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신도 누군가의 ‘슈가맨’이 될 수 있다

영화, 그리고 세상 - 29. <서칭 포 슈가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다들 한 번쯤 들어봤을 문구일 것이다. 위의 시는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일부다. 워낙 유명한 문구다 보니 이 시도 러시아에서 굉장히 유명한 시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군다나 대문호 푸시킨의 시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시는 푸시킨의 대표작도 아닐뿐더러 자주 어울렸던 이웃 마을 지주의 딸의 앨범에 적어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란다.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에서는 주한 러시아 대사가 손꼽히는 푸시킨의 작품도 아닌 이 시가 한국에서 애송되는 것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면 이 시는 왜 우리나라에 이리 널리 퍼진 걸까? 유시민 작가는 일제강점기 당시 누군가 일본어로 번역한 이 시가 일제 치하의 힘든 삶을 살았던 우리 민중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이 푸시킨의 시를 통해 큰 위안과 격려를 얻은 것이다.



만약 푸시킨이 알았다면 참 신기하게 여겼을 것이다. 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자신의 대표작도 아닌 작품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말이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작품이, 제품이, 사람이 다른 나라에서 인기를 얻곤 한다. 예를 들어 욘사마 배용준의 경우 일본에서 <겨울연가>를 통해 엄청난 스타로 떠올랐다. 그 이유는 답답한 일본멜로 작품들의 주인공과 다르게 부드러운 외모와 상반되는 박력 넘치는 사랑 표현으로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슈가맨’ 로드리게즈는 자신이 아프리카 대륙의 끝,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대체 로드리게즈는 누구며 대체 어쩌다가 아프리카 대륙 끝의 나라에서 인기를 얻게 된 것일까?


한 장의 음반, 남아공을 들썩이게 만들다


JTBC 예능 <슈가맨>은 히트곡이 있지만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고 해체한 ‘추억의 가수’를 찾아나서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 기획사 시스템이 튼튼하지 못했고 인기를 끌었다 하더라도 소속사 문제로 활동을 접는 가수들이 허다했다. <슈가맨>이 특별했던 이유는 겨우 한 곡이지만 그 한 곡을 기억하고 애창곡으로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이였다. 이 ‘슈가맨’의 원조가 바로 로드리게즈다. 영화는 과거를 추억하며 그를 찾으려는 두 팬으로부터 시작된다. 70년대, 한 미국 여성이 남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남아공으로 오고 그때 앨범 한 장을 가지고 온다. 이 노래는 카세트로 복제되어 남아공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는데 처음 히트한 곡은 <I Wonder>였고, 앨범은 1970년 미국에서 발표한 <Cold Fact>라는 앨범이었다.


왜 로드리게즈의 음악은 남아공에서 히트를 친 것일까? 이는 당시 남아공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 원래는 분리·격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로 남아프리카에서는 약 16%의 백인이 84%의 백인이 아닌 인종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차별해 왔다.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이 인종차별은 17세기 중엽 백인의 이주와 더불어 점차 제도로 확립되었는데, 1948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나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의 단독정부 수립 후 더욱 확충·강화되어 아파르트헤이트로 불리게 되었다. 인종격리정책에 의한 인종별 분리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다인종사회적 현장 속에서 반투 정청법·유권자분리대표법 등에 의하여 유색 인종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산업조정법(1956)·패스포드법(1952)·원주민법 수정법(1952)·이인종 혼인금지법(1949)·집단지역법(1950) 등에 의해 경제적·사회적으로 백인의 특권 유지·강화했다.


70년대 남아공은 이런 인종차별 정책으로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교류란 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즉, 외국의 노래가 남아공에 들어오지도, 남아공의 노래가 외국의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남아공 국민들은 한 가수의 노래에서 자신들의 삶을 찾게 된다. 로드리게즈의 노래 가사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앨범의 <Sugar Man> 역시 대히트를 치면서 로드리게즈의 앨범은 남아공 레코드사와 정식 계약, 출시된다. 하지만 이런 로드리게즈 열풍을 좋게 바라볼 남아공 정부가 아니다. 여느 악한 정부가 그래왔듯 당시의 남아공 정부 역시 로드리게즈의 노래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슈가맨’은 왜 베일에 가려졌던 걸까?


