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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녀> - 미소를 품은 소공녀처럼 살아가자


15년의 앨리스, 18년엔 소공녀
  
‘앨리스’ 수남은 학창시절 엘리트였다. 주판, 타자 등 여러 가지 대회에서 상을 받고 자격증을 취득했다. 허나 컴퓨터를 배우지 못해 취업을 하지 못한다. 수남에게 세상이란 남들 말처럼 열심히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늪에 빠지는 공간이다. 80~90년대 대한민국은 취업하기 쉬운 국가였다. 대학을 나오면 웬만한 기업에 들어갈 수 있었고 돈을 모으면 내 집 마련은 힘들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지금 2030세대의 부모들은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모토를 지니고 있다. 허나 달라진 세상에 빠진 이들은 허우적거린다. 분명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고 했는데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수령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기존에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에 빠져 당혹과 곤경을 호소하는 앨리스. 차이라면 동화 속 앨리스에게는 탈출할 수 있는 문이 있지만 현실에는 없다는 것이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이후 3년, 미소는 ‘소공녀’이다. 더 이상 젊은 세대들은 이상한 나라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현실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매스컴이 떠들어 대며 sns의 발달로 정보의 습득이 빠르다. 그래서 이들은 ‘예정된 가난’에 당황해 하지 않는다. 대신 ‘소공녀’처럼 살기를 꿈꾼다. 소공녀 새라 크루는 아버지의 죽음 후 학교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허나 그녀는 신분이 누추해졌다고 자신의 존엄성마저 누추해졌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없는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고 특유의 상상력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 보다는 동화처럼 생각한다. 그래, 그녀는 품위를 잃지 않는다. 현대의 젊은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미소는 말한다. 나는 생각과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미소와 다섯 친구들
  
미소는 고아이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그만 둔 그녀는 가사도우미로 일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다포세대처럼 이것저것 포기할 거 같은 그녀지만 담배도, 위스키도, 남자친구 한솔도 잘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헌데 새해 첫날부터 담배 값이 오른다. 뒤이어 방세도 오르면서 미소는 고민에 빠진다. 이제 무언가 포기할 시점이 온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집을 포기한다. 어차피 백날 모아도 못 모을 집값, 차라리 여행이나 다니자 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다섯 명의 친구를 만난다. 이 친구들은 대학 시절, 그녀가 활동했던 밴드에서 만났던 이들이다. 
  
첫 번째 친구는 좋은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다섯 명의 친구 중 이 친구의 집에서 미소는 하룻밤도 머물지 못한다. 분명 그녀는 다섯 명의 친구 중 가장 상황도 좋아 보이고 고민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온전한 자신 만의 시간이 없다. 쉬는 시간에는 수액을 맞으며 점심시간에 상사에게 연락이 온다. 최근 직장 문화가 많이 변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중소기업들은 사원과 기업을 하나로 인식하며 회사를 위해서는 사원들이 헌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을 생각해 보라. 쉬는 날이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잠을 청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사람에겐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첫 번째 친구는 이를 보장 받고 싶었고 결국 미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두 번째 친구는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달고 살아가는 친구다. 연애의 실전은 결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순간이다. 운명 공동체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더 좋은 거, 더 즐거운 것만 서로 만났을 때 누리길 원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들은 연인이 아닌 가족으로 묶이게 된다. 현대사회에서는 가난도 유전이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그 가난을 고스란히 껴안아야 된다. 문제는 이 집의 가난을 대하는 태도다. 가족이 다 같이 힘을 합쳐 으싸으싸 하자는 자세가 아니다. 남편은 아직 공부 중이고 아내는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한다. 시부모는 이제 자기들 할 일은 다 끝났다는 자세고 노후를 위해 아들이 공부에 전념, 좋은 직장을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뒷바라지는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미소가 엉덩이를 들이 밀겠는가. 
 


세 번째 친구는 결혼 8개월 만에 여자가 집을 나가 외롭게 살고 있다. 마음이 여린 이 친구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는 아내의 성화 때문에 월 100이 대출금으로 나간다. 그는 미소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으나 대처하는 자세가 다르다. 친구는 그 무게감에 짓눌러 고통스러워한다. 반면 미소는 그 문제들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는다. 태생부터 가진 게 적어서 그런 걸까? 그녀는 다락방에서도 꿈을 꾸었던 새라 크루처럼 집이 없는 현실을 여행으로 섹스할 공간 하나 없는 남자친구와의 처지를 따뜻해지면 사랑을 나누는 거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다. 이 마음 여린 친구가 사랑을 위해 집을 샀고 그 대출금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과 다르게.
  
네 번째 친구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캥거루족이다. 엄마, 아빠가 결혼까지 걱정해야 하는. 놀랍게도 그들은 집으로 찾아온 미소를 신부감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미소라는 캐릭터를 한 번 살펴보자. 그녀는 예전으로 따지면 일등 신부감이다. 요리 잘하지, 청소 잘하지, 여기에 참을성 좋고 예의도 바르지. 만약 이 영화가 80~90년대 영화였다면 이 집 없는 여인은 자신을 받아준다는 남자와 동거하고 결혼까지 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남자고 여자고 조금 벌어도 인간된 삶을 꿈꾸는 시대가 요즘 아닌가. 욜로 라이프의 시작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사는 인생, 자신이 원하는 삶의 그림을 그려 보자. 이 과정에서 돈이라는 건 부수적인 가치로 여겨진다. 미소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안정감이란 단 세 가지에서만 비롯된다. 담배, 위스키, 한솔. 나머지는 오히려 너무 만족스러우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든다.
  
