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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기고 질긴 그 이름, 악

영화, 그리고 세상 - 27. <죽음의 천사>, <디 벨레> 外

2015년 말, 대한민국은 유례없던 국정농단 사건으로 뒤집어졌다. 지난 9년간 애국보수를 내세운 정권은 세금으로 사적인 이익을 채운 것은 물론 국정원을 동원 여론을 조작하고 단체를 이용해 집회를 지시했다. 이런 부정부패가 만연한 정권 하에서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다. 세월호, 메르스 등 국민생명과 직접 연관된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고 중.미.일 외교가 최악으로 치달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당장 대통령이 물러나도 부족함이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지만 탄핵을 당하기 전까지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탄핵을 당하기 전에도 계속된 여론조작을 시도한 건 물론 갑작스러운 개헌 카드로 정권 유지를 위해 ‘수작’을 부렸다. 탄핵을 당한 지금도 그 무리들은 지속적으로 사실을 거짓으로 조작하려고 애쓰는 건 물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권력을 동원해 살려고 애쓰고 있다.


악은 질기다. 악은 선과 다르다. 선에게는 화합과 관용이 있지만 악에게는 없다. 무자비한 아집과 이기적인 폭력만이 존재할 뿐이다. 만화 <레이브>에서 주인공 하루는 적을 물리치려는 순간 그가 울음을 터뜨리자 멈칫한다. 적은 ‘나도 너희들과 싸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야!’라며 동정에 호소한다. 하루가 기나긴 싸움에 지쳐 검을 내려둔 사이, 적은 꼭 차지해야만 하는 보석을 가지고 우는 척, 유유히 도망가 버린다. 악은 선의 악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감정에 호소한다. 한국 드라마를 보면 확실한 복수라는 게 없다. 악이 어떠한 나쁜 짓을 저지르고 반복했던 결말에 이르러서는 모두 용서하고 화합한다. 그게 선의 당연한 역할이라는 듯이. 우리가 처리하지 못한 악, 그 질긴 악을 영화를 통해 알아보자.

                                                                                                         


유럽의 죽음의 천사, 남미를 향하다 <죽음의 천사>


얼마 전, 한 문건으로 세계는 떠들썩해졌다. CIA의 1955년 해외 지부 보고 문건에서 히틀러가 자살한 게 아니라는 보고가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2차 대전에서 패망이 가까워지자 애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 후 자살했다는 사실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히틀러의 자살에 대해 의문이 많았고 그가 남미로 도망갔다는 풍문이 허다했다. 우리는 몇 십 년이 지나도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세우는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정신을 보며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에 부러워 하지만, 당시 독일의 경우도 모든 전범들이 다 처벌을 받은 건 아니다. 요제프 멩겔레는 나치 친위대의 장교로 나치 수용소의 내과 의사였다. 그는 수용소 내 수감자들을 상대로 잔혹한 생체실험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독일의 패망 이후 그는 남미로 도망쳤다.


<죽음의 천사>는 요제프 멩겔레가 남미로 도주, 아르헨티나의 릴리스의 가정에서 행한 잔혹한 실험에 대해 다루고 있다. 릴리스네 가족은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호텔에 묵는다. 그는 또래보다 훨씬 왜소한 릴리스에게 말한다. 너는 ‘열성’이라고. 그는 릴리스를 성장시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접근 후 관심은 릴리스의 어머니가 임신한 쌍둥이를 향한다. 요제프 멩겔레는 서로 같은 모습을 하고 태어나는 쌍둥이에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쌍둥이는 평생의 연구 과제였다. 인간이 가진 육체적인 신비를 풀어내 많은 인간을 살리는 직업을 가진 ‘천사’인 의사. 하지만 이 의사가 자신의 의학적인 호기심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일 때, 그는 타락천사인 ‘죽음의 천사’가 된다. 이 죽음의 천사는 릴리스를 치료하겠다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생체실험을 가한다. 조금씩 성장하는 릴리스를 보며 가족은 희망을 품지만 그녀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간다.

