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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찾아서

Story 1_고요한 고도(古都)를 향하는 여행의 의미는

by JJ


인천공항 출국장.

나는 왜 여기에 있나.


요 며칠 연이은 술자리에 기어코 앓아누울 지경이 되어서야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어젯밤엔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이, 아니. 몇 시간 후면 출국인데 미처 싸지 못한 캐리어는 입을 헤벌쩍 벌린 채 작은 방 한복판을 차지하고 앉았다. 눈을 떠야지. 몸을 일으켜야지. 아직 어둠이 걷히지도 않은 창밖으로 마주한 건물의 불빛이 스몄다. 무기력하고 어질거리는 어수선한 밤. 짐을 싸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아, 귀찮아.'


언제부터였지,

이렇게 숙제처럼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던 것이.

여행에 지쳐버렸다니, 말도 안 돼.


내가 즐겼던 여행은 어떤 형태였을까. 그 여행을 다시 찾는 방법은 무엇인가. 여행이 언제부터 해치워버려야 하는 일로 다가왔는지에 대한 일말의 조사와 치료가 필요했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여행지는 어디였나. 모르긴 몰라도 분명 여름일 거다. 어렸을 적부터 나기를 까무잡잡하게 난 데에는 상관관계, 그게 아니라면 쓸모라도 있을 테니까. 실오라기 하나만 걸치고도 발발거리며 뛰어다닐 수 있는 곳이라야 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있거나 책만 읽을 수도 있는 곳이라야 했다. 그래서 가기로 했다. 가장 편했던 여행지로. 뜨겁고 시원했으며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맘껏 웃고 즐겼던 곳으로.

라오스 북부의 고요한 고도(古都), 루앙프라방으로.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행복해야 한다는 불안.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어.

licensed-image?q=tbn:ANd9GcRVGt9gD8ai09aYGJx9nX0GHBuSeOBlDVBv6VuoTM_30n5u9SKRRD_K7KzrHLRlJIoCEPJ2mSbb9jWU9jaJCbzabZfS5GSPOZdJKnFYLw 루앙프라방 (출처, google)

6년 차 직장인, 허락된 연차를 모두 여행으로 탕진해 버리는 나는 동료들의 관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차란 업무의 공백을 의미하고, 그 말인 즉 나의 업무까지 동료들이 떠맡게 되는 것이 업무 질량 보존의 법칙이니까. 주변 눈치를 살피지 않고 연차를 몰아넣는 내가 고깝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이골이 나고 앓아누워도 아득바득 연차를 아껴가며 기어코 여행을 떠나고 마는 것이 미련해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사자인 나에게는 항상 용기 있게 떠나는 것이 멋있다는 이야기뿐이 할 수 없겠지만.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이미 이렇게까지 여행을 떠나는 나 자신을 나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여행이 그렇게 좋아?'

누군가 물으면 난 대답할 수 있을까, 자신 없는데.

좋은가? 그냥 하는 거지 뭐.


입을 쩍 벌린 캐리어를 싸고 푸르길 반복한다. 배낭여행자 신세였을 때엔 꿈도 못 꾸었을 사치다. 사람에게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선택을 하기 힘들어진다 했던가, 같은 맥락으로 피아노 건반이 58개가 아니라 100개였다면 더 형편없는 악기가 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 캐리어도 지치고 나도 지쳐 한동안 눈싸움까지 할 지경에 이르렀다가, 결국은 탁발식에 공양으로 쓸 보리과자와 쌀과자 따위를 던져놓고는 어딘가 엉성하게 들어찬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번엔 달랐으면 해.

충분하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만족했으면 해.

내 마음을 찾아갔으면 해.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책을 읽다 잠에 들기를 반복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간다. 커다란 혹 같은 캐리어를 수하물로 보내버리고, 미리 환전을 신청해 둔 외화를 찾고는 미끄러지듯이 출국수속을 밟는다. 면세 인도장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물품을 수령하고, 라운지에서 요기를 하고 와인을 마신다. 공항이 동네 면사무소처럼 편해진 것에 대하여 오묘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내가 나고 자란 동네가 강원도 춘천이라는 작은 도시였다는 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거다. 엄마의 허락을 맡고 놀러 나가던 시절이 있었지.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내가 되고선 그때가 그리워지는 모순.


떠오르는 천 가지의 생각.

흩어지고 날아가는 만 가지의 마음.


출국 수속 대기열에서 아빠의 품에 폭 안겨있는 아이를 마주했다. 아이는 세상에 나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그 모든 순수함을 담아 나의 눈에서 자신의 영혼이 훤히 다 드러나 보이는 큰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방긋 웃어 보이고 호기심 어린 그 얼굴을 조금 따라 내려가 작고 새싹 같은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바짝 깎아진 손톱에서 그녀를 품고 있는 아버지의 정성과 그 옆에 무신경한 듯 서 있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았다. 그 탓에 내 얼굴에 잔잔히 미소가 떠올랐는지, 아이가 나의 눈을 보고는 방긋 웃었다.


하얗고 작은 아이야.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조금 나눠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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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지루함이 공존하는 오묘한 공간

또, 기어코, 다시,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창 밖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반짝이는 지상의 별빛들을 눈으로 따라간다. 그런 풍경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바라보고 싶은 마음. 그 별 하나하나가 각자의 빛을 따라 살아가고 있을 다채로운 삶의 향연을 상상한다. 살아남을 수 없으나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좋다. 이야기, 기억, 흔적, 구름, 파도, 소리, 빛, 감정, 그림자, 삶과 이름, 바람, 향기, 메아리, 약속. 그것들을 만나러 나의 여행을 시작한다.


너의 마음이 허락한다면

만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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