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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세상의 끝> - 12년과 하루

“인생엔 누가 뭐라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수없이 존재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수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 오랜 시간 끝에 

 내 발자취를 되짚어가기로 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기 위한 여정을,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감상적인 내레이션 후 아이로 보이는 두 손이 루이의 눈을 가린다. 그의 여정의 시작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허락하지 않을 못된 심보를 보이듯 집으로 돌아가는 그를 위해 절망적인 가정의 모습을 다룬 노래를 내보낸다. 영화는 처음부터 암시를 건다. 루이의 여정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의 눈을 가림으로 길을 잃게 만들고 절망적인 노래를 내보냄으로 희망을 꺼뜨린다. 이와 대비되듯 12년 만에 집을 찾아온 루이를 맞이하는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표정을 밝기만 하다.

원작에서 여동생 쉬잔과 남동생 앙투안은 계속 했던 말을 수정하는 등 작가로 유명한 루이에 대한 지적인 열등감, 그에게 얕잡아 보일 수 있다는 자격지심을 보인다. 쉬잔과 앙투안이 대화를 나누는 장에서는 장남 루이에 대한 섭섭함도 드러난다. 헌데 작품은 루이를 둘째로, 앙투안을 첫째로 설정했다. 또 루이가 동성애자라는 설정을 더했다. 왜 감독은 이런 설정을 더한 것일까. 이 집에서 처음 루이와의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는 앙투안의 아내 카트린이다. 이 장면에서 잠시 빈 공백이 등장한다. 대화가 멈추고 루이와 카트린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 장면. 카트린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기에 자신이 말을 하는 거라며 궁금해 하지도 않을 애들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앙투안의 조롱에 반박한다. 두 사람은 마치 따로 떨어진 섬처럼 느껴진다. 이 단절감이 두 사람 사이에는 동질감처럼 다가온다. 


루이가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말을 건 대상은 카트린이다. 카트린에게는 루이와의 추억이 없다. 그러하기에 그는 어색한 지인이 아닌 친밀한 타인인 카트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카트린은 이방인이다. 그녀는 이 가족들의 역사를 알지 못하며 루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루이는 탕아다. 그는 사회적인 성공은 이루었으나 가족에게는 짧은 엽서 몇 장으로 안부를 전한,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방탕한 탕아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을 관계를 중심으로 세 분류로 나눈다면 루이와 카트린은 한 부류로 묶일 수 있다. 그들은 가정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인물들이다. 이 가정의 중심, 지금 이 가족이 중심으로 삼고 있는 문제는 루이다. 이 루이에 대해 가장 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 두 사람은 쉬잔, 그리고 앙투안이다.

쉬잔은 외형으로, 앙투안은 내형으로 루이에 대한 감정(섭섭함, 울분 등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쉬잔의 방에 걸린 그림들, 그리고 그녀의 패션은 점잖은 글쟁이인 루이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그녀가 진정으로 오빠를 존경하고 잘 보이고 싶다면 신경 썼을 것이다. 방에 걸린 이상한 그림들을 치우고 단정한 옷을 입었을 것이다. 헌데 쉬잔은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오빠가 싫어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해 가감하게 드러낸다. 난 그녀가 반발 심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실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고, 엄마가 같이 에어로빅을 추자고 할 때 망설이는 이유는 루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그녀에게 루이에 대한 존경심과 경이로움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가장 내면의 공간인 방을 향할 때,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엽서에 적힌 짧은 글귀들을 말하며 섭섭함을 드러낸다. 그녀의 야성적인 외형은 루이에 대한 반발을 겉으로 드러내고 있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눈으로 보이는 모습을 통해 루이가 사라진 뒤 부정적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라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앙투안은 대놓고 루이에 대한 반감을 표한다. 뭐만 하면 가족, 그리고 루이를 조롱한다. 흔히 말하는 ‘죽빵을 치고 싶은 인물’이다. 헌데 필자는 앙투안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 그가 화를 내는 포인트를 생각해 보자. 이 영화에서 앙투안이 대놓고 화를 내는 부분이 두 장면 있다. 첫 번째는 담배를 사기 위해 차를 타고 가는 장면, 두 번째는 루이를 보내버리려는 결말부의 장면이다. 첫 번째 장면에서 앙투안은 계속 겉도는 대화를 하는 루이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가 온 목적에 대해 강하게 묻는다. 그는 ‘내가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남의 말을 듣기 싫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실일까? 아니다. 그는 듣고 싶어 했던 거다. 루이가 왜 왔는지, 왜 자신들을 떠났는지. 하지만 이유를 말하지 않는 루이에게, 12년을 내버렸으면서 계속 가족을 생각해 왔다는 식으로 말만 하는 루이에게 화가 났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감춘다. 그가 내뱉는 조롱이 섞인 말투는 진심을 말하지 않을 바에야 아무 말도 하지 말하는 암시와 같다. 그는 쉬잔의 외형이 내뿜는 섭섭함과 반항과는 결이 다른 내면적인 감정을 보인다. 그의 침묵과 조롱은 떠나간 시간에 대한 섭섭함, 진실을 말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반항이 담겨 있다.

