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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다룬 영화 10편(1)

영화, 그리고 세상 - 30. <한공주>, <부러진 화살> 外

어느 국가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강대국인 미국은 총기문제, 의료보험 문제, 인종차별 등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높은 국민성으로 칭찬받는 이웃국가 일본 역시 지나친 전체주의적 성향과 이로 인한 이중성이라는 어둠을 지니고 있다. 선진국가로 가느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건 저런 어둠을 숨기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공론으로 만들어 해결책을 제시하느냐 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뛰어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선진국이라 불리기 힘든 이유, 그건 시민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국은 5.18을 다룬 <택시운전사>를 만들 수 있지만 중국은 천안문 사태를 다룬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문화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비추고 이를 많은 이들에게 주목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룬 10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하죠? <한공주>


1973년 대구 고등법원 형사부 판사들은 17세 소년이 짝사랑하던 17세 소녀를 꾀어내 강간, 기소되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지어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양가 부모를 설득, 법정에서 약혼을 치르게 만들었다. 1998년, 약 20년 전에도 비슷한 판결이 있었다. 지나가던 여고생을 승용차에 태워 강간한 23세 남성이 1심에서는 실형을 받았으나 ‘양가 부모가 두 사람을 성혼시키기로 했으니 합의 바란다’는 탄원서로 2심에서는 집행유예로 석방을 받았다. 한국의 ‘성폭행’에 대한 인식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낮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은 차에 태워 경찰이 연행하는가 하면 데이트 폭력은 사랑싸움으로만 여겼다. 연인과 부부 사이의 강간? 사랑하는데 무슨 강간이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한공주>는 그 유명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만큼 한국의 성폭행에 대한 낮은 인식, 그리고 잘못된 합의문화를 큰 자극 없이 잘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 심지어 이 영화가 가진 잔혹함은 실제 사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영화는 17살의 어린 소녀, 한공주에게 초점을 둔다. 까칠하고 사교성 없는, 하지만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공주는 깊은 어둠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그 어둠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대체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궁금증은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공주는 ‘몰라야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공주의 재능에 반하고 그녀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하지만 이 하나의 영상이 공주가 그나마 유지하던 ‘삶’을 무너뜨린다. 밀양 성폭행 사건 당시 경찰들은 피해 여성들에게 ‘밀양 물을 다 흐려 놨다’며 폭언을 퍼부었다. 지역 유착 때문인지 가해자들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한 것은 물론 경찰들은 이를 방치했다. 아니, 오히려 피해자들을 압박하고 여경에게 수사 받고 싶다는 부탁조차 거절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른’이라는 이름을 지닌 부끄러운 작자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자신들’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말이다. 


난 이 영화의 결말부에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교실 밖의 학부모들을 보고 끔찍이 바랐다. 그런데 그 역겨운 일이 일어났다. 실제 사건에서처럼 가해자의 부모들은 공주를 찾아와 합의를 종용한다. 공주는 그 아픈 과거 때문에 도망쳤으나 다시 이들에게 붙잡힌 것이다. 왜 잘못한 사람이 도망쳐야 되는 걸까? 왜 가해자가 큰 소리 내며 ‘나쁜 놈이 더 잘 살게’ 만드는 걸까? 난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페미니즘이 맨 처음 해야 될 일은 남성들의 강압적인 폭력, 성적 결정권을 막는 ‘성범죄’에 피해를 입은 ‘같은 여성’에 대한 온정, 그리고 보호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 피해 여성들이 합의를 볼 수밖에 없는 건 사회적인 시선과 가해자들의 폭력, 그리고 지원적인 문제다. 


왜 피해자들이 숨고 도망쳐야 하는 세상이 지속되어야 하나. 숨고 뉘우치며 고통을 겪어야 되는 건 가해자들이다. 한국은 사법구조부터 여성에게 불리한 판결과 대처를 반복해 왔고 이는 끔찍한 성폭행 사건의 반복을 낳았다. 최근에는 미성년임을 악용한 범죄들이 판을 치고 있다. 성범죄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미성년임을 이용, 성범죄를 자행한다. 여성의 인권신장은 가장 낮은 곳의 존재에게 벌리는 온정의 손길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피해자’들이 숨고 고통을 겪는 또 다른 ‘공주’가 나와서는 안 된다.