다섯 번째 친구는 어찌 보면 앞서 본 네 인물보다 더 불쌍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 주체에 본인은 없다. 그녀는 70~80년대 어머니 세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여성은 없고 엄마만 있다. 애를 돌보는 걸 기쁨으로 알아야 하며 남편을 하늘과 같이 섬겨야 한다. 마치 연금술처럼 부를 줄 테니 네 생각과 취향을 가져다 바쳐라 같다. 미소가 이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 건 그녀의 마음에 남는 공간이 아예 없어서다. 앞서 몇몇 사람들은 미소와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충돌할 수 있는 지점들이 있었다. 헌데 다섯 번째 친구는 그럴 틈이 없다. 그녀에게는 남편 그리고 아내에게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그 의무에 미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순간, 미소는 손님이 아닌 남처럼 이 집에 머무른다.
 


미소의 세계
  
다섯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영화는 미소의 세계와 현실과의 충돌을 보여준다. 사실 미소는 부족할 게 없는 여자다. 중퇴지만 대학을 나왔고 요리와 청소를 뛰어나게 잘한다. 인내심이 강하고 남을 포용할 줄 알며 마음이 따뜻하다. 헌데 그녀에게는 돈이 없다. 이전까지 미소에게 돈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미소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대로 삶을 꾸려 나갔으니 말이다. 문제는 그녀의 세계는 가만히 있는데 현실이 자꾸 요동친다는 점이다. 이 요동친 세계는 그녀를 자꾸 현실로 잡아당긴다. 모든 이들이 욜로 라이프를 꿈꾸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물가가 오르고 직장이 정리해고에 들어가면 계획했던 삶의 형태가 으스러진다. 그리고 좀 더 열심히, 그러니까 기성세대가 말하는 취향과 생각 따위는 버리고 돈만 찾으라는 말이 진실처럼 느껴진다.
  
미소에게도 이 순간이 다가온다. 그녀가 아닌 한솔이 현실을 깨우친 순간이다. 결혼이라는 현실 때문에 생각과 취향을 포기한 친구들처럼 한솔 역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포기하려 든다. 이 순간, 미소의 취향 중 하나가 사라지고 만다. 자신의 세계에서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 세계에 의문을 가지기 마련이다. 내가 꿈꾸는 세상이 과연 옳은 걸까. 이 세상은 현실과 타협을 볼 수 없는 세상이 아닌가 하고. 이는 미소가 여행을 떠나는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그녀에게 집을 옮겨 다니며 잠을 청하는 여행은 처절하고 염치없는 빌붙기가 아니다. 과거 그녀가 친구들을 본인의 자취방에서 재워줬듯 그저 하룻밤 신세지는 행위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사고는 ‘돈도 없는 게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신다.’는 말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영화가 보여준 품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았던 동화 속 소공녀처럼 미소 역시 자신의 품격인 미소를 잃지 않는다그녀는 몸 파는 일을 하다 아이를 임신한 고용주 민지에게 멸시나 조롱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앞서 다섯 번의 여행을 통해 그런 마음을 가질 법도 하건만 그녀는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봐 준다시작부터 미소는 말한다사람은 누구나 생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는 법이라고미소는 존중할 줄 아는 여자다그녀에게 미래는 없을지언정 생각이 있고 돈은 없을지언정 취향이 있다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이상적인 여자가 미소이다.
  
그녀의 이런 품격이 돋보이는 건 현대인들의 교만함과 나약함을 꼬집기 보다는 따뜻하게 바라봐 주기 때문이다이런 경험들 있을 것이다학창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데 졸업하고 나니 연락이 되질 않는다닿았다 하더라도 만나면 현실적인 조언이랍시고 온갖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너는 현실감각이 없다!’고 나름 일침을 놓는다헌데 막상 이 친구도 그리 자랑할 만한 직장에 다니고 있지는 않다조금이라도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조금이라도 잘 사는 걸 티내고 싶어 하는 교만함힘든 처지를 이겨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못하면 남을 비꼬고 꼬집는 나약함을 현대인들은 쿨하다이성적이다 라는 글자로 포장한다그리고 조소와 조롱을 달고 살아간다미소도 그럴 수 있었다그녀는 민지에게 돈만 쫓다 자신을 더럽힌 여자라며 멸시가 담긴 시선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그 대신 그녀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인다
  
필자는 현대인들이 가져야 될 품격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더 이상 현대인들은 앨리스인척 할 수 없다현실이 이럴 줄 몰랐다며 개탄하고 불평만 내뱉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소리다이상한 나라인 줄 모르고 토끼인 부모를 따라왔다 이리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세상이 변한지그리고 속살을 드러낸 지 너무 오래 되었다전고운 감독은 현상만을 보여주었던 이전의 작품들과는 달리 해결책을 제시한다그 해결책은 오래 전 보았던 동화에 있다가난을 핑계로삶의 무게를 핑계로 남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인간이 되지 말자다락방에서 살더라도 품위를 잃지 않는하녀 베키와 쥐 멜키세덱에게도 친절하고 온화했던 소공녀가 되자고 말하고 있다각자의 꿈은 개개인의 세계를 이룬다현대인들은 자신의 세계가 아닌 현실이라는 세계에 자신을 껴맞추려고 노력한다이 과정에서 본인이 가진 취향과 생각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조롱과 멸시를 품는다각자의 세상을 가져라그 세계에서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라취향과 생각을 잃지 않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가영화는 그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2015,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열심히 살아도 성공할 수 없는늪과 같은 현실을 조명했다. 2018, <소공녀>는 이런 현실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여인을 통해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물론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 아니다.그러기에 필자의 결말에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내일을 위한 시간>이 한 개인의 불행을 통해 노동자 전체가 품어야 할 품격에 대해 이야기했듯 <소공녀역시 가난한 한 여인을 통해 인간이 잃지 말아야 될 생각과 취향버려야 될 조롱과 멸시에 대해 이야기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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