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영화를 통해 보는 경찰의 공권력 문제

영화, 그리고 세상 - 25. <체인질링>, <살인의 추억> 外

예전에 경찰 공권력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를 보았다. 경찰이 불심검문을 했고 신분증을 낸 남자에게 임의동행을 요구했다. 남자가 거절하자 강제 연행을 시도했고 저항하자 제압 후 머리를 발로 밟았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말렸는데 말리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물론 촬영하는 이에게 테이저건을 발사하고-이건 누군가 쳐서 발사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리는 사람을 체포한 것은 물론 옆에 있던 아들에게도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 경찰은 세 사람을 공무집행방해죄로 수사할 방침이라 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 여론이 상당하다. 임의동행은 엄연한 권유이며 이를 거절하는 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위다. 이를 묵살하고 강제로 연행하려는 것은 물론 폭력을 휘두른 경찰의 행동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찬성여론은 ‘경찰의 공권력이 너무 약하다’라며 경찰을 옹호했다. 시민들이 경찰의 공무집행을 몸으로 막아서다니. 이거 미국이면 총 맞을 일이다. 라며 말이다. 물론 ys 때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의 경찰 권력 죽이기 때문에 경찰의 힘이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명백한 경찰 잘못’인 사건까지 아닌 거처럼 포장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현대 사회는 자력구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방어의 범위도 너무나 좁다. 자기가 자기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만큼 합리적이고 적합한 공권력의 행사가 있어야 한다. 

                                                                                                             


강력한 경찰 공권력의 문제 <체인질링>, <무단 침입>


20~30년대, 미국의 경찰 공권력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의 강압적인 수사는 물론 가차 없는 총기 발표는 큰 사회적인 문제였다. <체인질링>은 아들을 잃어버린 한 여인이 경찰에 의해 모르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된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아들을 잃어버린 크리스틴은 사건을 빨리 해결하고자 하는 경찰에 의해 모르는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강요받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자기 아이도 아닌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다른 이들이 우겨대는 꼴이니 말이다. 경찰은 아이를 잃어버린 충격으로 그녀가 아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그들과 맞서 싸우는 크리스틴을 정신병자로 몰아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린다. 이 기막힌 사건은 당시 미국 경찰의 공권력이 얼마나 강했는지에 대해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경찰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거, 토를 다는 거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 사회. 국민들이 준 권력으로 국민을 위에서 누르는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 이 영화다.

<무단 침입>은  한 경찰이 마음만 먹으면 가정 하나를 어떻게 박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상류층에 대한 억압의식과 마이클의 부인 카렌에 관심을 보이는 경찰 피트는 마이클의 신용카드를 무효화 시키는 것은 물론, 교통 위반 벌금까지 조작한다. 심지어 순찰을 핑계로 그들의 침실까지 들이닥친다. 이에 마이클은 항의를 하러 경찰서를 찾아가나 특유의 자기 식구 감싸주기는 물론 직접 피해자를 가해자 면전으로 데려와 진짜냐고 물어보기까지 한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던 시절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이 수사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연행 당시 같은 차에 태우기도 했다.) 심지어 마이클 집에 침입해 마약을 집어넣고 그를 신고하기까지 한다. 물론 이 영악하고 사악한 피트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이 컸겠지만 삐뚤어진 공권력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강력한 공권력의 가장 큰 문제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적당한 세력이 없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이다. 특히 시민과 가까운,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경찰이 그런 기본적인 의무에는 무관심하고 권력을 통한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한다면 경찰에 ‘신고’하는 행동 자체가 무서운 일이 되지 않을까?