                                                                                                          


난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력을 안 해, 노력을!’ 요즘 꼰대들에게 들으면 참 짜증나는 말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작가님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데 어찌해야 되나요?’ 라고 물어보는 청춘들에게 이리 답한다고 한다. ‘글쎄요, 그건 좀 힘들 거 같아요.’ 자기 재능이 특별하다 여기는 건가? 좀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답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작가를 꿈꾸던 시대에는 대학을 나오면 쉽게 취업이 가능했다. 그래서 작가를 준비하면서 ‘이거 안 되면 취업이나 하지, 뭐.’라는 생각에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에는 작가지망생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신춘문예의 경쟁률은 1300대1이라고 한다. 또 생업을 걱정하며 아르바이트 등 노동에 매진하는 젊은이들이 많기에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좋은 글은 시간적, 심적 여유에서 온다. 이런 여유가 없는 젊은이들에게서 ‘좋은 글’이 나오기란 참으로 힘들다.


요즘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들다. 또 온갖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에 합당한 직장을 얻기란 너무나 힘들다. 중소기업은 복지부터 개판이며 노동법을 어기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또 대기업은 비정규직과 인턴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소수의 정규직조차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아니, 난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세상은 날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난 왜 이렇게 힘든 거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못 사는’ 앨리스의 모습을 통해 웃픈 현실을 조명한다. 

                                                                                                         


자격증만 14개. 수남은 학창시절부터 ‘천재’였다. 단 하나, 컴퓨터를 빼고. 그녀의 집안은 가난했고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접할 환경이 되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컴퓨터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직장에는 다 컴퓨터가 있는 걸? 결국 그녀는 지방 공장에 장부 정리 일을 맡는다.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나 남편은 귀에 문제가 있다. 시끄러운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청력이 나빠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녀를 속여먹는다. 이상한 보청기를 남편에게 끼게 하고 남편은 보청기의 오작동으로 작업 중 실수, 손가락이 잘린다. 수남은 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나머지 접합 수술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때부터 가난의 늪에 빠진 두 사람.


수남은 하루 종일 일한다. 청소도 하고, 전단지도 돌린다. 하는 일마다 끝내주게 잘한다. 그런데 그게 다다. 가장 중요한 컴퓨터로 대표되는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슬픈 점은 수남이 살인을 저지르는 대상들이다. 그녀는 아파트 재개발과 관련된 사건에 휘말리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녀가 죽이는 대상들 역시 그녀와 같은 하층민들이라는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대한민국에 떨어지면 이렇게 x 같이 살지 않을까?’라는 뼈아픈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열심히 살아도 그 보답을 받을 수 없는 사회의 구조라면 누가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쓸까?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YOLO 열풍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감히 우리의 권위에 도전해? <부러진 화살>


생각해 보자. 국회, 아무리 국회의원들이 개판이고 선거 후 입을 싹 씻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애를 쓴다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을 뽑는 건 국민의 손이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이 다시 뽑아주지 않으면 4년 후 임기가 만료되며 모든 특권은 사라진다. 그래서 좋거나 싫거나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된다. 행정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5년 동안 수장이 되는 곳이다. 그 어떤 곳보다 국민의 눈치를 많이 보며 나라에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욕을 먹기에 정신 바짝 차려야 되는 게 행정부다. 그런데 법원, 여긴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삼권 중 법원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처벌’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란 인간들은 물론 검사들까지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 이 자리에 오른 사람들인데 너희 같은 질 떨어지는 인간들이랑 어울려야 해? 딱 이런 고자세다.


