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오직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사랑, 모성

영화, 그리고 세상 - 22. <마더>, <아이 킬드 마이 마더> 外

가끔 웹서핑을 하다 보면 ‘슈퍼맨 아빠’라는 게시물을 보곤 한다. 평범한 아빠들이 자식이 위험한 순간 엄청난 신체능력을 발휘, 자식들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짤들이다. 자식이 위험할 때면 부모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는 신체적인 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강인해지며 때로는 너무나 잔혹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런 부모들을 상대로 아이들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던지는 건 참으로 잔혹한 일일 것이다. 둘 다 자신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다는 걸 자식들은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아빠랑 엄마 중 누가 더 자식을 사랑할까? 라고 묻는다면 난 지체 없이 ‘엄마’라고 말할 것이다. 엄마의 사랑은 아빠의 사랑과 다른 ‘모성’이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모성은 부성과 다르다. 남자가 자신과 닮은-그리고 자신을 닮아가는-아들을 보며 사랑을 느낀다면 여자는 자식을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한다. 난 모성애의 힘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약 40주 정도의 임신기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자식과 엄마는 한 몸을 쓴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나온 거처럼, 그래서 아담이 이브에게 무엇보다 각별한 사랑을 느끼는 거처럼 여자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자식이라는 존재에게 마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이기적인 사랑을 느낀다. 부모의 사랑을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아가페적인 조건 없는 사랑이라 말하는 이유, 그건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질긴 육체적인 교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여성의 ‘모성’이라는 건 오직 임신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 그렇다면 미래에 정자와 난자를 합쳐 여성의 몸이 아닌 다른 공간을 통해 만들어지는 아이에게서는 엄마는 모성을 느낄 수 없는 걸까? 

                                                                                          

납치한 아이에게서 모성을 느끼다 <8일째 매미>, <마더>


일본 드라마 <마더>는 한 여선생이 자신의 제자를 납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스즈하라 나오는 원래는 조류학자이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초등학교 교사로 잠시 들어간다. 그곳에서 레나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는 나오. 항상 밝고 미소를 짓고 있는 레나는 붙임성 있게 나오에게 다가가고 나오는 그런 레나에게 처음에는 차가우나 흥미를 보인다. 레나는 아동학대의 피해자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고통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레나. 레나는 베이비 박스에 들어가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주기를 꿈꾼다. 그런 레나를 위해 나오는 결심한다. 레나가 죽은 거로 꾸민 뒤 이 아이를 납치하자고 말이다. 왜 나오는 레나를 납치한 것일까? 이는 참으로 독특한 나오의 상황, 그리고 모성을 느끼는 색다른 방식에 있다. 


나오는 어린 시절 고아원에 보내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를 버렸고, 이후 부잣집에 첫째 딸로 입양된다. 나오는 어머니는 물론 두 동생의 따스한 관심에도 불구 언제나 자신을 외딴 존재라 여기며 거리감을 두었다. 즉, 그녀는 모성을 주는 환경에 있었음에도 그 모성을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친엄마의 부재. 그 한 가지 사실이 그녀에게는 너무 크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모성이란 건 자신의 배로 낳은 엄마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걸까? 레나는 자신의 친엄마가 아닌 납치한 엄마, 레나가 아닌 츠구미라는 이름을 준 나오에게 더 큰 사랑을 느낀다. 그건 단순히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줬기 때문이 아니다. 나오가 보여준 사랑이 레나, 츠구미에게 마음으로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레나를 위해 모든 걸 포기했다. 학자의 삶을 접고 청소부가 되었으며, 부유한 스즈하라 가에서 스스로 파양을 결정했다. 그리고 죄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었다. 이 모든 것이 겨우 며칠 동안 같이 지낸 한 초등학생의 ‘엄마’가 되기로 결정한 후 그녀가 택한 변화다. 

