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정말로 퇴사했다. 마음속으로만 지르고 질렀던 그 단어가 드디어 실제가 되어버리다니...! 철천지 원수와의 몇 백 년 묵은 감정도 한순간에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의 시원한감정이 찾아왔다.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언급한 건 얼마 전 금요일이었다. 재택근무 때문에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결코 얼굴 보고 얘기하기 껄끄러워 의도적으로 재택일을 기다린 건 아니다. 일을 그만두기로 한 결심이 단지 어제서야 제대로 굳었을 뿐이었다.
처음에 총 5명으로 구성되었던 우리 팀은 4명 그리고 3명으로 줄어들었다가 얼마 전에는 다른 팀과 합병되어 7명이 되었다. 물론 나는 그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퇴사했지만 그간 많은 변화들이 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부당하게 떠날 수밖에 없던 이들을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서로를 응원하고 함께 의기투합하여 협업해 오던 팀원들이 빠진 그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억울하게 차출되어 나날이 힘들어하는 그들을 보면 텅 빈 옆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회사 차원에서는 어쩔 수 없는 구조조정이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정치질에 희생된 것이었기에 얄궂게 놀리는 그 입들이 야속했다.
리더급들의 결속력이 단단해짐과 동시에 일반 팀원들에게 가해지는 꼰대력과 압박감도 심해졌다. 일하기만 해도 벅찬 마음인데 인간관계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힘들었다. 또한정치질의 피해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회사를 가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가슴이 불길하게 콩닥콩닥 뛰고 숨이 가빠오는 게 심상치 않았다. 역시나 점심시간이 되어도 여전히 심장이 조급하게 뛰었다.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으로 스윽 대충 닦으며 그때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아, 이대로 계속 일하다간 뭘 해보기도 전에 죽겠다. 이제 그만하자.
이상하게도 포기하기로 결심한 때부터 다시금 주변 공기가 차분해진 것 같았다. 사람 많은 지하철이 이전만큼 답답하지도 않았고, 밤마다 아침이 오는 게 무서워 나약하게 덜덜 떨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잠시 소란했던 몸과 마음이 점차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덕분에 정신없어 한동안 둘러볼 여유조차 없던 주변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을 뿐인데, 이 일도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는데. 별 것 아닌 여우비 앞에서 차분히 이 또한 지나가길 기다리지 못했던 못했던 과거의 내가 스쳐 지나간다. 모든 걸 끌어안고 마냥 여유롭게 기다릴 수도, 빗속을 뚫고 나가지도 못했던 내가. 그런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어설픈 착한 아이 콤플렉스와 사회초년생의 순진했던 무지였다. 어렵게 잡게 된 기회를 이대로 놓쳐버리면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그런 바보 같고 번잡한 걱정이라는 무지.마치 장마철 우리의 발을 묶어두었던 기나긴 소나기처럼.
이 모든 걸 깨닫고 퇴사하겠다는 결정을 회사 측에 전하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솔직히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찝찝하게도 그러지만은 않았다.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전하면서 그간 눌러 담았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울음으로 기어코 변했다. 보고 싶을 동기들과의 즐거웠던 추억들과, 초반의 열정적이었던 나의 햇병아리 시절의 모습을 그저 기억으로만 남기고 새로운 시작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억울했다. 기어코 내 발로 직접 떠나게 만드는 그 윗사람들이 미워서. 그래도 그런 나를 위로해 주고 지지해 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용기를 내 볼 용기가 생겼다.
이후 퇴사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부러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이라 해야 할까, 소심한 복수라고 해야 할까. 여기만 떠나면 무슨 일이든 다 풀릴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서 인사를 받으며 나가는 길,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곳에 나가서도 내가 의지하고 좋아했던 사람들과 계속해서 연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외 쓸데없는 인연을 정리하는 그 마지막 길이 오히려 후련했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퇴사 후 나는 백수가 되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참았던 이유가 돈이었는데 의외로 막상 닥치고 보니 당장에는 엄청 큰 일도 아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따뜻한 햇볕을 벗 삼아 산책하는 여유로운 하루의 시작이 얼마나 소중하던지. 남들 출근해 일하는 시간에 우디향이 가벼이 내려앉은 동네 카페 구석 한편에서 마시는 페퍼민트가 얼마나 시원하던지. 사소한 모든 것이 소중해졌다.
운동도 하며 건강하게 일상을 회복하던 중 문득 궁금해졌다. 왜 당시의 나는, 우리는 늘 큰 벽에 가로막힌 사람처럼 굴었을까. 왜 무조건 극복하고 이기고 헤쳐나가려고만 했을까? 때론 돌아가보기도 하고 포기해도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데 말이다. 오히려 한계를 알고 그만둘 줄 아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자 정답일 수도 있는데.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정답이 없다는 건 그 무엇도 정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가 보다. 어찌 보면 짧은 생동안 첫 시련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첫 사회생활 덕분에 지금 이 생각까지 도달할 수 있는걸 보아하니 말이다.
사실 아직 완전한 내적 평화로움에 다다른 건 아니다. 인생은 산 넘어 산이지 않은가. 1년간의 등산 끝 하산했을 뿐 제2의 산이 아니, 몇백 개일지도 모르는 산과 자잘한 언덕들이 기다리고 있다. 금수저가 아니니 평생 일 하지 않을 수도, 혼자 살아갈 수도 없으므로 현재 주어진 시간이 잠깐의 휴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등산할 때도 잠시 쉬며 물 마시고 과일로 기력보충도 해야 다시 힘내서 정상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저 꼭대기를 향해 과감히 쉴 결정을 내렸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그 자체로 필요하지만 거기서 머물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쉬면서 충분히 회복했을 때쯤 다시금 내적 열정과 에너지를 또다시 전력을 다해 퍼붓기도 하고 다시 휴식을 취하고 그렇게 천천히 나의 미래로 다가갈 것이다.인생은 기니까.
그러니까 너무 힘에 겨워 쉬고 싶을 때면 걱정하지 말고 함께 쉬어보자. 이 시간들을 양분 삼아 더 전력질주할 우리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