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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건우 Mar 29. 2018

전문 보험업자의 등장

전문 보험업자의 등장
-재보험과 법률의 등장
  
  
배에 실은 화물은 돈 자루나 다름없었기에, 화물을 보장하는 데에는 막대한 위험 부담이 따랐다. 따라서 그 부담을 나눠지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그 제노바 공증인이 1393년 8월부터 9월까지 26일간 작성한 계약서 80건은 대부분 공동보험에 해당한다. 초기의 보험이 대차 계약임을 숨기며 진행됐듯이, 재보험(보험자가 피보험 물건에 대한 책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다른 보험자에게 인수시키는 보험) 계약도 처음에는 다른 형태를 빌어 은밀하게 체결되었다. 1370년의 제노바의 계약이 역사상 최초의 재보험으로 간주되며, 명시적인 재보험은 1409년에 피렌체에서 체결되었다.
  
이 분야에서도 제노바와 피렌체가 시장의 규율을 좌우하는 두 축이었다. 재보험은 얼마간 은밀하게 체결되었지만, 15세기부터 바르셀로나에서 공증인 빌라노바가 공증한 계약서들이 전해진다. 베네치아의 계약서는 1484년의 문서가 최초의 것으로, 비교적 후대의 것들이다. 하지만 계약 건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훨씬 이전부터 재보험이 보편화되고 광범위하게 실행되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보험에 관한 법률도 필요해졌다. 제노바는 1369년에 보험법을 만들었으며, 베네치아는 1421년에 외국 선박과 물품에 대한 보험 가입을 금지하는 법안(종종 무시되었다)을 제정했다.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1435년에 ‘바르셀로나 조례’라는 보험계약법이 제정되어 1484년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오늘날의 보험 제도와 유사할 정도로 보험이 발전했다. 가령 제노바, 나폴리, 바르셀로나의 계약서는 공증인이 작성했지만, 피렌체와 베네치아에는 이것을 처리하는 전문 직업인이 등장했다. 이러한 보험 중개인들은 먼저 피렌체에서 등장했고, 이후 활동 영역을 베네치아로 넓혀갔다. 그들은 중개인이자 보증인으로, 두 종의 회계장부를 모두 관리했으며 보험료 결제를 보증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그 자신이 보험업자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보험 증권을 직접 작성했는데, 그 방식은 갈수록 규격화되어 미리 인쇄된 서식의 빈칸을 채우면 될 정도였다. 대개 중개인이 보험료의 총액을 제안하고 보험 가입자는 그 지침에 따랐다.
  
이 모든 것이 보험의 활성화에 길을 터주었다. 중개인은 상인의 서명이 담긴 증서(보험 가입 의사를 밝히는 증서)를 받아서 보험업자를 찾아 나섰다. 증서는 하나만 작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몇 개의 증서를 같이 묶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보험업자들은 대개 돈 많은 귀족이었는데, 그들은 재산을 투자하여 불릴 방법을 늘 궁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개인들은 어렵지 않게 고객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들의 서명이 담긴 증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중개인들은 서명을 확인한 뒤에 즉시 보험업자에게 보험료를 지급했다. 보험업자들이 서명한 증서의 총액이 계약자가 청구한 엄청난 금액과 맞아떨어지면 증서는 봉투에 담겼다.” 그러곤 보험계약자에게 넘겨졌다.
  
자, 이제 상인과 은행가, 보험업자, 그리고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베네치아의 리알토 지역을 상상해보자. 갑자기 어떤 배가 난파됐다는 외침이 들려온다. 귀족들 가운데 누군가가 황급히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중개인의 사무실로 달려갈 것이다. 사고의 수습을 회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자신의 서명을 철회할 구실을 찾으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중개인은 그 배가 정말로 바다에서 침몰했는지, 아니면 다른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린 것인지 그 진위부터 밝히려 한다. 입증의 책임은 보험 중개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누구보다도 최신 정보에 밝아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중개인은 보장 금액이 적절한지 판단하고 보험료를 책정하고 고객들의 상황도 파악해야 했다. 보험에 가입하려는 상인이 누구인지, 화물을 운송하는 배의 상태는 어떠한지, 거기다 그 배를 지휘하는 선장의 평판은 어떠한 지도 살펴야 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눈과 귀를 열어두고 모든 사정을 꿰뚫고 있어야 했다.
  
코트룰리는 보험업자들이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자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다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집중하고 계속해서 관심을 둬야 한다. 해적과 악당들, 전쟁과 휴전, 보복 공격 등 해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재난을 탐지해야 한다. 그리고 항해 지도를 사무실에 비치해서 항구들과 해변들,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의 거리를 알아야 하고, 보험에 가입하는 상인과 후원자의 상황이 어떠한지 파악해야 한다.”
 

비토레 카르파초, 미친 남자의 치유, 1494, 15세기 리알토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다 보면 “리알토에서 들려오는 새 소식은 없는가?”라는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베네치아에서 경제 관련 정기간행물이 처음으로 출간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움브리아 지방 출신의 환전 중개인으로 알려진 판필로 브란카치는 “일반적인 통신문에 간단하게 첨부할 수 있는 크기의 종이에 환전과 물품의 가격에 관한 소식을 담은 정보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전해지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발행일은 1585년 3월 14일이지만, 첫 발행일은 그보다 이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해상운송보험의 탄생과 거의 동시에 육상운송보험이 등장했지만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적어도 처음 몇 세기 동안은 해상보험의 활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교역 물품을 대규모로 운반할 때는 대부분 바닷길을 이용했다. 험난한 바다에서 발생하는 해적질과 난파의 위험 때문에 상인들은 절박하게 보험업자를 찾았다. 반면, 육로를 이용할 때는 통과하는 여러 국가에서 군주가 거느린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만약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국가 차원에서 손해를 보상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육상운송보험의 보험료는 월등하게 낮았는데, 해상운송의 절반가량이었다. 육상운송보험의 최초의 계약은 1405년 피렌체의 보험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상운송과 육상운송이 결합한 형태였다.
  
