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술 이야기 3. 다르다
유혹의 말은, 깃털처럼 부드러웠고 밤처럼 은밀하였다.
“나에게 오라, 그대 아름다운 얼굴로 나에게 오라”
삐리~ 삐리리 리리~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뒤를 따르는 아이들처럼 단단히 홀려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 같다. 우리는 세상 모든 짐들을 기꺼이 짊어진 고독한 고3 청춘이었음이다.
‘올 것이 왔구나!’ 우리는 겸허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포기를 해야 할 때는 단호해야 한다.
때는 바야흐로 일 년의 끝자락, 크리스마스이브였고 방학의 시작이었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점수는 받아 들었으나 갈 대학은 마땅치 않았고 논술도 앞두고 있었다.
그 해 겨울, 우리는 누구나 먹먹했고 우울했으며 다가올 미래에 불안해했다. 호기심 따위는 사치였을 것이다. 무서웠고 두려웠다. 몸도 마음도 추운 겨울이었다.
친구 1호는 며칠 전부터 우리에게 악마의 속삭임을 날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 집에 아무도 없단다. 파자마 파티 하자”
‘라면 먹고 갈래요? 집에 아무도 없는데...’ 대사보다 더 유혹적인 멘트였다.
“어머니, 허락해 주세요, 집에서만 놀게요” 착한 아이 코스프레를 하며 다른 친구 집에 돌려 돌려 전화를 하고 갖은 아부를 첨부하고서야 6명 중 5명이 파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 첫 외박이다.
‘처음’이라는 말은 낯설지만 알고 싶은 상대였고
‘우리끼리’라는 말은 낯익지만 위험할 수 있는 상대였다.
“야~, 이렇게 모이다니 꿈만 같으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가배! 너무 좋다, 오늘 하루 즐겨보자구!”
모임 주최자 친구 1호가 개회를 선언한다.
“맞다 맞다, 이렇게 거룩한 날, 억수로 힘들게 모였는데 긴긴밤 뭐하겠노? 주(酒)님을 영접해야지”
친구 2호가 개회사에서 모임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소주나 맥주나 집에 있는 거 몽땅 먹어치우자”
친구 3호가 엄숙히 선수단 선서를 한다.
“안주도 푸짐하네. 오떡순(오뎅 떡볶이 순대)도 있고 햄도 있고 빵도 있고, 올~매울 신, 신라면도 있네~ 유후~”
친구 4호와 선수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환호한다.
“신(辛)라면 아이고 행(幸)라면!”**
“맞나? 행라면?” 한참을 웃어젖혔다.
“자, 모두 잔 들어래이,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위하여!”
드디어 성화가 점화되었다. 우리는 정정당당 멋진 승부를 펼칠 것을 다짐했다.
아지트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음식 먹은 것도 바로바로 치우지 않아도 되었고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되니 술도 먹고 싶은 만큼 알아서 각자 따라 마셨다.
당시에는 지부지처(지가 부어서 지가 처먹는다)가 유행이었다. 유행은 따라 하라고 유행이지!
그러나 지부지처를 하다 보니 이게 기분이 참으로 묘해진다. 우선 술 따르고 마시는 자세가 ‘나라 잃은 백성꼴’이다. 한숨 한 번 푹~ 쉬어주고 식탁의자에 앉아 양반다리로 전환한다.
또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은 난해한 얼굴 표정으로 인간의 오욕칠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스스럼없는 감정 표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함께 울고 웃으며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 학교에서 생활해온 세월이 얼만데. 한솥밥을 먹는 식구와 진배없는 우리들은 그러나 이제 곧 서로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이다.
이별은 예정돼 있어도 슬픔의 농도는 옅어지지 않는다.
헤어지는 연습이라도 필요했던 걸까? 헤어지는 슬픔을 잊기 위해 다가올 만남을 불러본 것이었을까?
대학을 포기하고 직장인의 길을 가는 친구 4호의 대학생활에 대한 질투. 대학생활보다 졸업 후 더 앞선 미래의 꿈을 얘기하던 낭만 가득 친구 3호. 자기만 서울로 가게 되어 ‘나 혼자 뭐하냐?”며 부러움을 유발했던 괘씸한 친구 1호. 가장 안정적으로 예견된 학교와 과를 정한 친구 2호. 학점에 맞춰 원하지 않던 학과에 진학해야 하는 막막함을 토로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서로 잘해보자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으쌰 으쌰 했더랬다.
