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J Jul 06. 2024

보통의 사람

story 19. 나만의 어중간함, 그 중함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미워할 것을 마땅히 미워하고
사랑할 것을 마땅히 사랑하는
그저 보통의 사람
- [나태주, 내가 좋아하는 사람]

2019.10.31 (08:00) Carrión de Condes -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 (16:30) (26km)


나설 채비를 마치는 순례자들의 모양새가 분주하다. 오늘의 길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대지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는 법을 택했다. Carrión de Condes로부터 다음 마을인 Calzadilla de la Cueza까지는 17Km. 그 사이엔 작은 마을 하나 없고, 그렇기에 편의시설도 없다. 누군가 큰 목소리로 'Nada'라며 정말 아-무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강조하자 마음이 흔들린 순례자들이 몇몇 그의 뒤를 따랐다. 

오늘 걷는 길, 그저 평평한 길이다.
Carrión de Condes의 아침풍경
10세기부터 19세기 사이 스페인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이었던 Monasterio de San Zoilo

하나뿐인 길을 걸어, 걷고, 또 걷는다. 아침 이슬이 낮게 깔린 날씨에 달팽이가 마실을 나와있다. 등딱지가 바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갈길은 가겠다는 듯이, 묵묵히 머리를 내뻗고 뒤따르는 몸을 불러온다. 애틋하리만치 부지런한 몸짓이다. 어느 부주의한 순례자의 발 밑에서 깔려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열댓 마리를 옮겨주었다. 대게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파악되지 않는 달팽이들이 있었는데 부지런히 걸어온 방향으로 돌려보내버렸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도 자신들만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을 텐데.

LEÓN으로 향하는 표지판, 그 위의 순례길 표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외쳤던 그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없다. 탁 트인 시야와 쭉 뻗은 길 위로 모든 순례자들의 뒷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나보다 조금씩은 다 빠른 것 같다. 나는 왜 이리 느린지.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그 부정적인 마음은 홀로 물꼬를 트더니 생각의 생각을 거듭해 물길을 만들고 깊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다리가 짧지. 사실 뭐 하나 잘하는 것 없지. 어중간한 나. 공부도 외모도 재능도 성격도 그저 그런 나. 어느샌가 푹 고꾸라진 고개로 걷고 있다가 산드레를 만났다. 산드레는 특유의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로 내 옆을 따끈하게 달궜다. 두세 시간 동안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몰히 하고 있었어?" 내가 그랬나, 그렇게 보였나. 그저 그런 보통의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잠깐 슬퍼했다고.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이렇게 말했다. "흠, 보통의 사람이라. 나름대로 멋진 단어처럼 들리는데. 대단한 균형이잖아."

광활하게 푸른 땅 위로 해바라기들이 말라붙어있다. 땅 위로 떨군 씨앗이 다음 해에 다시 피어나겠지.

길가의 밭에서 농사일을 하던 노인이 우리를 불러 세웠다. 트랙터를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데, 자기가 타고 온 차를 옮겨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산드레는 흔쾌히 응하고는 그 대가로 마을에서 조금 더 가까워지는 지점까지 얻어 타고 간다고 했다. 화창한 날씨 같은 그녀는 사라지고서도 덥게 잔열을 남겼다. 나름대로 멋진 단어라, '보통의 사람'을 곱씹으며 걷고 또 걷다가 잠시 쉬고 일어나 다시 걷는다. 뭐든지 어중간한 보통의 나. 뭐든 중간쯤에 머무르는 나, 의 평행선. 그녀의 말이 떠나지 않고 귀를 맴돌았다. 


대단한 균형이라니. 뭘 알지도 못하면서. 한참을 밝기만 한 당신이 뭘 알아.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잖아. 아니다. 당신이 맞나. 그녀가 맞는 건가. 하긴 날 위해 꾸며낸 말이라도 상관없지 않나. 생각해 보았다. 뭐든지 중간쯤은 하는 보통의 나. 어느 사이 치우치지 않는 균형의 나. 나만의 어중간함에 대해 생각했다. 기울지 않는 나의 중심에 대하여. 단어 하나로 정의될 수 없는 그 모든 단어들의 중간 즈음에 있는 나에 대해여. 퍽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는 용감하고 누군가는 신중하다. 또 누군가는 알뜰하고 누군가는 호탕하다. 다른 이들은 조용하고, 소심하고, 이타적이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성실하고, 건강하고, 똑똑하고, 과감하고, 정직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조각조각 나뉘는 우리는 누군가가 원하는 모습을 닮아간다. 그 모습들이 그들을 정의하는 단어들이라면 어중간함이라는 나의 유연함은 또 어떤 모습으로든 나를 정의할 수 있지 않겠는가.

길게 난 도로를 따라 푸르게 펼쳐진 대지

17Km를 걸어 도착한 Calzadilla de la Cueza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바게트 안에 치즈와 베이컨이 들어있는 보카디요를 시켜 먹었는데 맛이 예술이다. 들어있는 재료도 몇 개 되지 않는데 이런 맛이 날 수 있다니. 양도 얼마나 많은지 먹고 가방에 넣어두길 반복하며 세 번에 나누어 먹었다. 다시 걸어 도착한 Terradillos de los Templarios의 알베르게에서 모두를 다시 만났다. 수빈, 소영 씨와 보카디요, 감자튀김, 맥주로 저녁을 먹었다. 누군가 오늘은 누구를 만나 무엇을 느꼈냐고 물어왔다. 무언갈 표현하는 법도 어중간한 나는 그 민망한 마음을 뒤에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신 그녀들의 말을 들었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그 중간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어중간함, 그 중함에 대하여.


Question 19. 신체 특징이나, 유난히 좋아하는 부위가 있어?

나의 모습을 사랑하기에 너무 서툴었던 나는 나의 몸을 제대로 살펴본 적 없었다. 나다움을 만드는 것들. 그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60c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키, 얼굴도 몸매도 어중간한 나의 외모. 짧은 다리와 긴 상체로 무릎을 채 끌어안을 수 없는 어그러진 비율. 쉽게 그을리는 피부. 짧고 뭉툭한 손가락, 그중 작게 휘어진 오른쪽 약지. 등이 두드러진 매부리코. 조금 짙은 얼룩이 있는 오른쪽 눈동자. 검게 그을린 피부 위로 하얗게 남은 시계자국. 길게 뻗은 목선, 동글게 이어지는 어깨. 생각해 본다. 우린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을 직접 바라볼 수 없다고.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거울 속의 나일 테니까. 혹은 유리에 비치는 나. 좌우가 뒤바뀐 나. 그러니 누군가 보는 내 모습이 무슨 소용이 있나. 그저 감사하기를, 굳센 다리와 암팡진 팔뚝을 가진 것. 오글오글 모여있는 발가락, 푸름과 누름을 구별할 수 있는 눈으로 걷고 볼 수 있는 것. 바람소리가 들려오는 귀와 들판의 향을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는 것. 순례길을 걸을 수 있는 것. '¡Buen Camino!' 맹랑한 목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 유난히 좋아하는 나의 모든 것. 나 다운 것. 

작가의 이전글 내가 가고 싶은 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