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서편제(남도사람 연작)』

by 김감감무

여러 신화에서 저승은 살아서는 갈 수 없는 땅 밑의 무한한 공간으로 표현되곤 한다. 저승의 음식을 먹거나 뒤돌아보면 저승에 영원히 속박된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와중에 땅 위는 어떤가. 땅은 생명의 시작이자 터전으로 표현되곤 한다. 땅이 어머니 혹은 농경의 신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 것 또한 낯설지 않다. 땅은 삶과 죽음의 이미지를 함께 지닌다. 땅은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조금 짓궂게 읽힌다. 인간은 땅으로부터 머물지도 가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다가 죽는 운명의 존재로 말이다. 길 위의 삶이라든가 구도라든가 하는 표현들은 내게 인생 자체로 읽히곤 한다.

인간의 삶이 그렇다 보니 인간의 무엇도 이런 인간의 운명과 닮지 않은 것이 없는 것 같다. 평생을 무인으로 살다 간 최배달이 말년에도 주먹 쥐는 법에 대해 고민을 했다고 하지 않는가. 죽음 말고는 확실한 도달은 없는 인간의 운명 동안에 '경지'란 환상일 뿐이란 말인가. 무언가를 추구한다는 것은 다 허망한 일일까. 그런 허망함이 ‘한’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일부이지는 않을까. 일부일 뿐이다. '한'은 인생을 아울러서 풀어내고 싶었지만 풀어낼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무언가다.

한이 단순한 서러움이 아닌 것은 그것이 자신의 삶의 원동력의 역할을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은 그것 때문에 살고 싶지 않은데 살게 하는 것이지 않을까. 딸의 소리를 위해 눈을 멀게 하고 평생을 찾아다니고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만나서 밤새 소리를 주고받아놓고는 끝까지 서로를 모른 척하고 떠나버리는 오누이의 마음은 한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알고선 키워주고 유지하고 인정하는 슬픈 축복의 마음에서였지 않을까.

모든 것이 아직은 어렴풋하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그런데 왠지 모르게 눈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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