이미 제노바에서 그랬듯이, 베네치아에서도 보험과 관련된 재판권을 무역 일반을 담당하던 무역 재판소에서 ‘쿠리아 디 페티지온(curia di prtizion)'이라 부린 전문 법정으로 이전했다. 보험 전문 법정의 판사들은 다양한 사건을 다루었는데, 이곳에서 내린 수많은 판결은 “베네치아가 보험 영역에서 이탈리아의 일인자로 등극했다"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 법정에서 다룬 15세기의 판결문 285개가 현재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탈리아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같은 시기에 열린, 보험에 관한 구체적인 재판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브루게에서 내려진 판결 7건을 꼽을 수 있으나, 이곳 역시 베네치아의 보험업자들이 관련된 지역이었다. 게다가 베네치아에는 보험업자들이 모이는 장소도 있었다. 환전상과 은행가의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시쿠르타 거리에는 보험업자의 사무실이 모여 있었다. 16세기 말까지도 베네치아의 대상들은 보험사업에 투자했다. 우리는 다음의 사례에서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베네치아 해군의 최고 지휘관 지롤라모 차네는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그는 1570년에 제노바인 잔 안드레아 도리아가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 자신의 선박들을 참가시키는 문제를 두고 주저하자 격분했다. 그는 “전쟁이 두렵다면 100스쿠도를 들여 그의 선박들을 보험에 가입시켜주겠다고 경멸적으로 제안했다.” 실제로 다음 해에 레판토해전을 앞두고 그 제노바 해군 제독은 “제노바에 있는 은행가에게 10월 말까지 보험에 가입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승리를 확신하고 전쟁에 참여하더라도 최대한 안전을 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므로.”
  
결국 해상보험 발전의 역사는 중개인이 신뢰할 만한지 확인하고, 상인들의 교활한 속임수를 경계해 걸려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중개인의 말을 신뢰하는 것은 계약의 필수 조건이었다. 보험계약은 구두로도 가능했는데, 문서로 작성된 경우와 똑같은 효력을 지녔다. 한편 구두계약이 무효로 판결 난 재판 기록이 전해지는데, 계약자가 계약을 체결할 당시 자신의 배가 난파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약이 문서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계약의 유효성을 문제 삼은 사람은 아무도(판사도, 계약 당사자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중개인들이 미리 서명을 했지만 이것 또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중개인 쪽에서 신임을 저버린 경우를 증언한 재판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반면 중개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수십 년간의 자료를 문서로 기록하여 보관했으며, 베네치아의 트레비잔 가문처럼 몇 대에 걸쳐서 기록하고 보관하기도 했다.
  
상인과 선주, 선장은 부당한 방법을 써서 돈을 벌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의 교활한 시도를 막기 위한 새로운 조항들이 보험 증권에 추가되곤 했다. 예를 들어, 선장들은 적재정량을 초과하여 화물을 실으려고 했다. 베네치아에서는 이를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그들은 항구로 들어오기 전에 과적재 화물을 내리는 편법을 썼다. 그런데 태풍을 만나거나 해적들의 공격을 받게 되면, 바다로 화물을 던져 뱃짐을 가볍게 해야 했다. 따라서 보험 증권에 ‘투하하지 않는 한’이라는 문구가 나타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위급 상황에서 빨리 달아나기 위해 과적 화물을 바다에 버렸다면 그 화물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토스카나의 보험은 다른 지역에 비해 보장 영역이 넓어서, 선장이 사기를 저지를 위험에 대해서도 보험에 들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지중해 국가들과 이탈리아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서도 피렌체식의 보험이 자리를 잡았다.
  
해적에게 피해를 입었다면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었을까? 이에 관해 알아보자. 해적의 배가 보이자마자 백기를 들어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방어는 해야 했다. 가령 1427년에 베네치아인 피에트로 발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항복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1만 8,000두카토라는 엄청난 금액의 보험을 들었기에, 선박이 항구로 온전하게 다시 들어오는 것보다 더 큰 액수의 보험금을 받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해적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언제 어떻게 항복했는지의 경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중요했다. 부상자들의 수나 적군의 수, 아군의 증언 등으로 방어할 수 없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험 증권이 보장하는 영역은 더욱더 넓어졌다. 1430년 베네치아의 한 선박이 칼라브리아의 로첼라 이오니카에 구류되었다. 선장이 남색 행위로 고발당했기 때문이었다. 보험업자는 그러한 위험 요소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이 경우는 분명 선장의 과실이라며 항변했다. 당시의 보험업자들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다. 1468년 베네치아 원로원이 주목했듯이, 그들은 이런저런 해석을 적용하고 핑계를 대면서 보험금 지급을 연기하거나 회피하려고 했다. 
  
  
  
  
참고 자료
  
‘돈의 발명’, 알레산드로 마르초 마뇨 지음, 책세상, 2015
  
  
길건우 자산관리사(

rlfrjsd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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