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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게 왜 이리 힘든 거죠?

영화, 그리고 세상 - 26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外

인간이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의식주이다.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먹을 음식이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살 집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가 기성세대를 제외하고는 매번 먹고 사는 문제에 곤란함을 겪어온 건 무엇보다 ‘주’의 문제가 컸다. 부동산 가격이 잡히지 않으니 일찍 집을 구매하거나 부동산 투기를 자행한 이들이 아니면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최근 물가가 오르면서 먹는 문제도 힘겨워 졌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돈’이다. 돈을 벌기 힘드니 쓰기가 힘든 것이다. 1시간 일해서 번 최저임금 7,530원은 설렁탕 한 그릇 값과 같다. 임금도 적은데 일자리마저 적으니 돈을 벌 수단이 부족하다. 직장에 들어갔다 해도 문제다. 비정규직, 파견직, 인턴 등등 정규직이 아닌 자리들을 이용, 적은 임금으로 실컷 부려먹기만 한다. 기본 요건인 의식주를 충족시킬 돈조차 벌기 힘든 세상, 이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규직 시켜준다고 했잖아요, <10분>


가끔 위인전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할 것이다. ‘와, 이 사람들은 진짜 능력이 좋았나 보다. 별별 일을 다 해봤네?’ 물론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처럼 타고난 천재들은 넘치는 능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직장을 경험할 수 있었던 건 시대의 영향이 크다. 이 일, 저 일 다양하게 해볼 수 있는 시대였던 것이다. 반면 요즘은 하나만 판다 해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가끔 대학에 보면 30대 복학생들이 있다. 그들의 경우 휴학을 내고 취업 시험을 준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학업이라도 마치자는 생각으로 다시 학교로 돌아온다. 그만큼 취업을 하기, 특히 정규직을 따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사회의 경우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다. 여기에 인턴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 인턴들을 뼈 빠지게 부려먹고 정규직 채용은 전부 해주지 않는다.(대표적으로 보험사가 이런 악습을 선보이는데 인턴들에게 일부러 높은 기준을 적용,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회사 보험을 들게 하고 정규직 전환은 아무도 시켜주지 않는다.) <10분>의 종환은 PD를 꿈꾸는 건실한 청년이다. 그는 곧 지방 이전할 공공기관 ‘한국콘텐츠센터’의 6개월 인턴 사원으로 입사한다. 직책은 인턴이고 주는 돈은 쥐꼬리인데 시키는 일은 많다. 허드렛일에 야근에 거기다가 쉬는 날 야유회까지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성실함과 친화력 좋은 태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종환. 그래, 인정받은 줄 알았다.

                                                                                                            


회사에는 자리가 하나 나고 그 자리를 종환에게 지원해보라고 말한다. 그래, 안면도 텄고, 인정도 받았겠다, 나라고 정규직 못 할 거 같냐. 그는 소중한 PD시험 노트를 여자친구에게 건넨다. ‘나 이제 PD 안 하려고. 공부하는 거 너무 힘들잖아. 한다고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냥 여기서 정규직 할래.’ 2000% 합격을 예상하고 면접을 본 종환. 그런데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거 뭐지, 대체? 알고 보니 붙은 사람은 윗줄과 연줄이 닿아 있던 낙하산이었던 것. 이에 종환은 크게 실망한다. 회사에서는 파가 갈라져 낙하산인 그녀를 도와주라는 편과 물 먹이라는 편으로 나눠져 종환을 괴롭힌다. 정규직의 힘인가? 그렇게 낙하산 취급 받고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신입사원이지만 끈끈한 친화력으로 사원들과 친해진다. 그리고 화살은 종환을 향한다. ‘야, 인턴, 너 똑바로 안 해?’