                                                                                                     

모성이란 꼭 아이와 한 몸을 공유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난 이 모성이라는 게 ‘여성’이 가지는 특별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내연녀에게 납치당한 여자가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는 이야기를 다룬 <8일째 매미>에서도 잘 드러난다. 키와코는 내연남에게 낙태를 강요당하고 아이를 지운다. 하지만 이후 아이를 임신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그 사이, 내연남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행복한 삶을 꿈꾼다. 내연남의 집을 찾은 키와코는 울던 아이를 달래던 중 복수심에, 그리고 사랑에 아이를 납치한다. 4년, 아이와 함께 지낸 그 4년 동안 키와코는 육아놀이를 한다. 하지만 그 아이, 에리나는 희미했던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자신의 마음 속, 채워지지 않았던 그 감정을 발견해낸다. 키와코가 자신에게 주었던 모성. 그 사랑의 상실이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조건 없는 사랑은 잔인할 수 있다 <마더>, <미씽: 사라진 여자>


일본에서 가장 엽기적인 살인사건 중 하나인 콘크리트 여고생 살인사건을 혹시 아는가? 한 무리의 불량학생들이 여고생을 납치, 온갖 성적인 잔혹한 고문을 했고 이후 이 여고생이 죽자 드럼통에 콘크리트를 부어 매장한 사건이다. 일본에서 난리가 난 이 사건에서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들이 집에 이 여고생을 납치한 것이다. 이 사건을 그린 만화책을 보면 아이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아나 차마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그녀가 한 일은 잠시 여고생에게 탈출하라 문을 열어준 게 전부다.(이것도 온몸이 병든 여고생은 느리게 도망가다 결국 붙잡혀 더 큰 고문을 당한다.) 모성의 잔혹한 면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다 보니 어긋난 방향을 향한다는 것이다. 또 지나친 모성은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잔혹한 사건을 연출하기도 한다.


<마더>는 정신지체가 있는 아들이 살인범으로 몰리면서 엄마가 진범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잔혹한 점은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결국 아들을 ‘구원’한다는 점이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엄마는 강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아들은 범인이 아니다. 이 확실한 명제가 점점 마음을 파고들어 강철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나치에서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을 알고 결국 아버지를 고발하는 <뮤직 박스>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뮤직 박스>가 진실 된 법조인의 자세와 가정을 보호해야 하는 딸의 입장에서 고민을 한다면 <마더>의 고민은 어머니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자식을 보호하는 것. 그건 부모에게 있어 가장 큰 의무이자 헌신이다. 아무리 잔혹한 현실이라도 그 잔혹함을 자식이 경험하지 못하게 막는 게 부모의 역할일 것이다. <마더>는 그 잔혹한 순간을 너무나 잘 드러낸다. 보기 싫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무조건적인 모성은 때론 자신-그리고 또 다른 자신이라 여기는 아이-만을 바라보게 만든다. <미씽-사라진 여자>는 한 조선족 여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보여주면서 그녀가 벌인 끔찍한 범죄의 말로를 진행시킨다. 이 작품이 잔인한 이유는 자신의 ‘모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여성에게 피해를 가한다는 것이다. 조선족 여인 한매에게 피해를 준 건 남성들이다. 헌데 그녀는 모성을 채우기 위해 남성들을 이용하고 또 같은 여성에게 피해를 줘야만 했다. 아이를 유괴당한 여성, 지선 역시 남편과 이혼 후 힘겨운 법정 싸움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워킹 맘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어쩌면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이들이었다.-결말부에 지선이 떨어지려는 한매를 향해 손을 내미는 부분이 이런 유대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기적인 모성의 형태는 결국 사회가 형용할 수 없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최근 발생하고 있는 노 키즈 존 문제, 맘충 혐오 문제 등도 이런 이기적인 모성 때문에 생긴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모성의 느낌 <아이 킬드 마이 마더>, <헝그리 하트>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 못 이겨도 우리 엄마는 이겨.’ 라는 말. 참 이상하게 사람은 자신에게 큰 사랑을 부어주면 오히려 이를 거부하려고 든다. 특히 마음이 복잡한 사춘기 때는 이상한 반항심이 생기고 이런 반항 심리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 향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와 엄마는 맞는 구석 하나 없다. 그런데 엄마는 자꾸 날 자기 곁에 두려고 한다. 답답하고 짜증나고 지겨워 죽겠는데 아무리 화를 내도 날 혼자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차라리 엄마가 없었다면. <아이 킬드 마이 마더>는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이 생각에 대해 다루고 있는 영화다.


