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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보다는 원인에 열을 올리는 입체적인 영화

아카데미 화제작 <쓰리 빌보드>

요즘은 인터넷에서 본 사실로 기사를 쓰기가 힘들다. 하루가 지나면 전혀 다른 사실이 등장하는가 하면 기존의 시점을 뒤집는 새로운 시점이 여론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은 얽히고설킨 관계가 복잡하다. 살인사건을 예로 들면 반성하는 가해자나 사형당하는 장면을 본 사람은 사형 반대론자가 되는 반면 살해당한 현장을 보거나 피해자 가족들을 만난 사람은 사형 찬성론자가 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도 나보다 더 친한 사람 말을 믿고 그 사람 쪽으로 의견이 기울기 마련이다. 사건이라는 건 하나의 케이스로 귀결되지만 그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른 모습을 지닌 인물들과 입장이 등장한다. <쓰리 빌보드>는 ‘딸이 살해당한 엄마의 분노’라는 구절로 추측할 수 있는 모든 상상을 입체적으로 다룬다. 

                                                                                                                                              


* 피해자의 엄마 / 가해자


영화의 시작, 밀드레드는 돈을 들고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 담당자를 찾아간다. 그녀는 이 광고판에 세 개의 문구를 올린다. “내 딸이 죽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 서장?”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상상할 것이다. ‘아, 피해자 엄마와 경찰의 대립, 그리고 결국 범인을 잡는 이야기로 흘러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희석된 건 밀드레드가 딸을 회상하고 그녀의 남편 찰리와 만나는 순간이다. 피해자는 약하다, 피해자는 불쌍하다, 피해자는 억울하다 라는 인식은 ‘피해자는 무조건 착하고 진실만을 말한다.’라는 편견을 가지게 만든다. 밀드레드와 그녀의 딸은 거칠다. 딸이 거칠어진 건 집안 환경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 밀드레드는 자신들에게 온화한 어머니가 아니다. 그렇다고 강인하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도 뭐하다. 강인하되 거칠다. 딸이 욕을 하면 같이 욕을 퍼붓는다. 자신의 차에 음료수를 집어 던진 학생들의 성기를 걷어찬다. 그리고 그 거친 입담은 남에게도 마찬가지다.


찰리와 만나는 순간도 그렇다. 찰리는 어린 여자와 함께 다니지만 그 여자는 정말 멍청하다.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형편없는 말만 내뱉는다. 찰리는 덜떨어진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선택하고 가정을 꾸린 이가 밀드레드다. 밀드레드의 삶은 하류층의 삶이다. 우리는 계층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고 규정 짓지 말라고 배운다. 하지만 유럽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미 그들은 계층에 대해 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 계층에 따른 바뀌지 않는 매너에 좌절하기도 한다. 거친 하류층의 여인이 택할 수 있는 방법, 자신의 딸의 수사를 대충 끝냈다 여겨지는 경찰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개의 광고판이다. 그녀는 거칠게, 그리고 독하게 경찰을 물어뜯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가해자가 되고 만다.


밀드레드가 가해자가 되는 과정에서 동정이나 연민은 느낄 수 없다. 그녀는 거칠게 살아왔고 소위 말하는 교양 있거나 순수하다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딸의 죽음에 대해 ‘빨리 범인을 잡아와라!’라고 경찰을 다그치는 좋게 말하자면 강인한 엄마, 나쁘게 말하자면 진상 피해자 유족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밀드레드에 대한 설명은 다른 인물들을 통해 조금씩 더 하도록 하겠다.



* 절대 권력 경찰서장 / 시한부 인생


밀드레드의 화살이 향하는 경찰서장 월러비는 이 마을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이이다. 미국은 경찰에 노조가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경찰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든다고 하자 그들이 타란티노가 하는 모든 작업에 파업을 선언한 것은(예를 들면 교통통제 같은) 유명하다. 노조의 형성은 집단의 결속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도 백인으로 이뤄진 마을의 경찰들은 자신들끼리의 유대감이 강하다. 그리고 밀드레드는 그들이 흑인들이나 괴롭힐 뿐 자신의 딸의 범인을 잡는 데에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분노를 토해낸다. 헌데 특이하게도 월러비는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경찰서장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체를 숨긴 채 뒤에서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인물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앞서 밀드레드의 성격에 대해 설명했을 것이다. 그녀는 결코 ‘순진한 피해자 유족’이라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월러비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닌 인물이다. 그의 막강함은 밀드레드에게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사정없이 들이박는다. 강한 권력을 상대할 때처럼 상대의 내구성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계란으로 바위 친다는 생각으로 들이박고 본다. 그런데 월러비는 자신이 처한 시한부 인생처럼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지만 속은 연약한 인물이다. 그는 남을 돌볼 줄 알고 용기를 북돋아줄 줄 아는 인물이다.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월러비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비판과 밀드레드의 딸의 살인범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이런 월러비의 캐릭터는 밀드레드가 가진 양면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는 강력한 권력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밀드레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시한부’ 그리고 ‘존경받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더해진 순간, 밀드레드의 캐릭터는 변화를 맞이한다.



