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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왜 민주주의인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가본 적이 있는가? 과거 일제강점기의 독립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 독재 시절의 민주화 운동가를 수감하였던 과거 악명 높았던 감옥인 이곳은 이제는 역사관이 되어 당시 고문의 참혹한 현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 당시의 고문 방법을 보여주는 재현관을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나라면 끝까지 입을 다물 수 있었을까?’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는 일본이라는 외적을 상대로 싸워왔다. 우리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고 우리 가족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려 든다면 맞서 싸우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일본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폭력을 휘둘렀고 학대를 일삼았다. 허나 60~80년대 진행되었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그 평가가 갈라진다. 박정희 시대에 대해 ‘독재가 필요했던 시대’라고 평하며 전두환의 탄압에 대해 ‘경제 발전을 이룩한 대통령’이라는 평과 함께 ‘그들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벌이지 않았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대립되는 단어가 ‘착한 독재’와 ‘불필요한 민주주의’다.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이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쓴 걸까.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한다. 이후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키고 광주 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 한다. 1980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즉위한 그는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펼친다. 당시 대통령 즉위 과정이 소수에 의한 간접선거였다는 점,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강한 무력으로 진압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독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영화 <1987>은 이런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다루고 있다. 1987년 스물 두 살의 서울대생 박종철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한다. 당시 대공수사처는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영장 없이 잡아다 남영동에서 고문을 자행했다. 대공수사처장 박처장은 박종철의 문제가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 기자들 앞에서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지어낸다. 22살의 청년이 심장이 약해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망언을.

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큰 바람을 일으킨다. 이전까지 간첩 혐의로 잡혀온 이들은 강압적인 고문에 이기지 못해 ‘내가 간첩이다’라는 거짓 조서를 작성, 법정에서 처벌을 받았다. 그런데 그 전에 사망했으니 문제가 커진 것이다. 더군다나 시체를 부검이라도 하면 고문했다는 증거가 나타나기에 필사적으로 부검을 조작하고 시체를 화장한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주인공이 최검사이다. 최검사는 장인의 뒷배를 믿고 자기 마음대로 수사를 벌이는 독종이다. 그는 화장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꼭 부검을 하라며 영장 발부를 거부한다. 그는 로맨티시스트이다. 그에게는 낭만이 있다. 바로 ‘법치’이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 전태일은 당시 대한민국의 노동문제가 법이 없어서가 아닌 ‘지키지 않아서’ 임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80년대 독재정권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도 법이 있었다. 하지만 정권유지를 위한 색깔론은 ‘간첩’, ‘빨갱이’라는 명제에 숨어 쉽게 법을 어기고 폭력을 행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법은 현실과 거리가 멀어졌다. 최검사는 끝까지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여느 로맨티시스트가 그러했든 그 역시 현실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이기지 못한다.

최검사와 비슷하게 초반에 극을 이끌어가는 두 번째 주인공은 윤기자이다. 독재정권 하에서 기자들은 받아쓰기를 해야 했고 받아쓰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독재정권의 참상을 알리는 기자를 쓴 기자들은 틀렸다는 표시로 기사를 삭제 당했다. 자발적 기레기들이 넘쳐나는 요즘과 달리 적어도 영화 속 기자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특종을 잡기 위해 애쓴다. 비록 그 행위로 인해 신문사에 경찰이 투입되고 감옥에 들어가도 말이다. 윤기자는 박종철의 사망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다닌다. 그는 언론이 지닌 ‘자유’를 맘껏 누리며 이 ‘특권’을 어찌 써야 되는지 잘 보여준다. 작품의 1부가 권력층인 검사, 그들과 가까운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면 2부는 서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주인공은 교도관 병용과 대학생 연희다. 병용은 민주화 운동에 몸담고 있는 인물로 감옥 안에서의 정보를 밖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불심검문이 심했던 시대니 만큼 걸릴 확률이 높은 그는 여대생인 연희에게 일을 부탁한다.


연희는 병용과 다르다. 그녀는 민주화 운동 자체를 나쁘게 생각한다. 이 배경에는 연희 아버지의 죽음이 관련되어 있다. 독재정치는 말 그대로 소수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정치 형태다. 권력자의 권력유지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무기인 돈, 두 번째는 맹목적인 지지를 의미하는 종교다. 첫 번째 자본의 영향 때문인지 독재정치는 귀족정치와 연결된다. 자본가들은 정치권과 결탁,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었다. 당시 노동운동은 이런 사업자들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들은 이런 노조를 ‘빨갱이’라 이름 붙여 탄압했다. 즉, 민주주의 운동에서 노동운동은 빠질 수 없는 요소이고 노동운동 역시 빨갱이라는 프레임에 갇히는 운명공동체의 신세였다. 연희 아버지는 돈을 떼먹은 사장 때문에 동료들에게 싸워 달라 부탁을 받았다. 이 부추김에 술을 마신 연희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연희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 동료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용히 살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라는 그녀의 생각은 대학생활에서 무너진다.

