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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Jul 28. 2019

오늘은 전과 막걸리


장마철이라 요즘 하늘은 매일매일 울상이다.  잿빛 하늘과 근엄하게 끼여있는 먹구름. 이런 날씨는 아무래도 다른 표현보다도 울상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린다. 울려고 하는 얼굴  표정. 비 올 것 같은 모습을 하고 결국 오지 않는 모습이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울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는 표정과 닮아있다.

흐린 날의 연속이다 보니 나의 일상이 괜히 더 따분하게 느껴졌다. 한쪽 등이 나가버려 반쯤 어둑해진 방안에 있는 것처럼 세상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다. 얼른 새 전등 갈아 끼워 전처럼 환해졌으면 하고 간절한 마음이  들 때쯤, 일기예보를 보니 한 며칠은 비가 더 올 거란다. 기운이 빠지던 찰나에 마침 뒷 베란다에 싹이 자란 감자들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떠오른 듯이 ' 목요일은 감자전 해 먹는 날! ' 하며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생이 ' 김치전도! ' 라며 맞장구를 쳐줬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가 오는 날엔 왠지 전을 먹어줘야 할 것 같다. 축축한 날씨에 먹어야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전과 함께 맹물이나 탄산음료를 마시면 괜히 전에게 미안해지는 기분도 들어서 모처럼 막걸리도 먹어줘야 된다. 날씨와 음식, 마실 것까지 갖춰지면 그 자체로도 별일 없이 흐리기만 할 목요일을 기다릴만한 이유가 된다. 어쩌면 장마도 이럴 작정으로 몇 날 며칠을 계획하고 온 것인지도 모른다. 흐리고 진득한 날씨 따라서 기분 적적하게 있지 말고, 그래도 며칠 중 하루는 빗소리에 맞춰 전이라도 구워 먹으라는.

장마도 장마지만 우선 나는 감자를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컸다. 손에 잡혀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버려지는 재료가 불쌍했다. 집에 한창 감자가 많았을 때 웨지감자나 감자튀김을 해먹기도 했었는데 아무래도 튀기는 건 뭐든 맛있기는 하지만, 기름을 많이 사용해야 해서 가정집에서 하기는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재료도 필요 없고 맛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감자전을 만들기로 했다. 감자를 갈아서 동그랗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채 썰어서 굽는 것이 씹히는 맛이 있어 더 좋다. 감자를 채 썰어서 밀가루나 부침가루를 묻혀 소금 간을 살짝 하고 잘 부쳐주기만 하면 되는데, 모든 전이 그렇듯 반죽의 농도와 부칠 때의 두께, 부치는 기술에 따라 망하기도 쉽다.


일단 감자를 최대한 얇게 써는 것이 중요하다. 채칼을 쓰면 편하지만 미련한 나는 감자 4개를 직접 채 썰었다. 왠지 음식을 하려고 주방에 들어간 이상 칼로 뚱땅뚱땅 거리지 않으면 영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감자를 채 써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칼을 쥐고 있는 손이 묵직하게 아파왔다.  반죽의 농도는 눈대중이다. 나는 음식을 만들 때 계량을 하지 않는다. 가끔 눈대중으로 간장을 붓고, 소금을 뿌리고 설탕을 넣고 하다 보면 내가 원래 이렇게 과감한 사람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워낙 생각 많고 걱정 많은 탓에 매사에 고민하고 주저하는 일이 많아 스트레스를 받는데, 평소에도 딱 이만큼만 과감하게 행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눈대중으로 간을 맞춰 짠맛이 강하다면 물을 조금 더 넣으면 되는 것처럼, 시도한 일이 실패를 했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하고 계속 목표했던 대로 가면 그만인데. 나는 그동안 그정도의 실패도 두려워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량기에 넣어 재고 따지며 답답하게 행동했던 것이 이제야 안타깝게 느껴졌다.   

되직하게 반죽한 감자를 기름이 달궈진 팬에 올리는데 이때도 최대한 얇게 펴주어야 한다. 가장자리도 단정하게 다듬어주어야 뒤집을 때 흐트러지지 않는다. 중불과 센불 그 중간 언저리에서 구워주다가 충분히 바삭해 보이면 뒤집어준다. 동생의 청양고추를 넣은 김치전과 부추전, 나의 감자전을 한데 펼쳐 담는다. 투박하게 담긴 전들에 막걸리가 빠질 수 없다. 그렇게 10분 거리의 마트에 가서 막걸리를 사 오면서 내가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나 생각했다. 이왕 먹는 거 완벽하게 차려 먹고 싶었고, 앞에 준비된 전에게 그리고 나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막걸리를 보니 스무 살 때 처음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나를 혼낸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매일 같이 밤막걸리를 사러 오던 그 할아버지는 내가 계산하기 위해 막걸리병을 휙 잡아 들면, 다짜고짜 화를 냈다. 이미 거나하게 취해 벌건 얼굴을 하고선 윽박지르기만 하니 나는 내가 왜 혼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날은 여느 때와 같이 할아버지가 ' 흔들지 말라고! ' 하며 화를 냈는데, 이번에는 왜 고작 병을 흔든 것 가지고 그렇게나 열을 올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왜 흔들면 안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밤막걸리만 보면 조심스럽게 옮겨 계산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찌꺼기가 섞이지 않은 맑은 부분을 드시고 싶었던 것이다. 그 당시 고작 소주도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막걸리의 맑은 부분만을 즐겨마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나도 흔들지 않고 막걸리의 맑은 부분을 먹어보기로 했다. 밤막걸리 할아버지에게 혼난 기억을 떠올리며 마트에서부터 병이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세워서 가지고 왔다. 그렇게 가져온 막걸리를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주막에 온 기분을 냈다. 찌꺼기가 섞이지 않은 맑은 막걸리를 마시고 나서야 나를 다그치던 할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깔끔하면서 개운한 그 맛은, 이제야 나를 혼낸 할아버지를 용서 아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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