최근 5년간(2017년 5월 기준) 전국 판사 상대 진정.청원 현황을 보면 74건이 있었고 이 중 2017년에만 10건이 있었다. 또 한때 판사들의 막말이 뉴스를 장식했는데 증인에게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둥,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냐는 둥 고압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개소리’를 하며 욕을 먹었다. 여기에 최근 국정농단 사태에서 구속수사가 필요한 인물들에 대해 몇몇 판사들이 지속적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적폐판사’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또 지나친 재벌 감싸기와 제 식구 감싸기는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추태이기도 하다.

                                                                                                      


<부러진 화살>은 ‘석궁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대학교수 김경호는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부당하게 해고당한다. 이에 대한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하고 항소는 이유 없이 기각된다. 한 마디로 ‘판사 꼴리는 데로’ 식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일반인도 아니고 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김 교수이니 이런 판결에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아니, 내가 다 아는데 어디서 수작이야?’ 그는 분노에 차 판사에게 ‘똑바로 해!’라고 협박할 생각으로 석궁을 들고 그의 집을 향한다. 그런데 판사가 배에 석궁을 맞았다고 그를 고소한 것. ‘어디서 한낱 대학교수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중 하나인 판사에게 대들어?’ 김 교수의 재판은 사법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장 사과해도 부족해 보이는데 김교수, 오히려 당당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쏜 적 없습니다!’ 알고 보니 이 사건, 증거란 증거는 다 조작된 것이다. 피 묻은 와이셔츠? 대충 조작하려다 보니 다 들통 났다. 그런데 재판은? 김교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증거도 받지 않고, 발언도 못하게 하고, 판사는 자기 마음대로 재판을 진행하고, 뭐 이딴 게 다 있어? 웃기게도 할 말은 사법부가 더 많아 보인다.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감히 어디서 우리 판사를 건드려 놓고 살아 나가길 바래? 콩밥이나 쳐 먹어라!’ 권위의 가장 큰 힘은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나온다. 특히 판사들의 경우 전관예우라고 판사직을 끝내고도 변호사직을 할 수 있기에 정계 혹은 정치권에 연줄을 대는 경우가 있다.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다. 사법부의 물은 고여도 너무 고였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 <오늘>


‘이제 그만 하죠?’ 가끔 다툼이 생길 때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놈이 저런 말을 할 때면 헛웃음이 나온다. 간혹 가다 이런 놈도 있다. ‘손뼉도 서로 맞아야 소리가 나는 건데 나도 그쪽도 다 잘못했으니까 우리가 싸운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끝냅시다.’ 끝내는 건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다. 잘못한 놈이 죗값을 치러야만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헌데 우리나라는 이런 ‘악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드라마 중에서 제대로 된 ‘복수’를 하는 드라마가 있던가? 온갖 악행을 반복하는 악역은 뒤에 가서 ‘나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라고 호소하고 이에 마음이 움직인 주인공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 상대를 용서한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그 흐름에 빠져 자연스럽게 여태까지 먹었던 고구마들을 소화시킨다.


우리 사회에는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모든 이들을 용서한 예수의 사랑을 본받고자, 예수가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거처럼 인간 역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거만하고 교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이기에 할 수 있었던 그 ‘위대한 사랑’을 어찌 인간에게 강요한단 말인가. <오늘>은 자신의 생일 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혜 역시 <밀양>의 신애처럼 종교에 의해 용서를 알게 되고 오토바이 뺑소니를 친 가해자 학생을 선처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소년원에서 출소 후 다시 사고를 쳤다는 소식에 다혜는 고통에 빠진다. 용서라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찍고 있었던 그녀에게 ‘용서’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과연 ‘용서’라는 것이 모든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아름다운 선택일까? 어쩌면 용서란 죗값을 치루기 싫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단어가 아닐까? 다혜는 말한다. 만약 그때 주변에서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용서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신애가 용서를 결심하고 자신의 아들을 납치, 살해한 도섭을 찾아갔을 때,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을 그 좌절과 고통을 다혜는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때 그 애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남자친구 상우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에도 이런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피해를 입은 광주 시민에게 이제 그만 지역감정에서 벗어나라 말하는 사람들, 청춘은 물론 인생을 찢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외교적인 관계를 위해 이제 그만 하라는 사람들, 나라를 좀 먹은 건 물론 독재를 꿈꾸었던 국정농단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세워진 정부에게 이건 보복일 뿐이라며 그만 하라는 사람들. 왜 잘못을 한 사람들이 ‘용서하라’ 강요하는 걸까? 왜 고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안다 지껄이면서 ‘용서하라’ 압박하는 걸까? 용서는 ‘남’이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는 것이다.