                                                                                                  


이 작품이 가진 잔혹함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열성이다. 내가 처음 독일 나치에 대해 배울 때, 충격 받은 사진이 하나 있다. ‘이 장애인을 한 달 돌보는 금액은 4인 가족이 한 달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다’라는 광고. 이는 나치가 내걸은 것으로 그들은 게르만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며 인간을 분류해 열성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간주, 인간 청소를 자행했다. 로만 폴란스키의 명작 <피아니스트>를 보면 휠체어를 탄 남자를 나치 대원들이 창문 아래로 떨어뜨리는 장면이 있다. 이처럼 나치는 철저한 우성과 열성의 논리에 의해 사람을 분류하고 열성은 살 가치가 없다 여기고 청소했다. 장애인은 물론 유태인, 그리고 집시들도 이런 인종을 가르는 ‘악의 만행’ 속에 잔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두 번째는 집단주의다. 집단주의는 전체주의의 시작이 되는 단계다. 집단이 뭉쳐 자신들의 이익만을 주장하고 생각을 강요하며 이와 다른 건 배척한다. 유럽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건 이 전체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 각자의 사유가 아닌 집단이 가진 생각만을 강요하고 이에 따르다 보니 전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 작품에서 릴리스의 가족이 멩겔레의 치료를 허락한 거, 그건 ‘열성’인 릴리스가 당하는 차별과 관련되어 있다. 집단의 무서운 점은 자신들과 조금만 다르면 차별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왜소한 릴리스는 주변으로부터 폭력과 따돌림의 공포에 시달린다. 집단에 끼지 못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건 가혹한 고통이다. 어쩌면 2차 대전은 패전국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왕따’를 당한 독일에게 주어진 지나친 고통이 낳은 끔찍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세 번째는 악에 대한 비호다. 요제프 멩겔레는 청산되지 않은 나치 일당의 도움으로 무사히 아르헨티나로 탈출한다. 아르헨티나 뉴스에서 그에 대한 소식이 나오자 한 사람이 말한다. ‘대체 저 녀석을 안 잡고 뭐했던 거야?’ 이 대사가 모든 걸 말해준다. 대체 ‘정의’라는 녀석은 ‘악’을 제대로 심판하지 못하고 뭐하고 있는 거지? 심지어 요제프 멩겔레는 여유롭게 브라질로 도망치며 그를 쫓는 여검사에게 한 마디 날린다. 조심하라고. 그리고 그 여검사는 멩겔레를 비호하는 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참 웃기게도 정의라 포장된 그릇은 악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 그 위에 올려 완전히 지워낼 수 없다는 소리다. 악은 질기고 끈질기며 살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한다. 반면 정의는 너무나 쉽게 힘이 빠져버린다.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면 화합을 말하고 용서를 한다. 살기 위한 악의 구슬림에 가볍게 손을 내밀어 버린다.



또 정의란 건 항상 바르지 않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이 다르기에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 차이가 있다. 나치 정권 당시 그들의 편에 서서 재판을 진행한 판사들의 재판을 다룬 <뉘른베르크의 재판>에서 독일 판사들 편에 선 변호사 역의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연설은 이런 정의의 문제점을 잘 말해준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유럽은 뭘 했죠? 독일이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미국은 뭘 하고 있었느냐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나치 정권 하에서 그들의 힘에 굴복하고 있을 때 당신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 말입니다!’ 2차 대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 침공을 모든 유럽의 강대국들은 눈을 감아주었다. 당시 유럽은 식민지 문화가 활발했다. 그들은 1차 대전 패망 후 경제적인 빈곤을 겪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끝으로 공격을 멈추길 바랐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폴란드를 희생시킨 것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경제적인 이득에 따라 직접적인 참전을 배제한 채 물자적인 도움만을 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며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건설을 이룩하게 된다. 진짜 ‘정의’라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유럽은 독일을 규탄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총구를 겨눈 이후에야 독일을 상대했다. 결국 정의를 내세운 당신들이 독일이 이렇게 되도록 방조했다. 그런 당신들에게 이들을 심판할 권리는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처럼 악에 대한 비호,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의 악에 대한 침묵은 크나큰 비극을 낳는다. 릴리스 가족이 겪은 참혹한 실험은 이런 악에 대한 ‘방조’ 때문에 일어난 슬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쁜 놈이 더 오래 산다 <마약전쟁>


신을 믿다 보면 항상 생기는 의문이 있다. ‘난 이렇게 착하게 살고 있는데 왜 나쁜 놈들이 더 잘 사는 거죠? 이게 전지전능하다는 당신이 원하는 세상인가요?’ 가끔 교회 말씀에도 하느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로 착하게 산 사람이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온갖 나쁜 짓은 골라하면서 교회에서 직함을 받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나 화가 나기도 한다. 나쁜 놈이 더 잘 살고 오래 산다는 건 더 이상 가설이 아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떻게든 돈을 많이 모아야만 삶이 윤택해진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마약’은 한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악 중의 악이다. 우리나라에서 마약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이유 중 하나도 마약이 가진 중독성이 너무 강한 건 물론 일상생활을 힘들게 하고, 심할 경우 환각증세로 남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마약을 생산하는 건 물론 유통하는 녀석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경우 마약을 생산하고 유통하면 사형에 처해진다. <마약전쟁>은 이런 마약에 대해 다룬 작품인데 다른 작품들과 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주인공 차이가 ‘진짜 처절한 악의 모습’을 너무 잘 보여준다.