마지막 식사 장면에서 루이는 가족들에게 사과한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러 오라 말한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루이와 앙투안, 그리고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루이의 손을 번갈아 보여준다. 시계는 죽음을 말해야만 하는 루이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함과 동시에 진실을 기다리는 앙투안의 인내의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루이가 진심으로 가족들에게 잘못을 호소할 때 앙투안은 조롱하지 않는다. 그는 기다렸던 것이다. 왜 루이가 돌아왔는지, 그가 어떤 진심을 토해낼지. 어쩌면 앙투안은 루이를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루이는 또 도망가 버린다. ‘저, 이제 가야만 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앙투안은 다시 돌변한다. 그의 섭섭함은 실망으로 바뀌고 기다림은 다시 증오를 낳는다. 여기서 결말을 이야기하기 전에 분류되지 않은 인물, 어머니에 대해 말해보자. 난 이 작품에서 어머니는 중재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루이와 앙투안, 어느 누구에게 쏠리는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돌아온 아들에게 왜 돌아왔는지 말하라 다그치지 않고, 과격하게 구는 아들에게 그만 하라며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중요한 말을 내뱉는다. 루이는 집을 떠난 이유에 대해 말하며 자신은 둘째라 책임감은 없어도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을 자르며 어머니는 답한다. 책임감은 누구에게나 있어야 되는 것이라고.


꼬마가 눈을 가렸다. 가족에 대한 절망적인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사랑을 나눴던 동성친구의 죽음을 들었다. 이 모든 건 가족을 내팽개친 루이의 책임감을 말한다. 그는 장님처럼 가족을 보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치 항구가 종착역이라도 되는 거처럼 집으로 돌아간다. 허나 노래는 ‘아니라’고 못 박아 버린다. 떠돌이 배에게 고향이 어디 있느냐며 말이다. 동성친구는 그가 고향에 두고 온 ‘사랑’이다. 이 사랑의 ‘상실’은 결국 그와 가족들이 이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결말을 앞두고 풀어갈 키워드 세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첫 번째는 ‘12년과 하루’ 두 번째는 ‘단지 세상의 끝’ 마지막은 ‘집 안을 날아다니는 새’이다. 첫 번째 키워드를 앞두고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앙투안이 없었다면 루이는 자신의 죽음을 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루이는 자신의 내레이션처럼 자신의 발자취를 되짚어 가기 위해, 죽음을 앞둔 여정을 시작하기 위해 ‘옛 집’으로 가자고 말한다. 앙투안의 반대가 아니더라도 가족들 중 누구라도 그를 데리고 옛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진실로 그 집에 가고 싶다면 말이다. 루이는 옛 추억을 대화하며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과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한다. 헌데 앙투안은 옛 집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려진 12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12년 동안 가족은 어떻게 지냈을까. 왜 루이는 집을 나간 걸까. 이 지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존재다. 루이는 동성을 탐했는데 이 사실을 어머니와 여동생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헌데 아버지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엄격한 아버지는 절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루이에게 아버지는 질서요, 가정의 기둥이자 벽이다. 이 벽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느니 자유롭게 날아가는 한 마리의 새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집에는 또 다른 아버지인 앙투안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그는 이 또 다른 아버지 때문에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루이가 없는 세월이다. 어머니는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루이의 아버지가 언제 생을 마감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 시점이 비교적 이른 시점이었다면 가정을 이끈 건 어머니, 그리고 앙투안이었을 것이다. 유명 작가인 루이와 달리 앙투안은 공장에서 일을 한다. 집을 나간 루이는 오히려 부와 명성을 얻었고, 집을 지킨 앙투안은 더 큰 것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앙투안에게 12년은 고통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묶여 있는 자신과는 다르게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루이, 그런 루이를 우러러 보는 여동생, 그리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어머니. 집을 지키는 건 자신인데, 가정을 책임진 건 자신인데 그의 존재는 점점 작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감정이 루이의 등장으로 폭발했다는 게 내 추론이다. 앙투안은 ‘오빠가 모두 망쳤어!’라고 말하는 쉬잔에게 화를 내며 ‘모든 게 내 탓이지? 다 내가 망친 거지?’ 라며 화를 낸다. 그는 여겼을 것이다. 난 겨우 하루를 망쳤을 뿐인데, 지난 12년을 망친 건 루이인데 그 하루의 복수조차 나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그래서 뒤돌아 선 앙투안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중립적인 존재인 어머니는 가장 먼저 앙투안의 아픔을 캐치하고 그를 데리고 나간다. 그녀에게는 떠나갈 아들의 고통보다 서러움을 품고 살아간 아들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진 것이다. 그리고 루이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있는 쉬잔이 다음으로 자리를 뜬다. 마지막까지 루이의 곁에 남은 건 그와 가장 동질 된 카트린이다. 루이가 떠나기 전, 햇살이 한 가득 방을 비추는데 이는 해가 지기 전의 하늘을 보여준다. 해가 진다는 건 하루가 끝난다는 의미, 결국 이 작품의 제목인 ‘단지 세상의 끝’과 연결된다. 작품에서 제목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장면이 있다. 루이는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냐는 앙투안에게 ‘여기가 단지 세상의 끝은 아니잖아’라고 답한다. 자신과의 대화를 거절하는 앙투안, 이어지지 않는 가족들에 대한 자신만의 한스러운 표현이다.


