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이 '엄마'가 된 엄마를 위해.
자기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공감할 줄 알고 되어보지 않은 입장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정말 그러지 못하는 사람 중 하나. 아무것도 안하는게 배려라고 생각하는 타입이지만, 그나마 하는 소박한 배려도 지극히 내 주관대로이다 보니 상대방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엄마도 남편도, 20년 넘은 단짝친구도 나를 매정하다거나 무심하다고 나무라곤 한다. 그런 내가 별 탈 없는 30년을 살아왔으니 공감능력이나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대하는 센스는 여전히 부족할 수 밖에.
그래도 내가 경험해 본 일에 대해서는 궁금해하는 사람이나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과도하다 싶을 만큼 자세하고 구구절절한 친절을 베풀곤 한다. 그 중 하나가 공황장애다. 결혼하고 이듬해 여름, 집과 가까운 일터에서 일을 마친 저녁 무심하게 귀가하던 길에 갑작스럽게 공황발작이 찾아왔다. 두 다리가 공중에 떠있는 것 처럼 무력하게 느껴지는 걸 신호로,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듯 빨리 뛰었다. 정신이 어찔하고 아득하게 나를 떠나는 것 같음과 동시에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신경이 과도하게 반응해 당장 쓰러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집으로 가는 길을 설명했다. 그 길로 나와 죽어가는 나를, 혹은 죽어있는 나를 발견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그 순간 이후로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매일 죽음을 떠올리며 살았다. 노트북과 다이어리에는 유서같은 글을 써두었고, 내가 죽고 나면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매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 끝에 늘 엄마가 떠올라 장소를 안가리고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죽으면 안되는 이유는 엄마, 엄마 뿐이었다.
십수년 전에 아빠가 공황장애를 앓았었다. 그때만 해도 공황장애는 낯선 병이라 온 가족이 당황했고 아빠는 특히나 더 그랬다. 그래도 아빠는 적극적이고 빠르게 대처해 양, 한방의 도움을 받아 시도때도 없이 찾아오는 그 공포에서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내 공황장애가 생각보다 오래가는것 같아 아빠가 치료받았던 의사가 진료하는 한방병원을 찾게 되었고, 장사꾼 같았던 그 의사가 처방한 약, 모든 환자에게 똑같이 처방해주는 것 같은 그 사기꾼 같은 약을 먹고 내 상태는 굉장히 좋아졌다. 살도 빠지고 공황발작도 사라지면서 나는 임신을 했다. 그리고 나서 공황장애는 90프로 이상 치료됐다. 여전히 한번씩 몸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지만 그게 가짜라는 확신에 금방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애를 낳고 나니 내몸이 이미 만신창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라 내 몸에 대해 신경이 이상한 반응을 할 때도 '내 몸은 이미 망해서 그래' 하며 쿨하게 떨쳐낼 수 있게 됐다. 좋은건가.
내 인생에 공황장애 시절이 지나고 곧바로 임신, 출산을 지나 육아의 지리한 시절이 오면서 내가 죽으면 안되는 이유는 엄마에서 아들로 바뀌었다. 눈에 넣어도 안아픈, 내 모든걸 다 주어도 안아까운, 그런 시장바닥에 뒹굴법한 상투적인 문장들은 기가 막히게 사실적인 표현이었다. 아이는 모자란 행동을 할 때도, 손바닥이 아플만큼 큰 박수를 치게하는 신통한 행동을 할 때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고, 이 아이를 세상에 두고 내가 사라진다는건 너무나 큰 비극으로 느껴졌다. 아이의 잠자리에서 사랑의 말을 해줄 때마다 나직하고 웅숭깊게 되뇌었다. "엄마가 엄마 오래해줄게."
아이를 낳고 늘 보호를 받던 입장에서 보호자의 입장이 되고 나니, 부모님에 대한 의지가 줄었다. 애정이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의지가 줄다 보니 덜 찾게 되는게 사실이다. 부모님과 시부모님 모두 그 점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실것 같다. 박완서의 책에서 해외여행중 아프게 된 박완서가 집에 돌아갔을 때 딸들이 바깥에서 사온 죽을 내오면 호통을 치리라 벼르는 내용을 읽게됐다. 새삼스레, 날 위해 모든걸 희생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것 같던 우리 엄마도 요즈음의 내 무신경함에 서운함을 느꼈겠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첬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우리 엄마는 엄마를 빨리 잃었다는게 생각났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빨리 잃었다. 결혼도 하기 전, 스물 다섯즈음의 나이에 막 환갑을 넘긴 외할머니를 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스물 다섯. 어엿한 성인이고 사회에서는 존경받는 교사였지만 그래도 겨우 스물 다섯. 엄마에게 여전히 받을게, 배울게, 기대어 의지할 게 많은 나이에 엄마는 엄마를 빼앗긴 거였다. 성숙하고 우직한 엄마는 좀 철딱서니없는 아빠와 결혼해 첫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기 이틀 전에 오빠를 낳으면서 '엄마'가 되었다. 천성이 명랑하고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엄마지만, 엄마 없이 엄마의 역할을 하느라(아빠의 엄마 역할도 하는것 같았다, 그 시대 아내들의 보편적인 기대역할이었겠지만) 나는 엄마의 흥보다 인내의 장면을 더 많이 봐야 했다. 여전히 엄마 손이 많이 가는 나는, 엄마가 엄마 없이 '엄마'를 시작했다는 것이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아마 오빠의 여린 목소리가 있는 힘껏 발음해 낸 엄마- 그 엄마 소리가 엄마를 엄마로 만들었으리라. 엄마의 엄마에게 사랑받았던 어린시절의 기억이 뜨거운 에너지로 변환되어 매일 매일 더 엄마가 되어갈 수 있었으리라.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 다시 둘로 돌아온 엄마 아빠는 아빠의 꿈을 위해 곧 강원도로 이사한다. 사랑스런 손주, 더 사랑스런 딸과 한 동네서 살며 하루걸러 한솥밥을 먹던 생활을 접고 연고없는 산골로 떠나는 엄마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엄마 역할에 게으르고 이기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충만히 가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시간동안 밑반찬 대신 요즘 유행하는 디저트나 책을 택배로 부치고 그리운 마음을 감추지 않고 기차에 올라타 나를 선물로 보내어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고 싶다. 사실 그게 딸이겠지. 그래서 노년의 여자에게 가장 요긴한 것이 딸이라는 거겠지.
둘째를 갖는다면 딸이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엄마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