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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배워야 하는 법

영화, 그리고 세상 - 28. <라자르 선생님>, <몬스터 콜> 外

청소년 때 공부보다 중요하게 가르쳐야 되는 것이 있다. 바로 감정이다. 어린 시절 올바른 감정표현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어둡다. 특히 슬픔이라는 감정이 더 그러하다. 배우 김주혁의 죽음 당시 인터넷에는 그를 추모하는 바람이 불었다. 40대의 젊은 배우가 사고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으니 그 죽음에서 슬픔을 바라본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들은 슬픔을 강요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송중기-송혜교 커플에게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결혼을 하냐며 취소하라 한 것은 물론 <정글의 법칙> 촬영을 떠난 정준영에게 연락이 닿질 않자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촬영장 전화국이 화재로 연락이 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나친 슬픔의 강요. 난 이런 현상이 슬픔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아쉬운 일련의 사건들이라 생각한다.



슬픔을 삼키라 가르치는 어른들 <라자르 선생님>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슬픔을 삼키는 법을 배운다. 세월호 사건 당시 전 국민적인 애도의 물결이 불자 몇몇 정치인들은 이리 말했다. ‘바다에서 일어난 교통사고일 뿐인데 뭘 그리 슬퍼하느냐’고.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세월호에 대한 애도는 손가락질 받아 왔다. 슬퍼서 슬프다고 말하는 걸 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친구들을 잃은 아이들도 있었다. 잔혹하게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슬픔을 삼키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 당시 슬픔을 삼켰기에 세월호에 대한 진실은 밝혀질 수 없었다. 슬픔을 삼키는 건 진실을 삼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선생 라자르는 모국의 문제로 아내와 두 아이를 잃고 캐나다로 망명을 온다. 이곳에서 한 반의 임시 담임을 맡게 된 라자르. 그는 아이들에게 책상 배치를 옛날 방식으로 바꿔버리고 읽기도 어려운 발자크 소설을 받아쓰기로 내거나 지금은 쓰지도 않는 문법용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등 반발을 사는 행동을 반복한다. 하지만 라자르는 누구보다 따뜻하게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마음에 담아둔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밝고 해맑아야 할 아이들의 얼굴에 어둠이 스며있는 걸까? 그는 자신이 겪었던 아픔처럼 아이들도 고통을 겪길 바라지 않는다. 라자르는 그 문제가 전 담임 선생이었던 마틴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마틴 선생은 자살을 했고 그 자살에는 시몽이라는 아이가 연관되어 있다고 의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의심 속에서 학교 선생들을 비롯한 어른들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아이들도 입을 다문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는 시몽이 자살을 만든 원인이라는 의심이 생기고 시몽은 이 의심을 견디다 못해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해간다. 슬픔을 참으라 강요하는 어른들의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이 침묵이 의심과 적대감만이 감도는 교실의 분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라자르 선생님은 결심한다. 그 ‘슬픔’을 끄집어내기로 말이다.


한국이 일본처럼 왕따(이지메 문화)가 성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법보다 숨기는 법을 먼저 가르치기 때문이다. 감정을 숨기는 사람은 뒤가 구리다. 서로를 드러내지 않으니 의심하고 미워하며 시기한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친구가 될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집단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기는 친구를 쉽게 왕따 시킬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시몽은 알게 모르게 왕따처럼 지내왔다. 그래서 시몽은 친구를 때리는 사고를 친다. 마음의 화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라자르는 기회를 준다. 시몽이 학생들 앞에서 말할 수 있게, 그 모든 슬픔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그래, 마틴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이 문제로 라자르 선생은 학교에서 해고당한다. 꺼내서는 안 될 ‘죽음’의 문제, 좋은 것만 보고 들어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자살’이라는 큰 문제를 꺼낸 그는 학부모들의 압박에 학교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학생들을 버리지 않는다. 학생들이 슬픔을 품고 살게 된 건 ‘마지막 인사’가 없어서다. 마틴 선생이 마지막 없이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학생들은 슬픔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실을 향한다.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서. 또 다시 슬픔을 삼키게 될 어린 학생들에게 자신이 떠난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말이다. 



슬픔은 가르쳐야 되는 것 <몬스터 콜>


어린아이들에게 슬픔은 지독하지만 견뎌내야만 하는 크나큰 감정이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 반이라면 동시에 슬프고 괴로운 일도 반이기 때문이다.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다. 행복이 있으면 슬픔도 있기 마련이다. 헌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 슬픔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여기고 숨기려고 든다. <몬스터 콜>은 슬픔은 숨기고 감추는 것이 아닌 ‘제대로 가르쳐야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품이다. 


코너는 아픈 어머니, 집을 나가 새 살림을 차린 아버지, 전혀 맞지 않는 할머니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학교에서 왕따는 물론 폭력을 당하고 선생들은 그의 가정사는 신경 쓰지만 이런 폭력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고통이다. 특히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느 날, 코너에게는 나무로 된 괴물이 찾아온다. 괴물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해 줄 테니 이 이야기가 다 끝나면 네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다. 난 할 말이 없다는 코너의 말을 무시하고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는 괴물. 그런데 이 괴물의 이야기 뭔가 이상하다. 왕자가 자신의 약혼녀를 죽인 마녀 새엄마를 몰아내는 이야기인 줄 알았더니 왕자가 새엄마를 몰아내기 위해 자기 약혼녀를 죽인 잔혹 동화다. 