우리나라 기업이 문제가 많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이 재벌경영 위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재벌들은 더 많은 이윤을 내기 위해 기업의 효율성을 강조하고 이 과정에서 소수의 정규직과 다수의 비정규직, 그리고 인턴으로 회사를 꾸린다. 특히 인턴의 경우 정규직에 대한 희망을 주면서 많은 업무량을 부과한다. 종환이 이런 현실을 알고서도 환상에 빠진 건 PD라는 꿈에 대한 염증이다. 행정고시, 임용고시 등의 ‘시험’은 갈수록 힘들어지며 몇 년을 공부해도 탈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다 보면 허송세월 한다는 생각이 들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제대로 된 돈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온다. 결국 돈을 위해 꿈과 먼 ‘직장’,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직장만을 찾아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대사는 신입사원이 낙하산이라 말하는 종환에게 던지는 말이다. ‘당신도 여기 사람들이 뽑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지원한 거 아냐?’ 확정되지 않은 한 가닥 희망 때문에 꿈을 집어 던지는 젊은이들의 모습. 특정한 미래의 모습이 아닌 정기적인 입금만을 바라는 ‘정규직’이 꿈이 되어버린 청춘들이 사는 세상에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취업했으니 좋겠다고?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세계적으로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캥거루족(일정한 직업 없는 자식이 부모의 집에서 살며 그 경제권에 기대는 가족의 형태)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취업을 했다’라는 말 자체로 축복받는 세상이 되었다. 문제는 이렇게 취업이 힘들다 보니 젊은이들을 이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총각네 야채가게’ 대표 이영석은 한때 촉망받는 청년 사업가였으나 그가 가맹점 업주들에게 행한 갑질이 드러나면서 그 추악한 민낯이 밝혀졌다. 그 전에, 그가 쓴 책에서부터 그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책에서 ‘내가 당신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급여를 안 받고 일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면 99%는 당연히 못 한다고 답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대답에 대해 이리 말한다. ‘당신이 제대로 일하려면 3년 정도 투자해야 될 거 같네요. 그렇다면 오히려 당신이 돈을 내야 될 거 같은데 돈도 받고 싶고 일도 배우고 싶어 하고, 이거 완전 도둑놈 심보 아닌가요?’ 도둑놈은 당신이다. 기업은 노동의 가치를 너무 하찮게 보고 사람을 소모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일을 제대로 못하니 돈 안 받고 일하라고? 당신 회사를 위해 쓰는 시간과 노동은 일 아닌가?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는 요즘 일자리가 남아돈다는,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게 웰컴이라 외치는 일본 사회의 추악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일자리가 남아도는데 왜 일본 젊은이들은 아르바이트 족을 자처하며 취업하지 않는 걸까? 왜 일본 신입사원들의 자살소식이 들려오는 걸까? 사토리 세대에게 가해진 잘못된 교육 방식 때문에 일본 사람들이 나약한 걸까? 아니, 일본 사회도 한국 사회 못지않게 직장 내에서의 문제가 크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아오야마는 오랜 무직 끝에 힘겹게 취업에 성공한다. 하지만 아침부터 행해지는 강압적인 체조부터 해서 목표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부담감, 자연스럽게 가해지는 상사의 폭행과 욕설, 지나친 야근에 적은 수당까지. 한 마디로 최악이다. 어? 말도 안 돼. 선진국 일본이잖아. 법으로 다 정해져 있는데 영화 속 이야기니까 이렇겠지.

                                           


일본에서 자살한 신입사원들의 공통점은 지나친 업무량이다. 일본은 정확한 수직문화인데 아래 사원들에게 많은 일을 부과하고 이를 해내지 못했을 시에 ‘책임감이 없다’며 매도한다. 이는 일본의 전체주의 문화가 가져온 폐단이다. 집단을 위해 집단이 정해준 규칙에 따라라. 그게 법을 어기는 거라도 상관없다. 집단을 위한 희생. 반인륜적인 행위도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봉합시킨 그들에게 잘 어울리는 문화 아닌가. 아오야마는 계속된 야근에 지치고 결국 지하철 철도 위에 쓰러진다. 그러려는 찰나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야마모토가 그를 구한다. 활기찬 야마모토는 과거 회사에서 일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그만 뒀다고 한다. ‘일하지 않아도 돼?’라는 질문에 야마모토는 답한다. ‘회사에 다니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야마모토의 코치 하에 귀한 업무를 성사시킨 아오야마. 하지만 그는 여상사의 계략에 의해 본인이 일을 망친 게 되고 과장에게 폭력과 욕설은 물론 굴욕적인 도게자 사과까지 하게 된다.


