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벤처 아이디어의 최종 발표는 현업 AC들과 임원들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방구석 아이디어가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10년 넘게 대중 앞에서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냥 짧은 의견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벤처 아이디어를 판매해야 한다니 걱정이 앞섰다.
다만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고백하자면 2가지 믿는 구석이 있긴 했다. 그중 한 가지는 대학생 때 멋모르고 들었던 주식투자동아리였다.
대학 시절 속했던 주식투자동아리에서는 기업의 리서치 보고서를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프레젠테이션과는 조금 다른 방법을 쓰곤 했다. 바로 프레젠테이션의 맨 첫 장부터 끝장까지의 내용을 모두 연결시키는 것이다. 버리는 페이지 없이, 모든 페이지가 인과관계로 엮여야 했다. 주식의 펀더멘탈과 보고서가 좋은 것이 첫째이지만, 발표에서 논리가 완벽히 보일 때 그 종목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프레젠테이션을 구성하는 것에 익숙했다. 주식 종목을 소개하는 것이 벤처의 IR 피칭과 투자를 권유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면 승산이 있어 보였다.
두 번째 믿는 구석은 우리 집 삼식이였다. 삼식이는 사회적 단어로 남편이라는 자이다. 그는 나와 달리 발표가 일상인 데다 특히 임원 발표가 많아 내가 겪어야 할 발표에 조언을 줄만한 여지가 있어 보였다. 물론... 협조적이진 않았지만.
런닝맨을 보다 잠들려는 삼식이에게 사정하여 조언을 부탁했더니 삼식이는 아래의 답변을 주고 쿨하게 드러누웠다.
1. 모든 페이지에 역할이 있어야 한다. 없으면 버려라.
2. 목차는 8개 이내로 한다. 초과하면 줄여라.
3. 스크립트는 외우지 않는다. 키워드만 외운다.
4. 말이든, 그래픽이든 강조하려는 것을 분명히 한다.
5. 발표자가 그 안에서 내용을 제일 잘 안다. 쫄지 마라.
삼식이는 정말 신이 이성 99%로 시험 삼아 빚은 인간이 아닐까. 발표 앞에 괜스레 긴장되는 입장에서 삼식이의 의연함이 얄밉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래도 과거의 행적과, 현재의 조언이 합쳐져 뭔가 할 수 있을 듯한 희미한 느낌.
걱정 위에 설렘과 희망이 한 겹 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