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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 - 충돌과 모순 속에서 발견한 성장

조용필의 노래 중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의 가사 중 ‘소중한 건 곁에 있다고 먼 길 떠나려는 사람에게 말했으면’ 이라는 구절을 참 좋아한다. 이상과 꿈을 품고 살아가는 건 좋다. 하지만 이를 위해 주변의 가치를 폄하하는 생각은 좋지 못하다. 학창시절, 꿈이 많고 정감이 넘치는 나이. 이때 아이들은 흔히 오해한다. 자신에게 사랑을 주는 주변을 흔한 것, 가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쿨병에 걸린 허세를 독특하고 특별한 것이라 여긴다. <레이디 버드>는 ‘레이디 버드’라는 가명을 쓰는 크리스틴이라는 여학생을 통해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학생은 충돌 지점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학교와 가정은 정적이다. 변화가 적고 현재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크다. 특히 크리스틴이 진학한 신학교의 경우 그런 정적인 느낌이 더 강하다. 반면 학생들은 동적이다. 자신들의 열정과 정열을 불태우고 소비할 방법을 찾는다. 크리스틴은 동적이다.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그녀에게 학교, 그리고 가정과의 충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충돌은 공존과는 달리 양쪽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쪽의 가치를 폄하하고 훼손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생들은 우리를 몰라’라고 말하는 학생이나 ‘요즘 학생들은 엉망이야’라고 말하는 선생들을 보라. 그들은 서로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강하게 서로에게 부딪힌다.


충돌이 작품의 에피소드 형성을 위한 장치라면 모순은 영화의 핵심적인 감정을 설명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디 버드는 요즘 페미니즘 운동에 한창 열을 올리는 이들이 보기에 참 이상적이며 세련된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시골 새크라멘토를 떠나 세련된 뉴욕에서의 삶을 꿈꾸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매이는 행동 따윈 하지 않는다. 또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이름 지을 만큼 주체적이고 당찬 모습을 보인다. 헌데 ‘레이디 버드’라는 스스로에게 준 이름, 이 자체에도 모순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는 자유를 상징한다. 크리스틴이 학교, 종교적 생활, 가정이라는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겠다는 열망을 드러낸다. 헌데 이 새 앞에 붙은 여성이라는 단어는 주체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준다. 얼마 전 페미들은 ‘여배우’ 등의 언어에 불만을 토해낸 적이 있다. 왜 여성은 따로 표기를 해야 되냐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뉴욕에 있는 대학에 보내달라며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그 패기가 이 단어를 설명하기 효과적인 장면이다. 학생회장 선거에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출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이상한 점이 있다. 크리스틴은 ‘어차피 떨어질 거 이 이름으로 출마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한다. 영화 <추적자>에서 김상중은 진짜 어른에 대해 이리 정의한다. ‘하기 싫은 일도 할 줄 아는 게’ 진짜 어른이라고 말이다. 만약 이 영화가 주체적인 여성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크리스틴은 꿋꿋해야 한다. 그녀에게는 고난과 역경이 닥치며 이를 이겨낼 줄 아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헌데 크리스틴이라는 캐릭터 자체에는 그런 힘이 없다.


그녀는 주체적이고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나 그 단계가 딱 학창시절, 허세에 빠져 잘못된 길에 접어든 수준에 머무른다. <언 에듀케이션>의 모범생 제니가 유부남 사기꾼 데이빗에게 빠지듯이 학생이라는 짐을 벗어버리고 싶은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가 제나 그리고 카일에게 빠지는 단계가 그렇다. 제나는 쿨병이라는 좋은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미 없는 여자아이다. 학생들이 해보지 않았을 불량스러운 경험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그 아이는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크리스틴에게 우상처럼 느껴진다. 카일은 어떤가. 잘난 얼굴 빼면 망상병 환자에 허세에 찬 머저리다. 크리스틴은 주체적이고 당찬 인물이라기 보다는 남들과 다름을 추구하는 그 나이대의 허세와 특별함을 갈구하는 여자아이처럼 보인다.

작품은 이 경계, 크리스틴이 가진 특별함과 전형성을 경계 없이 보여준다. 성장이라는 게 그렇다. 항상 옳은 방향, 영웅처럼 곧은 방향으로만 뻗어나갈 수 없다. 나무가 일직선으로만 자랄 수 없듯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이 지점을 간과한다면 <레이디 버드>는 그 어떤 반전영화보다 큰 충격을 주는 작품으로 다가올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를 생각했던 영화가 <언 에듀케이션>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이 떠올랐던 영화가 두 편 있었다. <브루클린>과 <페이퍼 타운>이다. <레이디 버드>는 <브루클린>처럼 인생의 한 ‘순간’을 다룬 작품이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실하게 모를 때가 있다. 이미 <브루클린>에서 한 번 이런 캐릭터를 연기한 적 있는 시얼샤 로넌은 <레이디 버드>를 통해 다시 한 번 경계에 선 인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페이퍼 타운>은 ‘레이디 버드’가 택한 결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시점, 어느 순간에 특별하다 인식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때론 그 사람 또는 집단에 빠져 자신의 주변을 하찮거나 가치 없게 여기기도 한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에 콩깍지가 있듯 특별함에도 콩깍지가 있다. 오히려 가장 특별한 건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레이디 버드>를 이 두 작품의 결합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 영화는 충돌과 모순, 일상에서 누구나 겪는 두 지점을 통해 성장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성장은 어느 한 지점만을 잡아 이야기하기 힘들다. 각자의 성장에 핵심적인 키워드는 있겠지만 그 키워드가 어떠한 충돌과 모순 없이 온전하다고는 말하기 힘들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허세에 빠진 중2병 여자아이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페미니즘의 배신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에는 정답보다 감정이 있는 거처럼 인물들이 느끼는 그 감정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삶에 빠져드는 공감의 호수에 몸을 뉘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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