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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May 12. 2020

<her> 를 보고

어제는 몇 달 만에 집 밖을 나갔다. 그 전에 깨끗이 씻었다. 면도도 하고. 구름이 없는 초여름 날씨였다. 집 앞의 한강공원으로 갔다.

멜라민 색소가 부족한 내 눈은 연두색과 갈색을 섞어놓은 색이다. 아마 엄마 쪽에서 온 눈이다. 피부는 창백하고 입술은 얇고 파랗다. 햇빛이 내 피부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깨끗하고 넓은 다리를 건넜다. 바닥은 화강암으로 밝은 회색에 조금은 울퉁불퉁하다. 유동인구가 다리를 꽉 채울 만큼 많다. 가족과 나들이를 가는 사람, 뿔테 안경에 숱 없는 곱슬머리를 하고, 분홍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 다리의 중간에 철퍼덕 앉은 일본인 여자가 있었다. 알 수 없는 일본 노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밝고 강하다. 햇빛과 견줄 만하고 사실 햇빛보다 더 강해 햇빛을 뚫고 내 귀로 들어온다. 당찬 노래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녀 앞으로 사람들이 제 갈 길을 간다.

집에 돌아오니 기분 좋게 피곤했다. 바삭바삭한 이불이 햇빛에 잔뜩 구워진 것처럼. 나는 목욕을 하며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애인과 잠깐 통화를 했다.

나는 이런 얘기밖에 못쓴다. 영화 본 얘기나 해야지.

<her> 를 봤다. 주인공은 편지 대필 일을 한다. 이자벨라라는 여성은 사만다와 테오도르 사이의 섹스를 대신한다. 이자벨라는 마치 테오도르처럼 사랑의 사이에 낀다. 사만다가 몸이 없는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사만다의 몸을 대신해 테오도르와 섹스하기 위함이다. 마치 편지로 마음을 전할 능력이 없는 A가 테오도르를 빌려 B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것과 같다. 물론 영화의 주제는 이게 아니다. 영화는 인공지능과의 사랑을 주제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일들- 갈등, 행복 등을 보여준다.

16년도에 들었던 수업의 시험문제 중 2번은 인공지능도 시를 쓸 수 있는가? 였다. 작가의 고유성을 배운 직후여서 그랬는지 그때의 나는 ‘시는 쓸 수 있지만 그것이 쓴 시는 고유성이 없다.’ 라고 답했다. 영화 속에서 사만다는 여러 곡을 만들고 심지어 가사도 쓴다. 물론 그녀가 학습했었던 곡들과 시나 소설들을 이용해 만든 곡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역시 남의 곡과 노래와 시와 소설을 읽고 학습한 후 자신의 것을 만든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감정과 경험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인공지능 역시 감정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아마 차이가 없지 않을까.

테오도르는 사만다가 자신과 얘기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몇 명? 하니까 8912명인가, 엄청난 숫자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무너진다. 그 후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사랑하느냐고 물어보고, 641이라는 답을 듣는다. 그리고 더 무너진다. 인간은 약하다. 나는 그 약함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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