그런 아오야마에게 야마모토는 말한다. ‘회사를 관두는 게 어때?’ 아오야마는 생각했다. 회사를 관두는 건 책임감 없는 행동이라고. 나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고. 동료들에게 외면당해 홀로 옥상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는 생각한다. 조용히 살아야지. 다른 동료들에게 폐 끼치지 말아야지. 지나친 직장문화의 강요는 개인과 직장의 삶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즉, 나란 인간은 직장에서 일을 해야 가치가 있고 직장 내의 직위로 그 인간됨을 평가받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 이런 잘못된 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며 그게 아무리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눈을 감고 버텨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통스러운 삶의 답은 두 가지 뿐이다. 몸이 못 버텨 과로로 죽거나 정신이 못 버텨 자살하거나.

                                       


20대의 전부를 회사생활에 투자한 <사장님, 얘기 좀 합시다!>의 조연주 작가는 굴욕적인 순간에도 버티고 또 버텼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니까. 그만두는 순간 내 인생은 끝이니까. 그런 생각들로 버티고 또 버티다 그만 두었을 때, 잠깐의 절망 후 작가라는 새 삶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이리 생각했다고 한다. ‘그게 뭐라고 내가 그렇게 참고 버틴 거지?’ 요즘 유행하는 ‘욜로’라는 말이 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로 지금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들다고 블랙기업에 들어가고, 과한 노동을 강요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하고, 파견직으로 근무하고, 그런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견뎌봐야 남는 건 없다. 과거 미래가 보장된 세대와 다른 길을 걷게 된 세대에게 어쩌면 취업은 미래를 향한 발걸음보다는 고통의 연장일 수도 있다. 기업에서의 성공에 매달리기 보다는 한 번 뿐인 인생, 가슴에 사표를 가지고 끙끙이며 사는 것보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 무얼 할 때 가장 즐거운지 알고 행하면서 사는 게 좋지 않을까?

                                                                                                            


인간을 버린 취업이라는 구조, <아버지의 초상>


중국 여행을 갔을 때 중문과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를 통틀어서 동양이 서양에게 이렇게 약했던 시기가 없었다.’ 어쩌면 이 말은 조만간 미국을 제외하고는 통용되지 않을 말일지도 모른다. 유럽 역시나 빈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나라들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것은 물론 이런 경제위기를 틈타 거짓된 추억팔이를 하는 극우들이 점점 힘을 내기 시작했다. 유럽의 젊은이들 역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부모의 경제력에 기대는 캥거루족이 늘어나고 있는 실상이다. ‘그래도 유럽은 복지가 워낙 잘 되어 있잖아.’ 이런 생각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 좀 열 받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점을 당부하고 싶다. 부의 가치가 상대적이듯 빈곤의 가치도 상대적이다.


