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운 Oct 22. 2020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 19

“야, 이 사람, 한 칼 있네.” 감탄할 때가 있다.
드문드문 봤는데 ‘이 사람 찐 능력자구나, 무림의 고수구나.’ 진심으로 그 사람을 인정할 때 그렇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의 한 칼’을 생각한다.
내가 벼리는 칼의 두께와 모양과 방향과 날의 정도를 가늠해 본다. 좋은 칼을 갈듯 펜을 갈고, 마음을 갈아야 하는데. 가슴속에 빛나는 칼 하나쯤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데...라고.

기척을 알아채고는 단박에 칼집을 빠져나와 휘~익 적을 향하는, 장군의 용감한 칼이어야 했다.
도처에서 날아오는 화살도 능히 쪼개어 버리는 호위무사의 장렬한 칼이어야 했다.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는 정의로운 칼이어야 했다.
내 나이 스물에 품었던 칼의 모습이었다.
1988년이었다.

 

살아남은 책은 어디에?


내 책장에서는 오래된 책을 찾기가 힘들다. 살아남은 책은 태백산맥과 칼 뿐이다.

  <칼>, 이 책은 ‘살아남은 책’이라 부르는 게 맞겠다. 아직도 책장에 꽂혀있는 게 신기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분서갱유 와중에 타다 남은 책도 아닌데 이런 표현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삼면 가득 책이 꽂혀 있는 서재를 꿈꾸었던 욕심은 대학시절 책을 사 모으는 수집의 형태로 정착되고 있었다. 80년대 말, 당시 새로이 한 권씩 발행되던 <태백산맥>이 나오는 날이면 따끈따끈한 책을 빨리 영접하고 싶어 서점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국제시장 고서점에서 오래된 시집을 발견하는 일은 구석기시대 유물 발굴의 사명과도 같은 비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20대 후반, 나는 ‘집 나온 순이’처럼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상경했고 책들은 그대로 부모님 집 내 방에 남겨졌었다. 들고 나는 것 없이 책장이 먼지만 뒤집어쓴 채 방치되자 몇 번의 짐 정리와 집수리, 이사로 말미암아 차례로 버려졌던 것이다.

앨범만 남기고 모두 버려진 책 중에 <태백산맥>과 <칼>만 남은 것은 집에 내려갈 때마다 몇 권씩 가방에 넣어 온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은 그야말로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이고 내 젊은 날의 초상과 같은 소중한 책인 것이다.

  

  새마을운동 당시 산업현장에서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의 슬로건처럼, 다시 꺼내 ‘먼지 털고, 읽고, 소개하자’ 밖에 도리가 없다.


이 책의 첫인상은?

 

  서울 유학생이었던 오빠는 어느 날, <칼> 하나 달랑 손에 들고 ‘돌아온 탕아’처럼 자연인의 모습으로 집에 나타났다. 여름방학이었다.

1학기 동안 어찌나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셨는지는 산발한 머리, 헐렁한 운동복, 덥수룩한 수염이 말해주고 있었다. 손에 쥔 <칼>의 저자, 이외수 님 찜 쪄먹게 닮아 있었다.


  당연 나의 시선은 오빠가 들고 온 책에 꽂혔고 표지에서 슬픔을 읽었다.

산과 달과 동굴은 텅 비어 있다. 힘 없이 털썩 주저앉은 한 사나이의 모습은 빈약해 보이는 칼 아래 초라했다. 사내는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눈빛은 공허했다.

명료한 '칼' 한 글자 제목은 거칠고도 날카롭게 쓰였으나 힘찬 기상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약한 자신의 모습을 애써 감추는 몸부림 같았다. 온몸이 저릿해 왔다. 나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이제껏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감이 여름 찜통더위에 절어 맥을 못 추고 있을 때였다.


  칼의 첫인상은, 현실세계에서 비현실을 갈망하는 허약한 인간의 실체였다.


책은 1988년 구입했다.


책 표지와 차례

  밤마다 울어대는 칼 한 자루가 집구석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문득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

대학교 2학년 때였고, 이미 책은 읽었지만 허약한 인간의 실체로 이해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했다. 칼의 의미가 달리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책을 구입하면서 함께 샀다. 책 가격은 3,200원이었다.


  이 책은 1982년 발표된 작품이지만 80년대 후반부터 다시 인기몰이 중이었다.  

글을 쓸 때는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처럼 독방에 자신을 가두고 외출마저 삼간다는 기이한 행적은 흥미로웠다. 책 속에 등장하는 유리 겔러와 도를 아십니까?처럼 '천재 같은 바보’, ‘광인 같은 기인’이란 별칭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남자에게는 낯선 긴 머리와 수염마저 작품에 대한 호불호의 비평과 함께 도마 위를 오르내렸다.


