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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성패를 가져오다 <은혼>, <도쿄 구울>

일본 만화 원작 작품들의 경우 그 호불호가 상당히 심하다. 잘 만든 작품은 추천할 만큼 좋으나 별로인 작품들은 별점을 아예 주기 싫을 정도로 퀄리티에서 아쉬움이 크다. 개인적으로 <바람의 검심>, <기생수>, <바쿠만> 같은 경우는 스토리나 표현에 있어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들인 반면 <흑집사>, <진격의 거인>, <늑대 소녀와 흑왕자> 등은 만화를 보지 않고 영화 그 자체만 봤더라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든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최근 일본은 자국 만화의 영화화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 <아바타>를 기점으로 영화의 CG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고 이는 기술력에서 한계를 보였던 일본 만화의 실사화에 탄력이 붙게 만들었다. 올해에도 많은 작품들을 실사화 했던 일본. 그 중 두 작품, <은혼>과 <도쿄 구울>을 통해 재미를 주는 성패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먼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과거 만화시장이 정부정책에 의해 큰 타격을 받고 쇠퇴하였다. 웹툰을 통해 부활하기 전까지 한국 영화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들이 주를 이루었다. 허나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손에 뽑을 정도다. 그 이유는 영화화함에 있어서 ‘왜 이 소설을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었을까?’를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가장 큰 힘은 문체다. 줄거리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는 문체가 독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영화가 원작의 힘을 빌리고 싶다면 문체가 지닌 ‘색’을 영상에 ‘투영’할 줄 알아야 한다. 만화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는 그림과 인물을 통해 분위기를 이야기한다. 소설의 문체가 만화의 작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차별화를 둘 수 있는 게 캐릭터다. 캐릭터는 작품의 분위기를 바꿔놓는다.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면 긴장감이 감돌고 어떤 캐릭터가 등장하면 분위기를 유하게 풀어준다. 영화가 만화를 실사화 할 때 생각할 점은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1. 작품의 분위기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 2. 만화의 캐릭터를 어떻게 실사화 할 것인가

<은혼>은 개인적으로 ‘참 모범적이다’ 싶을 만큼 원작의 영화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은혼>이라는 만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본 에도 시대 말기를 다룬 작품들이 우울한 시대상을 반영한 반면 <은혼>은 그 우울함에 B급 유머를 접목시킨다.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며 말장난이 판을 치고 저질개그가 매회 등장한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는 저급으로 포장된 작품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풍자’에 가깝다. 일본의 ‘힘’으로 상징되었던 무사(사무라이)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서구 문명과 기술은 ‘천인’이라는 외계종족으로 표현되며 그 속에서 무사의 힘과 자세를 잃지 않지만 화합을 꿈꾸는 해결사 일당의 모습은 넓은 의미의 공존을 표한다. 


이 작품을 영화화 한다면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나. 이 부분에 대해 감독 후쿠다 유이치는 기가 막힌 정답을 내놓는다. 만화를 그대로 화면에 옮긴 것이다. 저질 유머가 난무하며 온갖 패러디로 칠해놓는다. 어설픈 CG도 작품 속 인물들이 마치 남의 일이라는 듯 비난하며 분위기를 업 시킨다. 기존의 일본 만화 원작의 작품들이 어설픈 CG를 선보이며 웃음을 산 반면 이 작품은 ‘어차피 B급’을 표방하기에 그 어색함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점이 바로 캐릭터다. 영화는 작품 속 수많은 캐릭터들을 대부분 실사에 가져온다. 그리고 그들 하나하나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자극적인 개그를 남발한다. 이 자극적인 개그는 어색한 캐릭터들의 개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 대표적인 장면이 해결사 일생이 장수풍뎅이를 잡기 위해 숲에 갈 때이다.

이때 신센구미의 세 대장은 각자의 개성에 맞춰 장수풍뎅이를 잡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장면에서 곤도의 부끄러운 엉뚱함, 히지카타의 무신경한 마요네즈 덕질, 4차원 꽃미남 오키타의 독한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배우들은 만화 속 캐릭터를 그대로 묘사하기 위해 말투부터 행동, 표정 하나하나까지 캐릭터의 개성에 맞춘다. 오구리 슌은 달리는 자세부터 긴토키며 천연돌 카시모토 칸나는 코를 파고 교활한 웃음을 짓는다. 몇몇 분들은 이 글을 보고 이리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 <은혼>을 있는 그대로 영화화한 거잖아? 결국 원작을 그대로 따라 만들면 실사화에 성공한다는 소리네?’ 만약 이런 질문이 온다면 이리 답하고 싶다. 내용과 장면을 따라한다 하더라도 그 작품을 담아낼 수 없다. 성공의 열쇠는 그 작품을 ‘얼마나 입느냐’이다.