                                                                                                      


차이는 마약에 취해 운전을 하던 중 가게로 돌진한다. 이 사건이 일어남과 동시에 마약을 항문에 넣어 운송하던 일당이 경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몰래 도망치려다 붙잡힌 차이. 경찰에 의해 그가 마약 조직의 보스임이 밝혀지고 그는 협조를 할 것인지 사형을 당할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여기서 그는 협조할 것을 밝힌다. 경찰은 그의 협조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다. 차이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인과 처남 2명이 마약 운반 중 사망하고 마약 상인으로 변장한 형사 장이 마약을 흡수하고 괴로워하자 대처법을 알려주면서 서서히 신뢰를 얻는다. 


하지만 마약을 물류하는 형제 두 명이 비밀통로로 도망치고 이 과정에서 경찰 다수가 사망하자 비밀통로를 말하지 않은 차이에게 의심이 쏠린다. 이에 자신도 비밀통로의 정체를 몰랐다 말하는 차이. 과연 몰랐을까? 마약범 대규모 소탕작전에 이르러서야 차이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그래, 나쁜 놈에게 협조가 어디 있나.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협조하는 척 했을 뿐, 기회를 봐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이는 행동은 극악무도하다. 이미 경찰에 협조하면서 동료들을 팔아먹은 차이는 버스에서 어린아이를 납치해 경찰이 함부로 총격하지 못하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총에 맞고 고통에 시달리는 여형사를 계속 한 발씩 총으로 쏴 그 신음으로 경찰들을 도발, 한 명씩 참지 못하고 달려올 때 쏴 죽인다.



이런 잔혹한 행동은 동료들에게도 반복된다.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동료들이 도망칠 차의 운전자를 쏴 죽여 총격전이 더 벌어지길 유도하는 건 물론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경찰은 함부로 투항하는 적을 쏴 죽일 수 없다는 점에 착안 경찰에게 거짓 투항을 한다. 도망치기 위해 한 손을 희생해 가면서 문에 걸린 수갑을 부수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런 차이의 모습은 악의 습성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악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지 한다. 그들에게는 동료도 적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형제도 가족도 희생시키는 게 악이다. 헌데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한다. 악이 악을 척졌다고 그가 사실은 착한 사람 혹은 달라졌다고 말이다. 그가 한 행동 자체가 이미 악당인데 다르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악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건 물론 나쁜 놈이 더 오래 살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래, 이 작품에서도 결국 가장 나쁜 놈, 차이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왜 악은 박멸되지 못하고 오래 살아남는 걸까? 난 그 문제가 선이 악에게 구하는 ‘협조’에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악은 힘을 얻으면 빠르게 그 힘으로 주변을 굴복시킨다. 그러다 보니 막대한 힘을 얻고 이가 빠져도 잇몸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선은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정한 부분을 악에게 협조한다. 장이 차이를 의심하면서도 그를 끝까지 작전에서 뺄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장이 가지는 위치가 마약밀매 일당을 뿌리 뽑을 수 있는 ‘거물’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도 이런 순간이 있었다. IMF로 국가 경제가 어려울 때, 김영삼 대통령은 어떻게든 통합을 이끌기 위해 전두환이라는 ‘악인’을 사면을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역시 본인이 당선 후 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전두환을 사면시켰다. 악은 질기고 강하다. 그래서 힘을 키운다. 강한 놈이 더 질기고 더 세다. 선이라 불리는 세력은 힘을 키우기 위해 일정부분을 악과 협의를 본다. 난 이게 나쁜 놈이 더 오래 사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대에 악은 되살아 날 수 있나 <디 벨레>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당시 그녀가 독재정권 때의 잔재라는 점에서 ‘혹시 다시 독재를 하는 게 아냐?’라는 의문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이리 말했다. ‘에이, 21세기에 무슨 독재야?’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4.19를 일으켰고 6월 민주항쟁이 있었으며 독재가 있을 때마다 처절하게 싸워왔던 민족이다. 동시에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이승만을 겪고도 박정희를 우상화하며 전두환을 내리고도 노태우를 당선시킨 민족이다. 그리고 또 다시 우리는 독재에 휘둘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인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집단으로 뽑히는 나치. 이 나치는 부활할 수 있을까? 


