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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상인과 보험

상인과 보험
  
약간의 보험료를 부담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배가 안전하게 항구에 도착하기를 기원하며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나을까? 사인들은 수백 년 동안 이 질문을 되풀이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것은 러시안룰렛을 하는 것과 같았다. 사고의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한가운데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해적을 만나기도 했고,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예측 불가능한 날씨와 풍랑으로 폭풍우 속에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라구사의 상인 베네데토 코트룰리(Benedetto Cotrugli)는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오랜 기간 나폴리왕국에서 라구사공화국(오늘날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의 두브로브니크)의 외교관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가 기억하는 한 가장 오래된 무역서를 쓴 작가이기도 했다. 코트룰 리가 1458년에 쓴 <상술과 완벽한 상인에 대하여>는 그가 사망하고 백 년 이상 지난 1573년에 베네치아 초판이 발행되었다. “상인은 보험에 들어야 한다. 안전의 대가를 지급하고 위험을 덜면 아무도 몰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쓴다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어쨌든 보험은 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보험 가입에 필요한 돈을 지출하는 것과 자신의 전 재산을 실은 배가 물속에 가라앉아 파산하는 것은 비교할 바가 안 되기 때문이었다.
  
베네데토 코트룰 리가 15세기 중반에 보험을 언급한 책을 썼다는 사실은 당시 이미 보험 제도가 실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상인들에게 그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보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다음 세기에 보험 제도가 광범위하게 활용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의 책이 활자화되어 출판되기 전에도 익명의 여러 손을 거쳐 필사본으로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보험 세계의 중심지로 꼽혔던 베네치아에서는 보험 증권을 작성하고 그 내용을 세분하고 배당금을 산정하는 등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보험 제도가 확산되었다. 수도회까지 보험사업에 뛰어들 정도여서, 1587년 베네치아 주데카 섬의 수도회는 종교적인 열정을 재정 사업에 쏟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소박한 사업이었다. 그들은 선주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순서에 따라 화물과 선박, 그리고 선원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를 올려주는 대가로 보험 원금의 0.08퍼센트를 받았다. 하지만 베네치아 재판소는 수도회의 활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는데, 다음과 같은 상황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행여 상인에게 수도사가 고발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재판소에서 산출한 명세에 따르면, 수도원에서 벌인 그 창의적이고 흥미로운 재정 사업은 연간 3,000두카도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이 모든 것을 통해, 16세기 말 베네치아에서 한 해에 무려 3백6십만 두카토가 보험에 가입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평균 보험료가 6~8퍼센트 선에 있었으니, 보험료로 징수한 금액은 총 21만 5,000두카토에서 29만 두카토였을 것이다. 한편 1587년에는 베네치아공화국이 소금 무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보험료가 총 25만 두카토에 달했다. 막대한 금액으로 인해 곧 “보험은 가장 인기 있는 투자 분야가 되었다.”
  
  
해상 보험의 발전
  
잠깐 과거로 돌아가서 중세 시대를 살펴보자. 당시 이탈리아 무역상들은 지중해에, 그리고 더 멀리 대서양의 브리튼 제도나 아프리카 연안을 향해 20여 미터 길이의 작고 빈약한 배를 띄워 보내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자네 마음이 먼 바다에서 파도 따라 흔들리기 때문이야 / 그 바다에서 돛을 한껏 부풀린 자네의 배들은 / 마치 바다의 귀족처럼, 바다의 부호처럼 / 또는 바다를 가르는 의기양양한 행렬처럼 / 연신 머리를 숙여 경배하는 작은 배들을 / 경멸하듯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서 살레리오가 안토니오에게 하는 말이다.
  
험난한 바다에서 배짱과 용기만으로 해적과 폭풍우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창의적인 중세 이탈리아 상인들은 고대 사회에서 이미 성행했던 제도를 부활시켰다. 바로 상인에게 항해와 교역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는 해상 대출이었다. 이 제도는 상인의 금전적인 부담을 덜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이자가 아주 높았다. 돈을 빌려주는 입장에서도 위험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선박이 바다에서 침몰하면 돈을 빌려준 투자가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하지만 배가 무사히 항구에 도착하면 상인은 투자가들 (대부분 같은 일을 하는 상인들이었다)에게 원금과 더불어 높은 위험부담을 반영한 이자를 돌려줬다. 계약서에는 채무자가 마지막에 얼마를 상환하고 어떻게 지급해야 하는지 명시되었다.
  
언제나 계산이 빨랐던 제노바인들은 이 분야에서도 길을 닦은 주역이었다. 1191년과 그다음 해의 두 문서에서 ‘세쿠라레(securare)'라는 말이 최초로 등장한다. 오늘날의 ’보험‘에 해당하는 말임을 추측할 수 있다. 제노바 상인들의 사업에 대한 열정은 한층 발전된 보험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것은 일반적인 해상 대출이나 평범한 매매 계약서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해상위험을 보장하는 기능을 했다. 12세기의 계약서들 중에는 자연재해와 인재, 다시 말해 예기치 못한 폭풍우와 해적이나 사략선에 의해 입은 피해를 보장하는 내용의 것도 있었다. 해적이나 사략선은 둘 다 해상에서 약탈을 일삼는 무리지만, 해적과 달리 사략선 업자들은 국가로부터 적선을 공격하고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약탈은 합법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 여하튼 계약서의 조항들은 선박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삼았다. 
  