<아버지의 초상>은 한 가정을 지치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작품의 시작, 구조해고를 당한 티에리는 직업소개소 직원과 다툼을 벌인다. ‘당신이 이 자격증이 필요하다고 해서 땄는데 이제 와 필요가 없다니요?’ 이에 직원은 답한다. ‘미안하지만 이 자격증은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을 하려면 다른 자격증이 필요한데 이거 따서 오세요.’ 벗겨진 머리에 주름이 가득 진 아버지는 어떻게든 일을 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기 위해서다. 아들의 대학 등록비는 장학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다른 비용적인 문제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집을 팔려고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쉽지가 않다. 살려는 사람도 없고 사려고 해도 자꾸 트집을 잡아 가격을 깎으려고 든다. 여차저차 해서 백화점의 보안요원으로 취업한 티에리. 그는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선택에 말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 중 그녀는 아이히만이라는 자가 어떠한 악의 얼굴도, 강력한 카리스마도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저 국가의 명령을 의심 없이 따른 ‘성실한 공무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럼 왜 이 성실한 공무원은 그런 잔혹한 학살에 동참한 걸까? 그건 스스로에 대한 ‘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구조 속에서 살아가기에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진다. 이때 자신이 선이 되느냐 악이 되느냐를 정하는 건 끝없는 선택에 대한 고찰, 즉, 사유에서 온다. 악의 평범성은 이런 사유의 부족, 즉, 정해진 구조에서 정해진 일을 행하는 평범함이 인간을 악마로 만든다고 말한다. 티에리가 잡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정리해고를 당한 사람, 일자리가 없는 사람,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는 한 남자를 잡는데 그 남자는 생선을 살 돈조차 없다. 처음 잡은 청년이 ‘그깟 배터리 비용 얼마 한다고, 주면 될 거 아냐!’라고 짜증을 낸 반면 이 남자는 그깟 생선 한 마리 사 먹을 돈이 없어 도둑질을 한다. 그가 잡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물건을 훔치는, 한때 자신처럼 일거리가 없어 굶주림의 공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다. 성실하게 일하던 여직원이 그깟 고객들이 챙기지 않는 쿠폰 점수를 자기 앞으로 했다가 해고당하는 과정은 보고 있자면 참 슬프다는 생각이 든다. ‘규칙은 약자 앞에서는 엄격하지만 강자 앞에서는 항상 예외가 등장한다.’ 예외 없이 해고당하는 건 오직 당장 내일을 걱정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이다. 티에리의 고민은 우리 모두가 잃어버린, 어쩌면 이 구조 속에서 너무나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고민이다. ‘나는 왜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지?’ 서비스 센터 직원에게 내뱉는 욕설, 초콜릿 몇 개 훔친 아이에게 행해지는 폭력, 안 좋은 제품인 줄 알면서도 친구한테 팔아먹는 보험. 내가 살기 위해 남에게 행하는 이런 구조적인 폭력들이 우리 사회에는 만연하다.

                                                                                                   


<인 디 에어>는 해고전문가 라이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화상해고프로그램을 만든 신입 나탈리와 충돌을 겪는다. 나탈리는 모른다. 해고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하고 마음을 무너뜨리는 과정인지 말이다. 감정을 신경 쓰지 않고 해고를 말하는 건 ‘악’이 하는 행동과 다름 없다. 결국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해고를 진행하던 나탈리는 그 중압감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진다. <아버지의 초상>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사회에서 당연시 되는 질문을 무시하는 구조적인 고용 행태가 얼마나 인간에게 큰 상처를 주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파업이 일어났을 때 기업이 하는 행동은 편을 나누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편을 나누고 비정규직 내에서도 근무 년차에 따라 편을 나눈다. 그리고 언론을 이용해 이들을 매도한다. 언론은 돈만 밝히는 족속으로 파업근로자들을 매도하며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들을 욕먹게 한다. 약자들이 약자들을 서로 공격하는 구조를 만들어 기업가나 자본가들은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것이다.


물론 이 작품 속 유럽의 실업복지가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좋아보일지 모른다. 특히 실직한 티에리를 위해 면접 프로그램을 짜줘 모의 면접을 보게 하고 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지적, 컨설팅 해주는 부분은 ‘취업을 위해 저렇게 지원도 해주네? 저기 천국 아닌가요?’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고통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이 괴롭다고 조금 더 나은 상대를 보고 ‘넌 행복하네.’라고 강요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이는 해외여행을 다닌다고, 카페에서 커피 좀 마신다고 ‘뭐가 먹고 살기 힘들어?’ 라고 말하는 꼰대문화와 다를 바 없는 시선이다. 노동시장의 개혁은 결국 인간 개개인의 사유에서 온다. 날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가?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전태일은 제봉사로 같이 일하는 여공들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그가 그 대우에 만족하고 여공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노동시장은 지금보다 더 최악의 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산드라는 자신의 해고가 표결에 붙여지자 동료들을 찾아가 설득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복직하는 대신 계약직 직원이 해고된다는 말에 복직을 포기한다. 난 이게 노동자가 가지는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인간됨의 가치를 잃어버린 자본가들과는 다른, 자신과 주변에 대해 ‘사유’할 줄 아는 노동자가 가진 품격을 우리 모두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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