았더라면 하고 바라겠습니다...' 글에 이름을 짓고 잠에 든다. '여행자의 이름을 한 당신에게'


Question 12. 넌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해?

배낭도, 조가비도 모두 보라색. 그렇지만 그게 제일 좋아하는 색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민한다. 3분이 지났다. 다시 고민하다 5분이 지났다. 좋아하는 색이라. 내가 정해놓은 질문들이지만 고작 색깔에 대한 질문이라니 퍽 유치하다.라고 괜히 자존심을 앞세워 시간을 끌어본다. 유치한 만큼 더 대답하기 힘든지도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따위를 잊고 산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 보면 은연중에 좋아하는 색 하나씩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마음속에 제 색깔 하나씩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감정에도 색깔이 있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좋아하는 색이랄 것이 시시각각 변할 것도 같아 꼭 하나를 짚어 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큰 탈은 아닐 것만 같다. 그래도 내일부터 내 눈동자가 어떤 색에 더 많이 머무는지 자주 살펴보기로 약속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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