이야기는 술자리만큼 길어졌고
짙어져 가는 밤처럼 깊어갔다.
지난 1년 동안의 일들이 소환되어 나오기도 했다.
그중 으뜸으로 뽑힌 이야기는 ‘밥’에 관련한 것이었다. 그때는 도시락 두 개를 싸 다닐 때였는데 1교시 먹고 땡! 도시락 하나 까먹다 벌 선 이야기, 남의 맛있는 반찬 뺏어 먹기,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빠져나가 감자크로켓 사 오던 일, 비슷비슷한 반찬들이 너무 지겨워 상추 오이 고추 깻잎 등을 가져와 쌈 싸 먹던 이야기, 김장 김치통을 아예 들고 와서 쭉쭉 찢어 먹던 이야기... 캬~ 그때가 좋았는데... 앙~앙~
주정의 신호탄이 울렸다!
술병은 쌓여갔고 술은 떨어졌다.
말은 새고 있었으나 아직 선수들은 피니쉬 라인을 향해 마지막 피치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맘껏 먹어보자 할 때마다 술은 왜 모자라는 것인지. 장식장에 반쯤 남은 양주병이 레이더에 포착됐다. 아... 이 맛이다. 나는 역시 센 술에 세다.
소주로 시작해 맥주 양주로 갈아타는 ‘쏘맥양’ 기차다.
기차는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넘어 종착역에 다 와가는데 슬슬 친구들의 주사, 주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친구 1호; 우는 이유도 모르는 ‘상갓집 알바형’
“자꾸 눈물이 나.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
친구 2호; 다 돌려놔~ ‘도돌이표형’
“아 참, 있잖아~근데... 뭐라고? 다시!”
친구 3호; 많은 웃음 주시는 ‘미소 속에 비친 그대형’
“너네들 되게 웃긴다, 웃겨. 재밌다, 재밌어”
친구 4호; 누울 자리 찾는 ‘숙취성 혼절형’
“내만 그렇나? 느그 안 졸리나? 여기가 어디고?”
그리고 나; 인생 뭐 있나? ‘의리의 질주형’
“의~리, 무조건 달리야 되는 거 아이가?”
아... 힘든 밤이었다. 울다가 웃다가 의리로 뭉쳤다가 주무시다가 다시 또 되뇌었다가... 새벽이 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쏘맥양을 대하는 태도가 이리도 달랐다.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다.
사소한 술주정에도 각기 다른 개성과 표현으로 나뉘는데 하물며 개성과 취향, 사상이나 견해, 삶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방식은 얼마나 다를 것인가?
그러나 쏘맥양은 나빴다. 우리 아버지가 소-맥은 빨리 취한다고, 하려거든 맥-소를 하랬는데 맥쏘양으로 가야 했는데, 쏘맥양을 하니 상태가 좋지 않았다. 모두를 한 방에 기절시켜 버리는 흑마술을 부렸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일어난 5인방.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몰라”
“아~된장! 머리 아파!”****
“아... 속 쓰려, 해장해야 돼”
“뭘로 할까? 신라면?”
“아니, 행라면이랬잖아!!!”
푸하하... 푸하하...
쏘맥양과 함께 저문 크리스마스이브의 푸르른 기억. 내 청춘의 한 자락을 위해 건배! 친구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또 건배!
*) 쏘맥양 : 소주-맥주-양주 순. ‘쏘’는 ‘소’의 격한 발음.
**) 신라면이 그 해 출시되었는데 ‘행’ 자와 비슷해 ‘잘못 읽는 사람들이 있더라’하는 ~카더라 통신이 만든 유머의 한 자락.
***) 오욕(五慾) : 사람의 다섯 가지 욕심. 곧,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
칠정(七情) : 사람의 일곱 가지 감정. 희(喜)·노(怒)·애(哀)·낙(樂)·애(愛)·오(惡)·욕(欲).
****) 된장 : ‘젠장’의 귀여운 표현?, 식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