영화 <엑스페리먼트>는 실제로 있었던 실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한 무리의 지원자들을 간수와 죄수로 나눠서 한 실험. 처음에 그들은 서로 농담도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지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간수들은 폭력과 억압으로 죄수들을 굴복시키려 들고 죄수들은 이런 간수들에게 반항한다. 그리고 첫 살인이 발생한다. 환경이란 것은 인간을 무섭게 만드는 힘이다. 일정한 환경이 마련되면 인간은 잔혹하게 변모한다. 악의 ‘탄생’도 그렇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에서 지냈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녀는 악은 비범한 인간이 아닌 평범한 인간에 의해 자행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디 벨레>는 한 선생의 실험으로 시작한다. 다들 알겠지만 2차 대전 후 독일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역사를 교육시켰고 이런 잘못이 반복되지 않기를 주문했다. 즉, 학생들에게 ‘파시즘’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철저하게 주입시켰다. 그래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지금도 독재정치가 가능할까 라고 물었을 때 학생들은 아니라고 답한다. 이렇게 철저하게 역사 교육을 받는데 이뤄질 리가 있나요? 그런데 이 학생들, 점점 독재에 물든다. 선생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뜻에 맞춰 학생들은 규율과 규칙을 따르고 복장을 통일한다. 그리고 그들만의 인사법도 만든다. ‘디 벨레’라는 이름의 이 집단, 현대판 ‘나치’의 재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작품은 60년대 미국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실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2주를 기간으로 잡았던 실험은 1주도 되지 않아 그 파급력과 위험성 때문에 막을 내렸고 30명으로 시작했던 수업은 그 추종자가 400명이 되었다고 한다. 감독은 그 배경을 독일로 정했는데 이는 단순히 독일에 나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독일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성적인’ 민족으로 통했다. 가장 합리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이라고 여겼다는 소리다. 그런 독일의 합리성이 인간을 나누고 대량학살을 저질렀으며 결속과 단결을 의미하는 국수주의, 반공주의, 권위주의를 지향하는 파시즘에 빠진 것이다. 

<디 벨레>의 고등학생들은 실험이 시작되기 전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비록 하나는 되지 못할지언정 그들 각자의 삶을 향유한다. 하지만 그 개개인에는 함정이 있다. 누군가는 무리에 끼지 못하며 누군가는 소외된다. 또 누군가는 무시당하며 또 누군가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이들에게 결속과 단결은 크나큰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도 어딘가에 ‘속했다’는 사명감과 의무감이라는 훈장을 받게 된 것이다. 평범했던 이들이 악이 되는 것, 그건 집단의 힘이요, 집단의 두려움이다. 학생들을 보면 그들 하나하나를 대할 땐 순하고 말을 잘 듣는다. 하지만 단체로 뭉칠 때면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안 듣고 반항적으로 돌변한다. 그래, 그들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집단의 변화는 악의 평범성과 관련되어 있다. 개인은 평범한 인간이지만 이들이 집단에 속할 때, 그리고 이 집단이 추구하는 방향을 추종할 때 이 방향이 악을 향한다면 그들도 ‘악’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도 이와 비슷한 집단현상이 있었다. 바로 ‘일베’다. 일베를 연구한 한 박사는 이들 개개인을 만났을 때 딱히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그들은 정상적이며 예의가 바른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성과 전라도, 노인들에 대한 반감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었으며 이 반감이 ‘일베’라는 이 대상들을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단체를 만나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나치의 시작도 그랬다. 가난하고 병든 독일,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독일에서 강한 독일, 우수한 독일을 외치는 나치가 등장했다.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가난과 병든 것에 대한 반감을 나치는 키웠고 이는 조직적인 학살로 이어졌다. 현대에 악의 부활이 가능하냐고? 충분히, 충분히 가능하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외롭고 힘들다. 그 고통을 교묘하게 이어 나쁜 목적으로 이용하는 ‘악당’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악은 언제든지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참으로 질기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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