자력구제를 인정하지 않는 공권력의 문제 <펠론>, <데스 센텐스>


약한 공권력에 대한 문제도 있다. 사실 공권력이 강하게 발휘되어야할 대상은 ‘범죄자’들이다. 문제는 이 범죄자들에 대해 형법상 죄가 인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이 부여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위기 혹은 자신이 처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스스로 무기를 집어 든다. <펠론>은 이제 막 안정된 삶을 시작하려는 한 남자의 삶이 완전히 뒤집힌 이야기이다. 남자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한을 추격해 야구 방망이로 머리를 내리치지만 범인이 죽으면서 살인범으로 체포가 된다.(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 유명한 도둑 뇌사 사건 말이다.) 물론 도망치는 범인을 자기 집 마당까지 쫓아가 죽이는 행위가 약간 오바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엄연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한 행위이고 자신의 앞마당이라는 점에서 자신 소유의 집에 불법 침입한 상대에게 가한 공격임에도 불구 그는 살인죄로 형벌에 처해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 결국 검사와 쇼부를 본 그이지만 그가 간 교도소는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었다.


간수장 잭슨은 죄수들에게 격투를 시키는 악질 교도관이다. 교도소 안은 그들만의 성이다. 그는 그곳에서 온갖 고초를 겪게 된다. 형벌에는 세 가지 목적이 있어야 한다. 처벌, 교화, 격리. 하지만 이 교도소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즐기기만 하는 잭슨이 존재할 뿐이다. 자력구제가 인정받지 못하면 적어도 공권력이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 그런데 <펠론> 속 공권력은 그들만의 다른 성을 만들어놓고 있다. 이 속에서 자력구제를 인정받지 못한 웨이드는 그 권력에 의해 처절하게 고초를 겪는다.

                                                                                                   


<데스 센텐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권력이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면 자신이 본 피해에 대한 확실한 처벌이라도 있어야 한다. 닉이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지만 그 아들을 죽인 이들에 대한 확실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학생들이 담배 피는 것을 말리는 아저씨와 싸우다 그 아저씨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이 애들이 학생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물론-거기에 쌍방폭행이라는 점도- 그 애들이 그 남편의 자식과 아내를 위협까지 했다고 한다. <데스 센텐스>의 아버지, 닉은 자신이 직접 복수를 다짐한다. 공권력이 해주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대신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건 비극이다. 현대에 금지된 자력구제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일은 지금의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보여주는 반증 밖에 되지 않는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에는 안전에 대한 보상의 값도 담겨져 있다. 헌데 국가가 이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도둑놈 심보’가 아닐까?