당시 대학은 적극적으로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던 ‘성전’이었다. 그 시절 대학생들에게는 지식인이 가져야 하는 사명인 ‘계도’를 품고 있었다. 연희는 처음으로 최루탄이 떨어지고 무장경찰이 날뛰는 시위장 한복판에 놓여지고 만화 동아리를 가장한 민주운동 동아리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보게 된다. 병용과 연희는 정치가 ‘절대’ 일상과 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인물들이다. 병용은 감방 안에서 억울하게 잡혀와 감시를 받는 이들을 바라보며 고통에 시달린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매일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연희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음악만 듣고, 친구들과 수다만 떨면서 살 수 없다. 대학 문 앞까지 경찰들이 들이닥치며 등교 때마다 소지품 검사를 하는 현실에서 화살이 언제 그녀에게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치의 악행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언제 우리에게 다가올지 모르며 언제 숨통을 조를지 모른다.


이 잘못된 정치가 낳은 괴물, 그 괴물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주인공 박처장이다. 박처장은 폭력과 회유로 간첩사건을 조작한다. 그의 마음속에는 빨갱이에 대한 분노가 엄청나기에 어떠한 말도 통하지 않는다. 진중권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말을 해도 못 알아들으니 솔직히 이길 자신이 없다’가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자본과 명예에 취해 북풍을 이용하는 거짓된 이들과 다르다. 진심으로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넘치며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야 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고집이 있기에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 허나 이 고집은 무조건 미워할 수 없는 생각이다. 그야 말로 ‘사상’에 의해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진짜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거두어 키워주던 남자는 사회주의에 심취된 채 자본가에 칼을 들었고 대지주였던 그의 가족은 아무런 잘못 없이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박처장은 폭력의 피해자였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선거철이면 다가오는 북풍의 무서움은 일제의 해방 이후 ‘사상’을 이유로 자행되었던 폭력 앞에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던 이들의 분노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은 두려움에서 온다. 폭력을 당한 이는 그 공포를 알기에 당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폭력을 행한다. 


이런 ‘괴물’ 박처장은 마지막 순간, 성당의 스테인글라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본다. 이 지점에서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 민주주의인가. 대체 민주주의가 뭐기에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지켜내기 위해, 누리기 위해 애를 쓰는가.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주권이란 주인 된 권리이다. 즉,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요, 국민의 뜻에 따라 국가의 방향성이 결정되어야 함을 말한다. 왜 주인 된 권리가 소중한가. 주인의 반대말은 ‘고객’이 아니다. 오히려 ‘노예’에 가깝다. 힘을 지닌 자본가와 권력계층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 그것이 민주주의가 지닌 주인 된 권리다.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한 많은 이들의 희생은 ‘예수’에 비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피를 흘리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었고 충분히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기적들을 행해왔다. 그럼에도 그가 죽음을 택한 이유, 그건 자신의 피로 인간들의 모든 죄를 사하기 위함이다.


성경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알 것이다. 주의 명을 받은 이들이 얼마나 그를 배신하고 죄악을 저질러 왔는지. 주가 몇 번이고 벌을 내렸으나 인간은 결코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왔는지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 자신의 피로라도 인간들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그들의 죄를 용서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 열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 한 사람쯤 눈감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모진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다 한들 누구도 욕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앞장섰다. 그리고 견뎌냈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되니까. 내가 내 권리를 찾기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의 권리를 찾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되니까. 권리는 남이 찾아주는 게 아니니까. 비록 내가 희생할지라도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행복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작품의 마지막 주인공으로 이한열을 뽑고 싶다. 그가 외친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는 소수 집단의 이득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정작용에 의지했기에 넘어진 곳에서 또 넘어지고 또 상처를 입어야 했다. 아프더라도 썩은 살을 도려낼 줄 알고 ‘암세포도 생명’이라며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이한열을 비롯한 민주 열사들의 외침은 민주주의라는 ‘진정한 주인’을 내세우고 ‘잘못된 주인’을 치우자는 강렬함이 담겨 있다. 박종철과 이한열, 이들은 짧은 생을 마감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죽지 않았다. 영화에 등장한 ‘그날이 오면’을 보며 기억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다. 그는 유시민 작가한테 이리 물었다고 한다.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 올 수밖에 없다는 유시민 작가의 말에 이리 답했다 한다. ‘근데 그런 시대가 오면 나는 없을 거 같아요.’ 바람과 파도는 한 번에 모든 걸 바꿀 수 없다. 끝임 없이 불고 내리쳐야 돌을 깎고 땅을 깎는다. 촛불시위라는 거대한 민주주의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난 그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노무현 정신에 있다고 생각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특별한 사람은 정신을 남긴다. 민주주의 정신은 특별하다. 그러하기에 ‘그날’이 올 때까지,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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