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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l Jan 07. 2020

환기미술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좇다

부암동


What 환기미술관

Where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40길 63

Detail 매일 10:00-18:00, 월요일 휴무, 주차 및 예약 가능

http://www.whankimuseum.org

Mood 부인 '향안'의 남편 '환기'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듬뿍 느껴지는 공간.  



새해의 소원과 맞닿은 환기미술관


만물은 순환한다. 시간도 그 궤도를 피해 갈 수 없다. 어느덧 세밑이 지나고, 다시금 새로운 해가 밝았다. 내게는 연말이 다가오면 의식을 치르듯 매해 반복하는 행위가 하나 있다. 바로 새해의 소원을 적는 것. 실현 가능성과 도전 정신을 적당히 버무려 쓰기에, 요원하지만 충분히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 소원 중 하나가 '한 달에 한번 전시 보기'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새해가 밝았다. 나는 2020년의 첫 미술관으로 '환기미술관'을 골랐다. 신문에서 본 김환기의 작품이 불현듯 떠올랐고,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검색해보니 미술관은 부암동 언덕의 외딴 골목길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마저 호기심을 자극하다니.


2019년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설립한 환기재단의 40주년이었다. 이를 기념해 환기미술관은 "미술관은 내용이다(The museum is the content)"라는 특별전을 열었다. 더불어 아트 판화전 <판화로 보는 김환기의 예술세계>와 <Whanki in New york -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삶과 예술>가 전시되고 있었다.     


김환기, 추상미술의 대가


김환기. 이중섭이나 박수근에 비해 대중들에게 덜 알려졌지만, 최근 그의 작품 <우주>가 약 130억 원에 이르는 경매가로 낙찰되어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리나라 미술 작품 가운데 경매가가 100억을 넘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한국 미술계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는 평과 함께 국내 미술품 판매가 상위 10위권 중 9위를 제외하고 모두 김환기의 작품이 차지하게 되었다.(9위는 이중섭의 <소>) 그가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결코 뜻밖이거나,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환기미술관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김환기는 한국에서 누리던 좋은 지위와 환경을 내려놓고, 현대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일평생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고 한다. 다음은 환기미술관 홈페이지에 실린 김환기의 연보를 참고했다.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고유의 예술세계를 정립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경부터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리드하였다. 절제된 조형언어를 바탕으로 이룩한 그의 정서 세계는 50년대에 이르러 산, 강, 달 등 자연을 주 소재로 더욱 밀도 높고 풍요로운 표현으로 한국적 정서를 아름답게 조형화하였다. 그의 예술은 56년부터 59년까지 약 3년간의 파리 시대와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수상한 해인 63년부터 작고한 74년에 이르는 뉴욕시대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김환기는 한국의 자연에서 느낀 서정성을 추상미술로 표현하다가, 파리에서 점이라도 하나 찍어보겠다는 일념으로 파리로 넘어가 개인전을 열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한국인 작가 최초로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한다. 이후 그는 뉴욕에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시키고, 향년 61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생을 마감한다.


판화로 보는 김환기의 예술세계


김환기의 작품에는 계절의 서사가 담겨있다. <봄의 소리>라는 이름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여름 호수>, <여름 태양>이라는 작품도 있다. 그의 서정성은 주로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바탕으로 발현되었다. <노란 달밤>, <파란 달밤>, <사슴>, <은하수> 등과 같은 그림의 제목은 그의 말간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했다. 더없이 감각적이고, 탐스럽게 빛났다. 김환기의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은 자연의 그 무엇과 닮아있었다. 전시실에는 그의 유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과슈 판화가 유독 눈에 띄었다. 비미술 전공자인 내게 '과슈'라는 단어는 매우 새롭게 들렸고,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과슈는 물과 고무를 섞어 만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이었다. 김환기는 종이에 과슈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과슈 판화는 수채화의 맑은 느낌보다는 윤기가 덜하고, 더욱 선명한 질감을 나타냈다.


김환기 일기를 통해 본 삶과 예술


달관에서 진행되고 있던 <Whanki in New York> 전은 김환기의 예술세계를 탐미하기에 더없이 완벽했다. 앞서 김환기의 작품을 마음으로 느꼈다면, 그의 일기장을 엿보며 머리로도 느껴볼 수 있었다. '서사 회화'라고 일컫는 김환기의 그림은 글과 하나가 될 때 더욱 빛을 발했다. 수려한 글솜씨는 그의 예술에 관한 번민과 깨달음을 나타내는 한편, 타지에서 한없이 외로웠던 그의 심정을 대변하기도 했다.


거리엔 적설.

눈이 쌓이면 스튜디오가 밝아진다.

간신히 점화 <겨울의 새벽별>을 완성. 완성의 쾌감.

예술은 절박한 상태에서 만들어진다. - 1965년 1월 11일


예술(창조)은 하나의 발견이다.

피카소가 이 생각에 도달했다는 것은 참 용한 일이다.

그렇다. 찾는 사람에게 발견이 있다.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찾고 있는 거다.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세계(자연)가 아닐까.

3점 했는데 두 점만 맘에 든다. 나는 이 두 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 1968년 2월 1일


작가가 늘 조심할 것은

상식적인 안목에 붙잡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눈으로,

처음 뜨는 눈으로 작품을 대할 것이다. - 1968년 7월 2일


김환기의 뉴욕 시절에서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그가 '매화, 달, 백자'와 같은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기보다는 '점, 선, 면' 등의 조형적 요소를 나타낸 보편성의 추상회화를 그렸다는 점이다. 그는 뉴욕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양의 문화를 초월해, 보다 보편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김환기는 한국에서 대학 교수와 학장을 역임하며 편안한 환경에서 '예술'할 수 있었지만, 계속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기점마다 활약을 했고, 현재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


김환기는 살아생전 자신을 '예술노동자'라고 표현했는데, 그만큼 매일 쉼 없이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기 때문이란다. 대가들의 공통점은 그 분야를 꾸준함으로 정진한다는 것이다. 일평생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쉬지 않으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 그에게 경의를 보낸다.



김향안의 환기미술관


환기미술관은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의 의지로 설립되었다. 실로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미술관의 설계 방식, 디자인, 전시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미술관에 입장하는 순간 공간감에 압도되는데, 두드러지게 높은 천장 때문이었다. 김향안이 '충분히 높은' 천장을 만든 이유는 김환기가 작품 대부분을 대형 캔버스에서 작업했기 때문이다. 삼청동의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국내의 그 어느 미술관도 공간상의 문제로 김환기의 작품을 들일 수 없다고 한다. 환기미술관만이 해낼 수 있는 부분이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작품으로 '비트라유(유리에 그림을 그린 색유리)'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도 미술관의 공간에서 이뤄낸다. 어딘가에 은은하게 숨 쉬고 있는 '비트라유'를 한번 찾아보시라. 김환기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프랑스 유리공방의 장인에게 의뢰하여 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특히 작가들이 비트라유가 참으로 좋다고 감탄을 한다. 나도 바라보고 섰으면 그 아름다운 선들이 울려오는 것을 느낀다. 그 걸려진 상태를 보고 싶어 했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보여주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 수화(김환기의 호)는 "내가 죽고 나서라도 눈 있는 사람이 와서 내 그림을 볼  때 인정할 거라고" 자신만만했다. 그 눈 있는 사람은 실로 늦게야 왔다. - 김향안, 1992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공간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으로 헛헛해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찾아온 사람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올해의 첫 전시로 김환기 작품을 보니, 시작이 좋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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