엄마는 아빠와 다르다. 아빠와 부딪힐 일은 잘 없다. 남자들이 가지는 무신경함, 대화보다는 결과를 좋아하는 성격, 기본적으로 집 안의 일보다는 직장에서의 삶이 더 바쁘기 때문이다. 반면 엄마는 다르다. 아들과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풀어보려고 하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래서 아들은 엄마와 계속 충돌한다. 대화는 아슬아슬하며 조금의 자극이라도 아들은 터져버릴 것만 같다. 엄마의 모성이 점점 진해지는 거처럼 아들 역시 성장한다. 어린 시절, 아들에게 엄마가 보호자이자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면 신체적인 성장을 마친 아들에게 엄마는 여자로 다가온다. 즉, 동등한 성인과 성인의 입장에서 아들은 엄마를 바라보고 마치 여자를 대하듯 엄마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자꾸 어린아이 취급하는 엄마에게 반항한다. 속으로는 엄마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에 대해 말한다. 증오와 사랑. 한 마디로 애증이다. 자식은 엄마를 그 누구보다 미워하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차마 떨쳐버릴 수 없다. 그 강한 모성의 감정을 자식도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대사가 있다. 주인공 후베르트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엄마는 어떻게 할 거야?’ 엄마의 대답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 ‘그럼 난 내일 죽을 거란다.’ 자극적인 제목과 퀴어를 다루고 있다는 소재적인 부분과 달리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은 너무나 대중적이다. ‘엄마, 난 당신이 싫어요. 너무나 증오스러워요. 그런데 당신을 너무 사랑해요. 나, 대체 어찌해야 하죠?’ 부모가 주는 모성에 대한 자식의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고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마음이다. 어머니의 모성은 위대하다. 하지만 그 모성이 주는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내기에 인간이라는 그릇은 너무나 작다. 그래서 넘치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고 갈등을 겪게 된다.

                                                                                                   


번외로 이런 모성을 보여주는 영화가 <헝그리 하트>가 아닌가 싶다. 지독한 채식주의자인 아내는 자식에게도 고기를 먹이지 않는다. 동물성을 섭취하지 못한 아기는 또래보다 훨씬 작으며 의사는 남편에게 이러다 아기가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부부는 격렬하게 서로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이의 양육방법, 아내의 고집스러운 육아법에 남편은 고민한다. 주변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가족을 지키자 말하는 아내. 그녀는 모성이 없는 여자일까? 그래서 아기를 죽일 수도 있는 채식을 고집하는 걸까? 영화의 초반, 아내는 점집에 들어가 아기에 대한 점을 본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세상 그 어떤 엄마보다도 밝고 아름답다. 제왕절개 후 그녀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아기를 보겠다고 병실을 나선다. 그리고 그녀는 아기를 데려간 남편과 시어머니 집에 찾아가 아기를 유괴하려고 한다. 남편에게 한 대 맞은 그녀지만 아무 말 없이 아기를 안고 집을 나선다.


이 작품의 아내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 받아 마땅할 싸이코다. 하지만 그녀가 보여준 ‘모성’은 그 어떤 작품 속 어머니보다 강하다. 아이와 함께 바닷가를 거니는 그녀의 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며 아름답다. 우리나라에서도 안아키 논란이라는 것이 있었다. 의학적 치료법에 의문을 느낀 어머니들이 자연치료요법을 주장하는 한 한의사의 치료법을 따르면서 논란이 된 것인데 자연치료에 의존하다 보니 화상을 입은 아이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 더 큰 상처가 생기는 등 사회적인 논란이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더 잘 키우고 싶은 마음. 그 조건 없는 사랑이 너무 과한 나머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것. 그것도 모성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SNS 문화, 당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