* 양아치 경찰 / 꿋꿋한 가장


월러비의 부하인 딕슨은 밀드레드의 주장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라는 걸 보여주는 캐릭터다. 앞서 우리는 월러비 경찰 서장이 착하다는 점 때문에 밀드레드가 억지를 부리고 이 억지에 착한 경찰인 월러비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의 성품과 리더십은 다른 영역의 이야기다. 개인이 착하다고 그 개인이 이끄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모두 착하다고 볼 수 없다. 딕슨은 이 마을의 경찰들이 얼마나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들은 그들 사이의 유대감은 강하나 경찰이 지켜야할 사명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딕슨이 광고판을 관리하는 레드 웰비를 폭행하는 장면이다.


딕슨은 거칠게 레드 웰비를 폭행하지만 이 폭력 경찰관을 제지하거나 위협을 주는 동료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딕슨의 슬픔만을 받아들이며 이 슬픔 때문에 휘두르는 만행에는 눈을 감는다. 월러비는 집단으로는 결속력이 좋은 집단을 만들었으나 유능함과 사명감에 있어서는 부족한 무리들을 이끌었다. 그러니 밀드레드의 태도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헌데 딕슨은 완전한 양아치는 아니다. 그가 껄렁한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를 홀로 돌보아야 한다는 가장의 스트레스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지게 된 딕슨은 거칠고 더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월러비의 편지 한 장에 마음이 바뀌게 된 건 그의 내면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대체 누구 편이니? 태도 바꾸기의 고수, 언론


이런 동전 같은 양면성을 지닌 인물들, 그리고 사건을 향한 여론을 보여주는 존재가 언론이다. 이런 기자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여론 조성은 자기들이 다 해놓고 새로운 정보가 나와 상황이 뒤바뀌자 모든 책임을 비난을 가한 네티즌들에게 돌리는 기자 말이다. 언론은 마치 붕어처럼 자신들이 보도한 내용도 잊어버린 채 다른 말을 내뱉는다. 사건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당장 나오는 소식만 전달하다 보니 그때마다 여론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처음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에서 세 줄의 광고가 실렸을 때 언론은 딸을 잃은 어머니인 밀드레드의 분노에 주목하고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서장 월러비에게 비난의 화살을 쏜다. 허나 월러비가 자살한 후, 그에 대한 책임자로 밀드레드가 거론되자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을 찍으면서 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한다. 이 세 개의 광고판이 존경받는 경찰 서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사건을 바라볼 때 ‘범인’과 ‘피해자’에만 집중할 뿐 그들이 지닌 하나하나의 이야기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 쉽게 피해자와 가해자를 규정하고 피해자에게는 동정을 가해자에게는 비난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런 여론을 주도하는 이들이 언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건은 확실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법정사건을 다룬 인터넷 기사 하나에도 ‘법원에서 판결이 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는 이유가 언론 플레이 속에는 단순 여론을 호도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모든 증거들이 등장하고 진실을 가리는 법정만이 모든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최종판결과 끝까지 등장할 증거를 다 보고 사건을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은 마치 앵무새처럼 지금 당장 내뱉는 말을 따라 적는다. 그리고 사건의 본질을 벗어나는 여론 형성에만 열을 올린다.

                                                                                                                                                            


* 범인보다는 원인에 열을 올린 범죄 스릴러


<쓰리 빌보드>의 장르에는 특이점이 하나 있다. 바로 ‘코미디’다. 영화가 웃기냐고? 아니다. 웃기기보다는 슬프다. 블랙코미디는 코미디의 일종이므로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인간과 세계의 모순성,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역설적인 유머를 사용한다. 풍자와 희화화, 패러디 등을 통해 웃음을 끌어내므로 밝고 쾌활한 웃음보다는 씁쓸한 웃음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범인을 잡아내는 범죄 스릴러의 쾌감보다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사건의 원인이 되는 세 개의 빌보드 광고판을 통해 이들 사이의 모순성과 부조리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권선징악 또는 범인을 찾는 흥미로운 과정과 반전을 다룬 기존의 범죄 스릴러 작품과는 결이 다르기에 생소한 느낌이 강하다.


한 1시간 정도는 ‘왜 이렇게 진행이 심심하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장르적인 쾌감을 주는 범인잡기 보다는 사건의 원인을 통한 삶의 모순성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범죄 영화를 기대하는 분들이라면 실망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뚜렷해지는 캐릭터의 색깔과 그들 사이의 관계, 사건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점, 관계를 통한 상처와 회복 등을 경험하고 나면 왜 이 작품이 올해 가장 강력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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