감독은 이런 루이에게 훈계하듯 ‘정말’ 가족을 세상의 끝으로 만들어 버린다. 루이는 생각했다. 자신의 여정의 발자취의 시작을 가족으로 하기로 말이다. 그에게는 시작이 가족이요, 끝이 죽음이었다. 이렇게 설계한 여정은 첫 단계에서 암초를 만난다. 시작이라 여겼던 가족이 세상의 끝처럼 ‘단절’로 다가온 것이다. 루이는 가족 앞에서 죽음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데 필자는 그 이유가 ‘죽음’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정말 끝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카트린에게 동질감을 느낄 만큼 가족들에게 거리감을 느낀다. 아픔도 사랑이 있어야 줄 수 있다. 내 아픔을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아픔을 꺼낸다. 헌데 가족은 그런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루이는 다시 떠난다. 12년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었고 그는 무책임했다.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가야만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음을 그는 느낀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한 순간, 가족은 정말 ‘세상의 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마지막 새 장면의 의미는 세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계 속 새가 튀어나와 집 안을 돌아다니며 벽에 부딪히다 바닥에 떨어지는 장면. 첫 번째는 루이의 자유로움이다. 루이는 집을 떠나고 새가 되어 펄펄 날아 유명작가가 되었다. 반면 집에 남은 쉬잔과 앙투안은 변변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 새장에 갇힌 새는 그 안에서 나는 법을 잊은 채 죽을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이 집을 떠나지 못했다면 그는 집에 갇혀버린 쉬잔과 앙투안처럼 이곳에 갇혀 마지막을 지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결국 이 집이 세상의 끝이라는 점이다. 새가 루이를 상징한다면 집은 가족을 의미한다. 그는 가족들에게 치이고 치여 결국 자신의 뜻한 바(새에게는 집밖으로 나가는 자유, 루이에게는 자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를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세 번째는 결국 뚫어내지 못한 내면의 아픔이다.

작품은 쉬잔과 앙투안, 그리고 어머니가 품었을 아픔과 섭섭함을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이들 때문에 단 하루 동안 루이가 받았을 아픔 역시 조명한다. 가족들은 12년의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아픔을 받은 루이 역시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내면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어도 하지 못하게, 그 이야기를 하면 그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 상처가 또 자신을 향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게 한다. 루이가 새라면 집은 그의 내면을 상징한다고 본다. 이 내면을 뚫고 나아가 여정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답답함. 루이는 12년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이 답답한 벽을 뚫어내기 위해 애썼으나 차마 그러지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인생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거처럼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엮일 수 없는 이유도 존재한다. 루이는 인생의 주인공이 나라는 환상을 보여주기 위해 여정을 시작했으나 환상은 환상에 머무르듯 가족이라는 현실 앞에서 끝나버렸다. 마치 여기가 세상의 끝이라는 듯이. 


p.s. 자비에 돌란 감독이 루이의 캐릭터에 자신을 입혀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원작에서 느꼈던 색깔과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더 보고 든 생각이...... 처음 글에서 정말 오류가 많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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