                                                                                                        


어리면 죄도 어린 건가요? <돈 크라이 마미>


‘소년법’은 어느 나라나 뜨거운 감자다. 성인이라면 살인, 강간, 약물 등에 대해 높은 형량을 받으나 소년은 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낮은 형량 속은 소년원에 수감된다. 멕시코의 경우 이런 법을 악용, 소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다. 특히 2013년, 일명 ‘엘 폰치스’라고 불리는 미성년자 살인청부업자 루고가 붙잡혔는데 그는 11살 때 납치돼 살인청부업자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주어진 법정 최고형은 3년, 미성년자가 ‘살인’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 형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최근 미성년자들의 연이은 사건 사고로 시끄럽다. 차마 글에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이들이 소년법에 보호를 받아 낮은 형량이 내려질 거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지금 소년법 폐지 혹은 수정에 대한 청원, 그리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소년법의 원래 목적은 ‘건전한 소년을 기르자’에 기초한다. 형벌의 경우 그 기준을 처벌, 차단, 교화 중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소년법의 경우 아직 어린 소년들이기에 제대로 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와 섞일 수 있다 판단하는 교화의 과정에 기초를 둔다. 소년원의 경우 강한 처벌과 차단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접하고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기관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스마트폰을 통해 학생들은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도 자신들이 어떤 형벌을 받을 지에 대해 알기에 교묘하게 나이를 이용,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인신매매는 물론 납치, 살인, 강간 등 온갖 범죄를 자행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면서 소년법의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돈 크라이 마미>는 청소년 성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작품의 경우 피해 여성이 당한 심리적인 고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잔악한 청소년들의 행태를 보여주며 ‘소년법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혼 후 새 삶을 준비하던 싱글맘 유림은 딸 은아가 학교 남학생들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자 충격을 받는다. 이 사실만 해도 충격인데 가해 학생들이 미성년자라 처벌이 힘들다는 말에 그녀는 주저앉는다. 범죄자를 구속시키는 건 그 범죄자가 피해자를 협박 및 회유, 2차 폭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구속당하지 않은 미성년자들은 은아를 협박, 다시 불러내 또 강간하고 비디오를 찍는다. 결국 이 끝나지 않을 굴레에 빠진 은아는 자살을 택한다. 


법은 자력구제를 원칙상 허용하지 않고 정당방위의 범위를 굉장히 좁게 정한 만큼 국민들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지키지 않고 피해자를 방치하고 범죄 사실을 방조한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너희가 알아서 너희를 지켜라’라고 말하는 꼴이다. 유림은 딸을 자살로 내몬 녀석들을 처벌하기 위해 애를 쓰나 법적으로 그녀가 할 건 아무것도 없다. 담당형사 역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는 어떻게든 유림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날뛰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이라도 가했다간 형사인 자기도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발전하는 인류를 향한 숙제라고 본다. 세상은 달라지고 속도는 빨라지는데 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소년들은 자신이 받을 형벌에 대해 잘 알고 이를 악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이런 소년들을 이용, 범죄를 저지르는 어른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미성년자 혹은 청소년 범죄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구속이 이뤄지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2차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 방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화’를 이야기하려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데 교화를 외쳐봐야 무슨 공감을 얻겠는가. 변화는 두려움에서 온다. 아이들에게 잔혹한 동화를 들려주는 건 그 잔혹함에 공포를 느껴 잘못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형벌로 교화라는 변화를 유도한다? 그건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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