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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누 Sep 22. 2021

손을 그리고 싶었다

<인문대 403호>


손을 각지게 그리는 걸 좋아한다


 살다 보면 가끔씩 뮤즈가 찾아올 때가 있다. 그건 어느 이른 아침일 수도 아니면 늦은 밤에 산책을 하는 동안일 수도 있다. 이번에 나는 그림과 관련한 뮤즈가 찾아왔는지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발현됐다. 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손이었다. 손? 그렇다, 손. 물건을 사용하거나 집을 때 사용하는 그 신체 부위 말이다. 내가 그때 손을 떠올린 건 아무래도 손을 그리는 게 사람을 그리는 것보다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손이란 건 원래 마음만 먹으면 1, 2분 내로 스케치를 마무리할 수도 있고 잘못 그려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살짝 넘어진 아이처럼 그냥 털고 일어서면 된다. 그래. 그래서 나는 아마 손을 그리고 싶었던 거다.


 그림도 결국에는 내가 시작한 여느 취미들처럼 권태기가 와버렸다. 그건 2년 전 겨울에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던 중에 일어났다. 나는 평소처럼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인물 사진을 모델 삼아 크로키를 하고 있었고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더 이상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다음에 더 잘 그릴 자신이 없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그림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게 됐다. 그렇게 자취방 벽을 내가 완성한 그림들로 채우겠다는 꿈은 습작 대여섯으로 끝나버렸고 친구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로 주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하게 됐다. 아직은 버리지 못하고 주머니 안에 넣어둔 작은 꿈들이지만 하루가 지나갈수록 꿈보다는 미련이라는 이름에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너무나도 기뻤다. 오래가지 못하고 꺼져버릴 잔불이라는 건 알았지만 아무렴 어때. 처음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나는 손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날 또 손을 그렸다. 한낱 낙서들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그냥 이 감정이 그리웠던 거다.


 우리가 좋아했던 것들과 권태기를 맞이한다면 초심으로 돌아가자. 결과가 아닌 과정이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자. 넘어져도 먼지만 훌훌 털고 일어나면 됐던 시절을 기억하자. 정말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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