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국 최초로 농산물 직거래처럼 작가와 독자의 직거래를 성사시킨 인물이 있다. 그 작가는 '이슬아' 작가. 인터넷은 우리가 감히 직접 하지 못하던 일들을 훨씬 작은 힘으로도 해볼 수 있도록 환경을 바꿔주었다. 바야흐로 모든 것의 탈중앙화 시대이다. 그 흐름을 읽고 가장 먼저 가보지 않은 길을 용감하게 걸어 나간 여자가 있다.
무언가 포스가 느껴지는 포스터. 투박한 글씨체와 쨍한 색. 바이크 위 그녀의 칙칙한 체크무늬 셔츠와 멜빵바지. 험상궂은 표정이 구독 안 하면 강매해 버릴 것 같다.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것은 신문인 것 같은데, 신문 배달하듯 수필을 배달해 준다는 의미이겠지. 배달하면 떠오르는 바이크는, 흔히 중국집 배달이나 우체국 오토바이로 쓰이는 슈퍼커브 같은 언더본 바이크다. 하지만 그녀는 네이키드 바이크에 앉아있다. 저렇게 생긴 네이키드 바이크를 타고 배달하는 라이더를 본 적이 있는가? 우체국 아저씨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세련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멋있다. 글도 그럴 것 같다. 그럴 의도였는지, 아니면 그녀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소품이 저 바이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재는 2018년도에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몇 달간 연재 원고들을 모으니『일간 이슬아 수필집』이라는 두꺼운 책이 되었다. 책 중간중간 그 달을 마무리하며 구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이 있었다. 한 달에 만 원이라는 돈을 선불로 지불하고 글을 읽어주는 독자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가 듬뿍 담겨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도서관에서 공짜로 빌려봤다. 그녀의 글들을 탄생시켜 준 그 당시 구독자들에게 감사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누군가의 일상의 모습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수필이기에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 소설에도 작가의 인생이 담겨있지만, 소설은 수필과 다르다. 여러 장치들에 숨을 수 있다. 기본 전제자체가 일단 픽션이니까. 하지만 수필은 그게 어렵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슬아 작가는 '생판 남인 독자인 내가 이런 것까지 알아도 되나?' 하는 것들까지도 담담하게 보여줬다. '내가 만일 이 당시 이 작가를 구독했다면 돈은 안 아까웠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센세이셔널 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처음 배우던 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누드화를 그려본 경험이 있다. 만화를 배우던 시절, 매주 누드 사진을 5장 골라 과제를 했다. 그림 초보는 인체에 옷이라는 것이 걸쳐져 있으면 인체의 흐름 파악을 할 수 없기에, 모델은 반드시 누드여야만 한다. 먼저 그림을 보고 그에 맞는 도형화를 그리며 인체 동작을 단순화 하는 법을 배운다. 그 뼈대에 근육을 붙이며 그림을 위한 해부학을 배웠다. 물론 실제 모델을 그려본 적은 없다.
글을 읽으며 마치 나는 누드화를 그리는 학생이고, 이슬아 작가는 누드모델처럼 느껴졌다. 내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수필집을 읽어나가며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실제로 누드모델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누드모델뿐만이 아니었다. 오페라 공연에 나체로 선 경력도 있었고, 그것이 공중파에 방송된 경력도 있으신 분이었다.
그녀의 글을 읽는 기분은 마치 누드화를 처음 그려보는 학생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델이 훌렁 옷을 벗어놓고 프로답게 멋진 자세를 취한다. 사람의 나체를 이렇게 빤히 쳐다본 적이 없던 학생은, 처음엔 좀 당황스럽고 내가 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이내 피사체의 모습에 집중을 한다. 접힌 피부, 튀어나온 군살, 점, 털, 근육의 모양, 경직되고 이완되어 있는 부분들. 사람의 몸이 만들어내는 곡선들. 그것들을 나라는 필터에 걸러내어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그녀를 해석한다.