로드리게즈의 노래는 남아공 사람들이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 건 물론 그들의 마음에 용기와 위안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당시 남아공 사람들은 앨범에 나와 있는 사진 외에는 로드리게즈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이후 잘못된 정보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렇게 ‘슈가맨’은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슈가맨의 열성적인 두 팬은 끈질기게 슈가맨을 추적했고 미국에서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슈가맨의 앨범을 제작한 프로듀서 2명을 만난 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드리게즈는 멕시코 이민계 집안의 자손이다. 그는 낮에는 공사판에서 일하고 밤에는 선술집에서 연주를 하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레코드사가 로드리게즈와 계약을 했고 2장의 앨범을 발매하였다. Sussex레코드의 사장은 로드리게즈의 잠재력을 높게 보았다. 그의 가사는 소울로 가득했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사장은 로드리게즈를 자신이 만난 아티스트 중 다섯 손가락에 손꼽을 만한 인물이라고 말하며 그가 밥 딜런처럼 될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미국에서 겨우 6장의 앨범이 팔린 것이다. 두 번째 앨범은 스타 프로듀서를 기용, 제작하였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결국 로드리게즈는 다시 공사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로드리게즈의 노래가 호주에서 인기를 얻자 레코드사의 추천으로 호주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이때 이 공연에 대한 소문으로 그가 공연 중 분신을 했다느니,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참담한 실패를 기록한 그지만 호주와 남아공에서는 여전한 인기를 자랑했다. 특히 남아공이 20년 동안 차별과 싸워 93년, 인종평등의 원칙에 기초한 헌법을 채택할 때까지 그는 남아공의 ‘국민가수’였다. 이 얼굴도 모르는 국민가수에 대한 힌트는 그의 가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삶을 다룬 그 가사. 그래서 두 팬은 디트로이트를 향했고 ‘슈가맨’을 찾을 수 있었다.


슈가맨이 살아있다는 걸 발견하고 놀란 이 두 팬보다 놀란 건 ‘슈가맨’ 로드리게즈다. ‘뭐? 내가 남아공에서 국민가수라고?’ 이런 세상에, 정말 놀랄 일이다. 그는 가난한 멕시코 이민계의 자손이었고 공사판에서 막노동, 선술집에서 연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2번의 앨범 발매는 대실패로 돌아갔으며 시장선거에서 또한 떨어졌다. 실패만 가득한 줄 알았던 그의 인생이 미국의 반대편,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꽃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1998년, 죽은 줄만 알았던 슈가맨은 무대에 선다. 그의 음악을 그토록 사랑했던 남아공 팬들 앞에서 콘서트를 열게 된 것이다. 남아공에서의 첫 라이브, 한 동안 무대에서 노래를 한 적 없었던 로드리게즈는 엄청난 관객들의 함성 속에 <I Wonder>를 첫 곡으로 열정과 담담함이 섞인 감동의 무대를 선보인다. 이 순간, 팬도 가수도 함께 느꼈을 것이다. 정말 ‘기적’ 같은 순간이라고 말이다. 인생이란 건 때론 예상치 못한 순간에 행복을 안겨준다. 50대의 로드리게즈는 늦게나마 ‘스타’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의 남아공 투어는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그는 스웨덴 투어를 떠났으며 이 영화의 개봉효과 덕분인지 앨범차트에 오르는 기염을 토해냈다. 스웨덴 감독 말릭 벤젤룰이 4년의 시간을 소요해 만든 이 영화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고 2009년, 로드리게즈의 앨범 2장은 미국에서 재발매가 되었다. CNN 뉴스에 인터뷰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 등 그는 70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가끔 살다 보면 정말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열심히 살아봐야 뭐하나, 사는 게 허무하다 등등 부정적인 생각들에 빠지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기적 같은 순간이 올 때, 나에게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올 때 그 행복과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산타클로스가 머리맡에 어떤 선물을 두고 갈까 하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던 그때처럼 기적을 품고 살아가는 건 어떨까. 언젠가 행운이 다가오고 그 행운을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면 하루하루 고된 삶을 이겨낼 힘이 조금은 더 생기지 않을까. 당신도 분명 누군가에게는 ‘슈가맨’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슬픔도 배워야 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