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

by 김감감무
중랑천하면 장미!


처음 가본 건 아버지와 함께였다. 물을 무서워하는 나를 각성시키고 싶었는지 세차게 흐르던 그 물줄기 가까이 데려가서는 별거 아니라며 억지로 보게 했다. 정비가 덜됐던 시절이라 그런지 물의 색은 맑지 않았다. 흙과 뒤섞여 더러워 보였고 물줄기는 흐르기보단 쏟아지는 모양새였다. 징검다리의 간격은 까마득하게 넓어 보였다. 여전히 물은 무서웠다.


중학생이 되고서 농구를 시작했다. 학교 체육시간에 농구를 처음 접하게 됐고 크게 흥미를 느꼈다. 자연스레 중랑천에 농구 코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오랜만에 중랑천에 다시 가봤다. 오래간만에 찾은 중랑천의 모양새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시설이 잘 정비돼있었고 징검다리의 틈새는 전보다 좁게 느껴졌다. 이제는 겁먹지 말라는 듯 물줄기는 고요해져 있었다.


농구를 시작한 뒤로 수백, 수천 번은 방문했던 중랑천이지만 자세한 구성이나 행사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장미축제를 한단 소식을 듣고 지나가봤다. 늘 사람이 많았지만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의 인파는 처음 봤다. 노점이 깔려서 다양한 장난감들과 간식거리를 팔고 있었다. 시설물은 장미에 어울리는 테마로 새롭게 지어져 있었다. 장미 도서관이 생겼고 육교 입구에는 고풍스러운 문이 생겼다. 중랑천은 여전히 잔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예전 연인과 중랑천 강가를 따라 산책을 하곤 했다. 농구 코트 말고는 눈여겨보지 않던 내게 더 다양한 시설이 있음을 알려줬다. 좁은 내 시야를 넓혀준 그녀였다. 쌀쌀한 강바람에도 같이 걷는 연인의 온기 덕에 따뜻했다. 나도 상대에게 그랬으면 했는데 못내 아쉽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미련, 미안함 등의 여러 감정의 소용돌이를 안고 혼자 방문하게 됐을 때. 그때도 중랑천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야외 체육시설에 대한 통제가 생겼다. 운동기구에는 진입금지 테이프가 휘감아졌고 농구 골대의 림은 제거됐다. 전의 인파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산했다. 혹시나 아직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방문했지만 쓸쓸히 돌아와야 했다. 물은 여전히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중랑천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시대에 따라 주변 환경이 변해왔더라도 강은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구민들이 중랑천을 벗 삼아 자라왔을 것이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을 수 있고 때로는 혼자서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을 것이다. 마음 편히 방문하게 될 수 없게 된 지금에서야 그곳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다. 이제야 중랑천이 나를 이루는 기억들에 수많은 자리를 꿰차고 있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김형석 교수의 책에서 고향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그는 고향이란 나로 하여금 나되게 한 그 실재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목적지가 아닐까라고 적었다. 태어난 곳이 반드시 고향이란 법은 없다. 나의 기억과 성장을 담고 있는 곳. 그것을 빼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는 곳. 내가 시작되는 곳. 내가 흔들릴 때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있어주는 곳이 고향이지 않을까. 내게 중랑천은 그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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