그녀의 글도 그러했다. 처음엔 '소설이 아니라 수필인데....작가님 괜찮을까?' 싶다가도 이내 그림의 피사체에 집중하듯 글의 흐름을 따라갔다. 이 수필이 연재되는 책이라는 공간은 그림 작업실. 그녀는 모델. 나는 그 모델을 찬찬히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는 그녀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보여줬다. 다양한 옷을 입을 때도, 실 오라기 하나 없이 벗을 때도 있었다. 당연히 이슬아 작가는 '트루먼 쇼'처럼 모든 걸 보여주진 않는다. 편집되고 머릿속에서 각색되고 해석된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 가식과 거짓은 없다고 느껴졌다. 진솔함이 느껴졌다. 그러기에 인간의 내면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었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래. 이게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탄탄한 근섬유가 피부 안쪽에 멋지게 자리 잡은 근육도. 생뚱맞고 귀엽게 튀어나온 군살도. 모두 인간의 한 부분이다.
그녀의 글 중에서 그녀가 다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연아 선수였나.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일렁인다는 것이다. 다음 생에는 글쟁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단다.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슬아 작가에게 질투를 느꼈다. 그녀의 글들이 맛있어서 나는 천천히 아껴먹었다. 책 두께는 두꺼운 고봉밥이었지만, 수필은 쉽게 읽히기에 정신 차리면 훅 다 읽어버리고 만다. 도서관 반납일에 늦지 않을 정도로만 천천히 읽었다. 그녀가 주변에 전하는 말이 너무 따뜻해서 내 머릿속에도 꼭 담아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는 가지지 못한 부모님과의 튼튼한 유대관계도. 그녀의 일상 속에 녹아있는 친구들도 부러웠다. 물론 달달한 것만 있진 않았다. 흉하고 엉뚱한 모습도 그대로 보여줘서 위로가 되었다. '나만 이상한 건 아니구나.' '사람이라면 모두 다 이런 엉망진창인 모습을 하고 살아갈 때도 있는 것이다.'라고. 이것만큼 커다란 위로가 있을까.
나는 좀 빡빡한 사람이다. 이따금 쪼잔한 것에 심취해 큰 그림을 놓치고 마는 그런 사람. 인생이 생각대로 아름답게 흘러가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볼멘소리를 심하게 궁시렁대는 사람. 주어진 생명에 그다지 감사하지 않는 사람. '내가 반쪽짜리 염색체를 가지고 있던 시절, 난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1등이 아니라 2등을 했으면 이 고통은 없었을 텐데.' 하는 상상을 해보는 사람. 그런데 그녀의 글을 읽으며 조였던 내 마음의 넥타이가 조금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름다운 관계들도,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순간들도 모두 인생의 한 부분이니까. 모든 걸 통제하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일 뿐이다. 그것을 조금은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에피소드들. 이슬아 작가님의 어머니 '복희'씨는 작가님을 품었을 때 입덧이 심해서 먹을 수 있는 게 막걸리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알코올은 임신 중 절대금기인 X등급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렇게 이슬아 씨는 태어나고 자랐다. 다행히 그녀는 별문제 없이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이것 또한 인생의 한 모습인 것이다.
가감 없이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녀의 용기가 부러웠다.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그녀의 추진력도 부러웠다. 작중 에피소드 중에서,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여행과 같은 어떤 계획을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말하면, 그녀는 '진짜로' 해버리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그냥 말만 해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나만해도 그렇다. 단순히 툭 던져보는 것과 그것을 진짜 하는 것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벽이 얇은 것인지, 아예 없는 것인지. 아니면 나만큼의 벽이 있지만, 포스터 속의 저 네이키드 바이크를 몽골의 기마민족처럼 타고 달려와 망치로 그 벽을 다 부숴 버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부럽다.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 파주 단독주택에 넓은 작업실과 거주공간을 만들어 멋지게 살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솔직함과 그걸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화끈한 실천력이 그녀를 그런 공간 속에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겠지. 그녀의 글에 담겨있는 에너지가 나에게도 전해졌으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용기와 무자비한 행동력이, 그녀의 글을 읽은 나에게 전염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