앞서 잘 만든 작품으로 뽑았던 <기생수>, <바람의 검심>과 <은혼>에는 차이가 있다. <바람의 검심>과 <기생수>는 스토리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두 만화의 경우 원작이 가지는 스토리 라인이 깔끔하다. 축 쳐지는 부분이 없으며 영화화하기 깔끔하다. 그래서 굳이 작품이 가진 색을 완전히 입지 않고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반면 <은혼>은 다르다. 이 작품이 극장판으로 만들어졌던 신역홍앵편을 택했기에 스토리는 깔끔했을지 모르지만 원작이 가진 유머와 캐릭터를 살릴 수 있었던 건 작품이 가진 색을 완벽하게 표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있는 그대로의 내용을 가져와 성공할 수 있다면 <도쿄 구울> 역시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을 것이다.

실사 영화 <도쿄 구울>은 카네키 켄이 구울이 된 순간부터 아몬 코타로와 처음 만난 지점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느 일본 만화 실사화와 같이 이 작품 역시 후속편에 대한 기대를 남기지 않고 끝을 맺는다. 작품은 충실하게 원작의 내용을 스크린으로 옮긴다. 한 화로 끝을 맺을 거면 굳이 등장시킬 필요가 없는 인물들까지 모두 등장시키면서 말이다. CG는 생각보다 어색함이 덜하며 전투에서 느껴지는 박진감은 여전하다. 그리고 하이라이트가 되는 마도/아몬과의 전투 장면에서의 감정의 소모도 정도를 맞추었다. 허나 이 작품이 가진 가장 큰 약점은 ‘왜 사람들이 만화 <도쿄 구울>에 열광했을까?’ 하는 그 포인트를 잡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도쿄 구울>은 ‘21세기 판 기생수’라고 생각될 정도로 서로 다른 종족의 ‘경계’에 선 이방의 존재가 느끼는 감정을 잘 묘사해냈다. 그가 느끼는 두려움, 공포, 질식할 것만 같은 외로움과 변화에 대한 염증은 별다른 전투 장면이나 갈등이 부족한 초반을 분위기만으로 긴장감 있게 이끌어 간다. 즉, 카네키 켄이라는 인물이 느끼는 상념이 작화에 그대로 묘사되어 관객들을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헌데 영화는 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고민 부족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니시오와의 만남이다. 니시오는 카네키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정체를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구울의 간악함과 나약함을 동시에 느끼게 만드는 인물이다. 헌데 영화는 이런 니시오라는 캐릭터를 카네키의 전투력을 보여주는 ‘첫번째 적’으로 전락시키고 만다. 

그저 완벽한 구울도 인간도 아닌 카네키 켄이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그 고민을 느끼라는 듯 감독은 주인공인 카네키 켄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역할을 극도로 제한시켜 버린다. ‘쟤는 카네키랑 싸우는 애’ ‘쟤는 카네키를 도와주는 애’ 등등 각각의 인물이 지닌 매력을 보여주기 보다는 행동으로만 인물의 역할을 나눈다. <도쿄 구울>의 매력은 작품의 에피소드, 그리고 인물 하나하나를 통해 인간과 구울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다. 단합이 잘 되는 스포츠 팀이 좋은 성적을 내듯 영화 역시 각각의 요소가 주제의식을 더욱 느끼게 만드는 ‘흐름’에 동화될 때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진다. 헌데 <도쿄 구울>은 스스로 그 지점을 포기하고 각각의 캐릭터에 제한된 역할만 부여하니 이야기의 폭이 좁아진 건 물론 작품이 지닌 주제의식마저 퇴색되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아몬 코타로를 공격하는 카네키 켄이 지닌 굴레나 로제라는 캐릭터의 특성인 ‘포식’이 부각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드러난다.


좋게 말하자면 지저분해 질 수 있었던 원작의 내용을 제한하고 쳐내면서 한회 분량으로 깔끔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한되고 쳐내면서 이 작품은 <도쿄 구울>이라는 타이틀이 필요 없는 판타지 액션 영화가 되어버렸다. 작품이 내포한 의미가 없으니 캐릭터와 스토리만 같은 작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앞서 말한 <진격의 거인>과 비슷한 고민이기도 하다. 내포한 주제의식이 크다 보니 이를 다 담아낼 자신은 없고, 캐릭터가 가진 개성을 드러내자니 이들을 하나로 뭉쳐 거대한 주제에 담아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오직 전개’에만 치중하고 마무리 지을 적당한 지점을 찾는데 몰두한다. 결국 <도쿄 구울>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음에도 불구 그 분위기를 가져오지 못했기에 재미를 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소설에서 작가의 문체는 작품의 분위기와 관련되어 있다. 만화에서는 작화가 이 역할을 대신한다. 허나 이 문체와 작화가 분위기를 내는 비결은 단순 그 자체에 있지만은 않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얼마나 담아냈느냐에 따라 그 분위기가 결정된다. 주제의식은 ‘정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직업은 정체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살아온 길, 그 길을 통해 성립된 성격, 그 성격으로 남을 대하는 태도가 당신이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이처럼 작품도 주제의식을 통한 이야기의 방향,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작화(혹은 문체), 이를 표현해내는 에피소드와 캐릭터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한다. <은혼>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지만 <도쿄 구울>은 그러지 못했다. 이것이 두 작품이 주는 재미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P.S. 글에는 재미라고 적었지만 재미는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쓴 글이고 개인이 느낀 재미에 따라 분석한 글이니 이 점 양해해 주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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