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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의 미국과 한국의 기레기들

영화, 그리고 세상 - 23. <굿나잇 앤 굿 럭>

미국의 매카시 상원의원은 1950년 2월 국무성 안에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폭탄발언을 내뱉었다. 그의 이 발언은 당시 공산주의 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기를 느낀 미국인들에게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많은 언론들은 매카시를 적으로 돌려 공산주의자로 찍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만행을 내버려 둔다. 이때 CBS에서 뉴스맨으로 이름을 알리던 머로우와 그 뉴스팀은 매카시에게 반기를 든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모든 것을 잃고 사회에서 매장당할 위기에 빠진 이들의 편에 서며 매카시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당연히 그들은 매카시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몰린다. 그 증거는 주변의 친구가 공산주의자다, 과거 부인이 어느 단체에 가입했다(그 단체가 당시 색깔론에 휘말리지 않은 곳이라도 말이다.) 등등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머로우의 뉴스팀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카시즘' 광풍에 휩싸인 미국에서 소신을 가지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이기게 된다. 하지만 그 승리는 놀라울 정도로 형편없다. 화려한 파티, 승리의 도취, 막대한 이득 따위는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들은 저널리스트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래, 어찌 생각하면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언론인'이 가져야할 최소한의 양심과 직업정신이 아니었나 싶다.

                                                                                                          

<굿나잇 앤 굿럭>은 '재미있게' 만들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감독 조지 클루니는 영화적인 재미를 위한 기교보다는 뚝심 있는 연출법을 선택하였다. 오직 '뉴스'. 당시의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위해 힘 있는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는 머로우의 모습이 영화의 대부분이다. 이 영화가 택한 길은 '진실'이다. 거짓된 선동과 선전에 휘둘리지 않는 진실. 이 끈을 영화는 끈질기게 잡고 간다. 데이빗 스트래던은 냉철하고 지적이며 뚝심있는 머로우의 모습을 흑백화면에 어울리는 지적이고 철저한 매력으로 풀어냈다. 재미를 줄 수 있는 요소가 적음에도 불구 그의 빨려 들어가는 연기가 나름의 흡인력을 선사해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매카시즘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 조지 클루니 감독은 선동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과격한 시위대의 모습 대신 일상의 모습들을 많이 집어넣었다. 이는 '어찌되었던 삶은 전진한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세상은 미쳐 돌아가도 일상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른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TV가 바보상자라는 이름을 얻은 이유는 사람들을 '진짜' 바보로 만들 위험이 있어서다. 귀와 눈을 막아버리는 것이 아닌 마치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정보만을 주입한다면 그들은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착각하고는 한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옳다고 말이다.

                                                                                                           

매카시 상원의원은 매카시즘을 이용해 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냈다. 찰리 채플린, 아서 밀러, 브레히트 등의 유명인들이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매카시즘에 적극 동조했던 엘리아 카잔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했음에도 불구 그에 대한 같은 영화인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수백 명이 수감되었으며 1만 명이 넘는 이들이 직업을 잃어야만 했다. 특히 '매카시 블랙리스트'는 모든 범위로 퍼져 나가며 많은 이들에게 '낙인'을 찍었다.


놀라운 건 이런 매카시즘이 무려 60년 가까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미약한 증거와 지나친 주장이 마치 진실인 거처럼 이야기되며 '종북'이라는 말로 자신들과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싸잡아 매도하고 있다. 만약 지난 정권에서 대한민국에 '매카시' 의원이 나타난다면 광적인 매카시즘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았다. 이미 역사가 증명한 실수가 반 백 년이 지난 대한민국에서 반복되었던 것이다. 이미 냉전이 끝난 이 시대에 말이다. 당시 야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은 종복이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살았고,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 정부의 돈을 받아먹으며 시위를 벌인 보수단체는 조금이라도 정권에 반대하는 집단에게는 종북 빨갱이라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국가정보기관인 국정원은 이런 빨갱이 운동에 앞장서서 댓글부대를 운영했다.


가장 창피한 건 이런 추잡스러운 정권의 행동에 언론이 동조했다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메이저 언론인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사들은 정권의 잘못된 행동을 꼬집고 비판하기 보다는 이에 동조하고 오히려 잘못을 희석시키는 물타기를 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50년대 냉전의 시대에도 색깔론과 맞서 싸운 머로우의 뉴스팀과 달리 우리나라 언론은 정직한 언론인들을 다 내쫓고 오직 ‘부역자들’만 남아 받아 적기 뉴스만 내보낸 것이다. 한국 언론의 행태 중 가장 부끄러운 것이 곡학아세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배운 사람들 중 하나가 메이저 언론의 기자인데 그들이 뻔한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이려고 드는 것이 참으로 가증스럽다.

                                                                                                           

최근 한국의 방송매체들은 ‘기레기’에 주목하고 있다.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돈을 받고 더러운 기사를 써내는 기레기들을 주인공 혹은 악역으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더 이상 국민들은 모든 기사를 눈에 보이는 대로 믿지 않으며 자신들이 모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기사 하나하나에 대한 ‘팩트 체크’를 반복한다. 진실을 알려야 하는 기자가 오히려 국민들에게 진실을 체크 당한다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정권이 바뀌었으나 이들은 입으로만 과거를 반성하고 여전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심지어 그전 정권에서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다른 기준으로 현 정권을 비판이 아닌 비난의 수준으로 공격한다. 


미국의 트럼프 당선에는 더 이상 기자들을 믿지 않는 국민들의 마음도 한몫을 했다. 국민들은 기득권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한 기사만을 생산해내는 기자들에게 불신을 품었고 이는 트럼프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들에 오히려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국민이 기자를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원인을 기자들이 제공했다면 언론의 존재 이유는 과연 있는 것일까? 왜 국민들이 지상파 3사와 뉴스전문채널 YTN이 아닌 JTBC뉴스를 신뢰하는지 언론인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뉴스가 가지는 힘은 자극적이고 특정인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내는 것이 아닌 진실을 말하는 힘이다. 일상은 반복된다. 하지만 그 반복이라는 게 나를 둘러싼 이 사회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한 순간 일상이 망가졌을 때, 그제야 눈과 귀를 뜨고 세상을 바라보면 악몽은 이미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보도되어야 될 뉴스는 눈과 귀를 가리는 것이 아닌 뜨게 만드는 길잡이의 역할이다. 제대로 된 진실을 전하고서야 언론인은 시청자들을 위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Good night, and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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