  다시 읽으며 생각한 것은 용감하고도 장렬하게, 정의롭게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각오였다.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마흔 살이 된 박정달 씨. 처자식을 둔 보통의 한 남자는 '지금껏 헛살아 왔다'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고2 때 힘센 학생들로부터 구타를 당했던 그는 단순히 폭력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칼 한 자루를 품속에 감추어 지니고 다녔다. 마침내 대학 2년에는 칼 수집광이 되었고 짜릿한 전율감에 안도하며 살아왔지만 불의에 대응조차 하지 못하는 약자에 찌질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달 씨는 '직업은 먹고사는 일 이상의 의미가 없다'며 회사를 때려치운다. 정년퇴직 때까지 직장생활을 해야 한다는 상식화 되어 있는 기존의 규범과 관례를 과감히 벗어던진 듯 보이지만 15년 근속한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때문이다. 커다란 잘못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도 받지 못한, 있으나 마나 한 소외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술 더 떠 '아빠는 신검이라는 것을 만들 작정이다'라고 아이들에게 말하며 대장장이가 되시겠단다.

신검을 만들기 위한 단서를 찾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며 대장간을 만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사를 찾고 명검을 추적하는데 몰두한다.

여러 경로를 통해 얻어진 비법을 들고 마침내 자신만의 신검을 완성하지만 칼에 ‘피’를 먹이는 중요한 과정을 생략하는 우를 범하면서 결국 피의 ‘희생양’이 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죽음으로 결국 신검은 탄생하지만 신검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이외수 작가의 신검의 의미는?


  칼이 있던 시대는 그래도 생명의 존엄성이 살아있던 시대라 말한다.

우리나라의 칼 역시 침략의 칼이 아니었고 보호의 칼이었다. 고결한 민족의 사상이었다.

동식물계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의미가 아닌, 절대로 원초적 악마성을 느낄 수 없는 것.

작가가 만들고자 하는 칼은 사람의 영혼과 영합되는 신검, 우주와의 일체로서의 신검이었다.


칼을 만들면서는 줄곧 마음을 맑게 가지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라는 것이라네.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성취해 낼 수 있는 인간 절대의 에너지니까. p168


  작가는 정신의 칼로 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맑게 하고 비우는 것. 비어 있는 마음 안에서 어떤 특수한 능력이 생성되는 것이고 그 마음이야말로 우주보다 크다고 말한다.


검의 시대에는 검을 사용하기 이전에, 마음의 수양부터 쌓아야 했었네. 그것은 검을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함이었지.
검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인간을 해하기 위함으로써가 아니라,
인간을 건지기 위함으로써 사용한다는 뜻이 아닌가. p170


  작가는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위한 품위 있는 장검 하나 만들고자 한 것이다. 물론 우리의 혼을 불어넣어 신비스러운 힘도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이다. 힘이 아닌 선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을 꿈꾸었다.


  작가에게 신검은 악을 막는 데 필요한 정신의 도구였다.


삽화로 읽는 나의 칼의 의미


  문득,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듭니다. 하얀 낮달마저 젖어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세상을 향한 소심한 날갯짓을 시작했습니다. 마음만은 결연했고 비장하였습니다.

서툰 비상에 추락하기도 했고 다른 곳을 향해 나아가기도 했지요. 세상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답니다.

나에게만은 관대하지 않았던 유난했던 채찍질이 상처가 되기도 했지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했고 나의 가슴에도 선(善)한 가치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닦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던 걸까요? 마음은 비워야 채워지는 것이던가요?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두의 가슴에는 저마다의 칼이 있듯, 나에게도 빛나는 칼이 있을 겁니다.

열심히 갈아볼 요량입니다.


다시 책장으로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오래 묵혀 두어 깊은 맛이 나는 담금주 같은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되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참 모르는 일이고 세월이 가면서 생각과 가치도 변하는 것이어서 다시 읽게 된 책은 앞서 읽은 두 번의 느낌과는 다르게 읽혔다.


  허약한 인간의 실체는 용감하고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겠다는 열정으로 바뀌었고, 선한 가치를 가지고 마음을 닦아야겠다는 자기 성찰로 이어졌다.

책은 다시 본연의 자세로 책장에 꽂혀 꺼내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좋은 책은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으로 기억 속에 자리하겠다.


 끝으로, 병중에 계신 작가님의 쾌유를 빌며 ‘책을 쓰고 나서’의 마지막 당부를 옮겨 남긴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열려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가슴이 언제나 비어 있기를 빕니다.
                          1982년 11월 20일 李外秀



기이하고 괴괴(怪怪) 한 것에 끌린다면 ★★★

무협소설과 도(道)에 관심이 있다면 ★★★★★

언중유쾌를 즐기고 싶다면 ★★

가을 가을 하고 싶다면  ★



<잃어버린 책을 찾아서 Project>는 계속됩니다. 다른 작가분과 함께 매거진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매일 각기 다른 작가의 1~2편 글이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함께 써 내려갈 것이고, 함께 책으로 묶을 것입니다.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 가자, 캐나다! 준비됐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