돈을 빌려준 자든 빌린 자든 모두가 그 계약에 만족했지만, 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신앙의 수호자들은 고리 대금업의 다양한 측면을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해상 대출도 이자를 받는 다른 대부업과 마찬가지로 타도 대당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1227년부터 1241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를 두 번이나 파문했던 교황)는 해상 대출의 이자를 문제 삼았다. 어떻게든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장하고 요구하는 대로 바꾸어야 했다.
  
이때부터 상인들은 대출이 아닌 위험 보장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 해운업과 관련된 보험이 탄생했다. 베네치아는 교황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교회법 수호자들이 여전히 보험계약서에서 고리대금을 문제 삼고 있던 1517년, 세속적인 사건에 종교재판관들이 개입하는 것을 막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어쨌든 교회법이 금지한 것은 이자를 받아 돈을 버는 것이었기에, 위험을 보장하며 대가를 받는 것에는 반대할 근거가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시원하게 해결되었다.
  
이즈음 중세 상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에서 선박에 보험을 드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보험계약의 조건을 모두 갖추지는 못했다. 보험 거래에서 손해 부담을 책임지는 보험업자, 즉 계약자와는 무관한 제3의 인물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등장 또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 사이, 이탈리아의 일부 상업 중심지에서 해상보험 계약이 체결되었다. 최초의 계약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오래된 보험 증권들은 제노바의 것이지만, 그렇다고 제노바에서 해상보험이 탄생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해상보험이 보급되었다는 사실만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보험 제도로 인해 지중해 무역이 확대되고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공증인들과 상인들이 라틴어 단어 ‘레시쿰(resicum)'을 ’위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문서관에 가면 보험에 관한 흥미로운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1347년 10월 23일, 조르조 레카벨로는 바르톨로메오 바소와 제노바에서 마요르카 섬으로 떠나는 선박 ‘산타클라라’에 대한 보험계약을 맺었다. 당시 그들은 그 계약서가 8세기 뒤에 보험업계의 신성한 유물이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카벨로의 계약서는 그보다 5년 전에 작성된 더 오래된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보험계약 문서로 여겨졌다.
  
제노바에서는 보험계약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393년에는 한 공증인이 보험계약 서류를 26일 동안 80건 이상 작성했을 정도였다. 그 당시는 제노바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도 해상보험이 호황을 이룬 시기였다. 1350년에 팔레르모에서 체결된 계약서 4건과 1384년에 마르코 디 프라토라는 상인이 피사에서 사보나로 가는 배에 실은 직물을 보험에 가입한 계약서도 전해진다. 
  
당시 베네치아는 선박 강대국으로 인정받은 만큼, 베네치아공화국의 무역 선단은 보험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했을 것이다. 해상보험은 리구리아 해에서 탄생하고 티레니아 해에서 발전한 뒤에 아드리아 해로 건너갔을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상사된 최초의 보험계약서의 날짜는 1395년 10월 22일로 되어있다. 이 계약서는 먼지 속에 묻혀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장소인 피렌체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잠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계약서가 피렌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이상할 것은 없다. 베네치아의 재판 기록이나 보험계약서에는 피렌체인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네치아에 거주했던 토스카나 상인들을 통해서 베네치아에 해상보험이 소개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초기 자본주의와 해상보험의 연관성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피렌체인들은 은행뿐 아니라 보험 영역에서도 근대 자본주의의 추진자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은행 분야에서는 그들이 분명 최고의 자리를 차지했지만, 보험에서 최고의 위치는 베네치아가 차지했다. 그 시기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많은 타국에 지점을 개설하고 활동했기에, 이 새로운 풍습은 전염병처럼 급속도로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프랑스, 그리고 독일까지 퍼져나갔다. 해상보험은 다른 종류의 보험(육상운송보험, 생명보험)과 더불어 성장했지만, 다른 보험들은 다소 그럴싸하게 포장된 부산물과 같았다. 유독 해상보험만 “수 세기 도안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효한 보험 제도로 남았다. 따라서 해상보험은 근대 보험의 모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당시의 생명보험은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베네치아 상인 베르나르도 캄비의 회계장부는 교황(니콜라우스 5세)과 베네치아 도제(프란체스코 포스카리), 아라곤의 왕(알폰소 5세)의 생명보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레반트에도 보험을 수출했다. 이 방면에 자본을 투자했던 자코모 바도에르의 회계장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계약된 보험’이라는 별도의 제목을 붙인 출납부가 있었다. 여기에는 1436년 10월 12일에서 1439년 12월 18일 사이에 체결된 26건 이상의 보험계약이 기재되어 있다. 오스만제국 사람들은 그들 입장에서 봤을 때 이교도인 베네치아인과의 보험계약을 꺼리지 않았다. 레판토해전(1571년 10월 7일)이 일어나기 얼마 전, 오스만제국의 해군 사령관 피알리 파샤는 “화물용 선박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 그는 안코나의 유대인들을 통해 베네치아에서 해상보험에 가입했다. 이후 그의 배가 정말로 침몰했을 때, 보험업자들에게서 돈을 받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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