공권력을 대신한 처벌은 올바른가? <뇌남>, <타임 투 킬>


공권력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면 택할 수 있는 선택은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길이다. 실제로  오원춘 사건에 대한 국가배상금이 삭감되는 사건이 일어나 대체 공권력의 범위를 어디까지 보는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보느냐에 대한 문제가 일어난 적이 있다. <뇌남>은 이런 공권력이 처벌하지 못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무능하게 만드는 범죄자를 직접 처벌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스즈키 이치로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 의해 악인을 처단하는 킬러로 교육을 받는다. 이 할아버지가 스즈키 이치로를 킬러로 교육시킨 이유는 자식의 죽음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자식 부부가 죽었지만 사고 낸 당사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할아버지는 공권력을 대신해 ‘악인’들을 처단할 인간병기를 스스로 만든다. 이 작품에서 마리코 박사는 범죄자들에 대한 사회적 처벌에 대해 ‘교화’의 방법을 택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계속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해자가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듬과 동시에 피해자도 세상을 등지지 않고 살아가는 치료법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치료법에 대해 영화는 결론에서 끔찍한 결말을 내린다. 마리코가 용서하고 세상으로 데리고 나온 소년이 다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이를 스즈키 이치로가 막은 결론 말이다. 스즈키 이치로는 스스로 ‘법’이 되어 사회적 악자들을 처벌했다. 그리고 이는 <타임 투 킬>의 칼리 해일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미시시피 주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동네다. 칼리의 딸은 두 백인 남자에 의해 처참하게 강간당한다. 칼리를 더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이 정당한 처벌을 받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에 칼리는 직접 엽총을 들고 두 백인 남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인다. 법이 대신 해주어야할 딸의 복수를 아버지가 대신한 것이다. 흑인이 백인을 죽인 것도 모자라 사법부의 권위에 도전한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처음부터 잘못된 재판이라면, 그것이 국가의 힘과 권리라도 맞서 싸우는 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을 영화는 보여준다. 하지만 실제로 공권력을 대신한 처벌은 상당히 위험하다. 예전 나이지리아에서 네 명의 학생이 도둑으로 오인을 받고 마을 사람들에게 맞아 죽고, 불에 타죽고 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현대 사회에 재판이 존재하는 이유는 정확한 죄의 유무를 따지기 위해서다. 모든 사건은 다각도로 바라봐야 하고 예상치 못한 사실이 나중에라도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인민재판의 두려움은 오직 한쪽의 목소리만을 듣기 때문에 마녀사냥으로 빠질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재판으로 가는 과정에서 잘못된 공권력의 개입이 있다면 이는 배제해야할 요소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공권력은 어떠한가? <살인의 추억>, <무법자>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 한국의 공권력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라고 본다. 공권력이 높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경찰이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수단 정도는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취객에게 맞고, 바닥에 누워 저항하는 범죄자를 보며 낑낑대는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공권력이 이리 우스우면 누가 법을 지키고 따르려 하겠는가. 그러면 왜 한국경찰의 공권력이 외국에 비해 약한가? 이는 독재정권 당시를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런 모습을 잘 그러낸 작품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박두만은 사건에 대한 강한 열의를 드러내지만 범인을 찾는 과정은 답답하고 무식하기 그지없다. 동네 양아치들을 족치는 것은 물론 거짓자백을 강요한다. 조금만 범인으로 보이면 협박과 폭력을 일삼는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몇 가지 추측, 그리고 육감이다. 이는 서울에서 온 서태윤과 대립되는 모습을 드러내는데 문제는 서태윤 역시 뒤에 가서는 한 소녀의 죽음으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다는 점이다. 강력한 공권력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 있음과 동시에 폭력과 강압적인 수사를 인정해준다. 이는 군사정권은 물론 지난 9년의 적폐정권에서 보여주었던 권력의 입맛에 맞춘 공권력의 강압적인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법을 통한 강력한 공권력의 규제밖에 없다. 물론 또 다른 희생자를 막기 위해 범인을 잡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다른 이들의 인권적인 부분까지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현대의 공권력의 문제는 분명 고쳐야할 문제다. 특히 범죄자의 인권을 과하게 보호한다는 점, 피해자가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한 보상보다 과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범죄자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는 부분은 꼭 고쳐야할 지점이다. 그런 문제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주 원초적인 영화 <무법자>라고 본다. 이 작품에서 정수는 사악한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로 고통에 시달린다. 그는 분명 강력한 공권력을 가진 형사임에도 불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범죄자들을 잡고 그들이 강력한 법의 심판을 받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여자들을 잡아 죽이고 강간까지 한 범죄자들을 한 대 때리는 것조차 문제가 되고 그들이 가족이 차려온 따뜻한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그 괴로움에 정수는 치를 떤다. <강력 3반>의 허준호도, <돈 크라이 마미>의 유오성도. 이 남성미 넘치는 배우들 역시 ‘형사’라는 옷을 입으니 약하고 힘없는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자물쇠를 여러 개 문에 채워두고 나 보복당할 까봐 무섭다며 김민준에게 매달리는 허준호나, 여자애를 강간하고 협박한 고딩들에게 소리만 지르고 피해자 가족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유오성이나 모두 공권력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었으나 이빨 빠진 호랑이 같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경찰의 공권력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싶은 건 제발 미국을 예로 들면서 미국처럼 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미국의 경찰 공권력에 대한 문제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특히 흑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검문과 발포,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행태는 미국 역사를 통틀어 매번 문제가 되어 왔다. 아무리 미국이 좋다지만 이런 문제가 되는 것을 예로 들며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경찰에 대한 불신이 너무 커지지 않았으면 한다. 공권력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신도 문제지만 불신 역시나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시선이다. 특히 경찰의 폭력에 대해 말이 많은데 범인 제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에 나오는 강한 경찰들처럼 한 방에 범인을 제압하는 건 힘든 일이다. 누구나 생명은 하나다. 위험 앞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은 폭력이 아닌 제압이다.

작가의 이전글 50년대의 미국과 한국의 기레기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