뭐 이런 이야기가 다 있어? 하고 불만을 토해내는 코너. 괴물은 왜 세 번에 걸쳐 잔혹동화를 이야기해주는 걸까? 그리고 코너에게 해달라는 이야기는 대체 무엇일까? 괴물이 한 이 모든 이야기는 코너의 꿈과 관련되어 있다. 아이는 처음 맞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차피 엄마는 죽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죽음을 앞두고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보는 게 너무 힘들다. 차라리 저럴 바에야 죽어버렸으면. 엄마를 바라보는 내가 너무 힘든데,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런 생각은 무의식의 상징인 꿈으로 나타난다. 코너가 무너지는 무덤가에서 어머니의 손을 잡으나 이내 놓쳐버리는 꿈. 이는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래서 코너는 맞았던 것이다. 그 고통이 자신이 품은 ‘나쁜 생각’ 때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조용히 폭력을 인내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서툰 감정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많은 죽음을 경험했더라도 ‘처음’처럼 다가온다. 소년은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균형을 잃었고 무너졌다. 나무 괴물은 소년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가 들려준 잔혹 동화, 그 속에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다 말한다. 하지만 그 슬픔이라는 게 나쁜 게 아니다. 슬픔은 흔하다. 그 흔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 무게에 무너져 삶을 잃어버리고 망가진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견디는 것이 아닌 온전한 감정으로 받아들인 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된다. 그래, 슬픔을 받아들이는 법은 꼭 배워야만 하는 중요한 감정 교육이다.



아이들에게서 슬픔을 배우다 <천사의 아이들>


아쉽게도 이런 슬픔을 받아들이는 법은 어른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다. 때로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슬픔에 더 휘청거릴 때가 있다. 짐 쉐리단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천사의 아이들>은 아일랜드에서 막내 아이를 잃은 가족들이 그 슬픔을 잊기 위해 뉴욕으로 와 벌어지는 일을 다룬 영화다. 건조한 원제인 <In America>와 달리 <천사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정말 ‘천사’처럼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을 달래주는 두 딸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첫째 딸 크리스티는 죽은 동생 프랭키가 3가지 소원을 이뤄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소원을 입국심사에서 쓴다. 미국에 온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다. 빈민들이 사는 아파트 옥상에 집을 잡고 남편은 연극배우, 아내는 웨이트리스가 되어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런 고된 일상과 달리 두 딸, 크리스티와 아리엘은 아주 밝다. 이 아이들은 슬픔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뉴욕에 와서 들뜬 걸까? 부모와 너무 대조되는 이 아이들의 모습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아이들은 이미 동생 프랭키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보냈다. 오히려 이별의 고통에 휘청거리는 건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다.



이 작품에는 눈물을 쏙 빼는 장면이 세 개 있다. 첫 번째는 에이즈를 앓는 이웃 남자 마테오와 아버지 조니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이다. 조니는 마테오가 자신의 아내를 탐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딸들에게 잘 대해주는 마테오에게 화를 낸다. ‘내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라는 말에 마테오는 답한다. ‘그래요, 사랑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이게 무슨 커밍아웃인가? 생각하는 찰나 마테오는 말한다. ‘예쁜 아내와 천사 같은 두 딸을 가진 당신이 부러워요. 난 그래서 당신을 사랑해요.’ 이 장면은 프랭키를 잃고 모든 것을 잃었다 여기는 조니가 얼마나 많은 걸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하나의 슬픔에 너무 깊게 취한 나머지 자신이 가진 행복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두 딸이 곁에 있는데 왜 그렇게 괴로워만 했던 걸까.



두 번째는 놀이공원에서 공 던지기 게임을 하는 장면이다. 공을 넣어 인형을 따면 인형은 물론 낸 돈도 돌려받을 수 있지만 실패할 때마다 재도전을 하려면 돈을 2배로 넣어야 한다. 조니는 ET 인형을 가지고 싶다는 아리엘을 위해 게임에 도전하는데 이 남자, 생활비까지 다 걸려고 한다. 사행성 게임을 좋아하는 걸까? 조니는 아내 새라에게 말한다. 더 이상 아이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아일랜드에서 이들 부부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차마 아일랜드에서 프랭키를 잊을 수 없기에 그들은 연고도 없는 이 뉴욕까지 오게 된 것이다. 슬픔과 고통에 찬 모습만을 봐 왔을 딸들을 위해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성공하는 모습,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티는 두 번째 소원을 아빠가 다시 일어서는 ‘첫 번째 모습’을 보기 위해 쓴다.



세 번째는 달을 보고 소원을 비는 장면이다. 새라는 아이를 임신하지만 건강 상태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새라가 출산을 하는 그 날, 동시에 마테오는 죽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테오의 숨이 끊어지는 그때, 죽을 줄만 알았던 아이가 다시 숨을 쉰다. 크리스티는 소중한 세 번째 소원을 동생을 살리는데 쓰지 않는다. 그녀에게 이 소원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달이 빛나는 날,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아빠와 딸들은 소원을 빈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소원을 말한다. ‘아빠, 프랭키는 마테오 아저씨가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프랭키를 보내줘’ 딸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놓고 고통을 호소했던 엄마보다 아빠가 더 고통스러워했다는 것을. 아빠야 말로 프랭키를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품고 살았다는 걸 말이다.


천사 같이 아름답고 현명한 딸 크리스티는 소중한 세 개의 소원을 모두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던 아빠, 그리고 가족을 위해 쓴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거, 그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겨내야 한다는 건 정말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가혹하기에 배워야만 되는 감정이 슬픔이다. 잘못된 슬픔을 배우면 ‘가만히 있으라’며 과한 침묵을 강요하거나 ‘왜 슬퍼하지 않느냐’며 감정의 배출을 요구한다. 만남이 중요하듯 이별도 중요하다. 관계를 잘 시작하는 법 못지않게 떠나보내는 법 역시 중요하단 걸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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