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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네이키드 키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外

현실은 영화보다 잔혹하고 지독하다. 영화를 보다 보면 표현이 과하다, 개연성이 없다 라고 평가 받는 영화들이 있다. 또 인종이나 도덕성 문제에 있어 지적을 받는 작품들이 있곤 하다. 2년 전에 시나리오 수업을 듣던 중 교수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솔직히 너희들 시나리오 보고 현실성이 없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고. 요즘 뉴스를 보면 말도 안 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국정농단 사건) 어찌 현실보다 축소된 이야기를 가지고 현실성 없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영화는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관객을 위해 숨 쉴 구멍을 뚫어놔야 되고 인물에게 지나치게 가혹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탈출할 구멍이 없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해도 영화는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기 위해 그래선 안 된다. 어쩌면 영화는 현실을 너무 아름답게 그려낸 허황된 예술일지도 모른다.



영화 <감기>가 개봉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당시 이 영화는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가장 큰 이유는 국가가 전염병을 이유로 국민들을 가두고 학살하는 전개가 개연성이 없다는 게 컸다. 지나친 자극과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감독이 오바를 했다는 말이다. 헌데 메르스 사태가 터졌을 때 국가가 보여준 대처는 이 영화가 떠오르게 만들었다. 국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는데 정보를 감추고 제대로 된 방역 조치를 취하지 않으며 심지어 국가의 강압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발생하였다. 메르스 사태는 <감기>를 과장되었다 말한 이들을 뻘쭘하게 만들 만큼 현실이 더 엉망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수라> 역시 그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비리 경찰과 부패 시장의 결탁, 이를 잡으려는 검사의 간악함을 보여주는 영화다. 인물들 사이에는 신뢰도, 로망도, 의리도, 정도 없다. 한도경은 아픈 아내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고 시장 박성배는 무슨 야망이 그리 큰지 끝없이 쳐 먹으려고 든다. 박성배를 잡으려는 검사 김차인은 정의의 편임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사 방법에 염증이 들 정도다. 



정치인은 그놈이 그놈이며 누굴 뽑아도 똑같다고 하지만 불행히도 그 똑같은 놈들을 뽑아 피해를 보는 건 국민들이다. 정치권이 자기들끼리 결탁하면 부당한 죽음에 대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고 정권을 바꾸려는 행동을 막을 수 있다. 멕시코를 예로 들자면 2018년 7월 총선거를 앞두고 후보자 110명이 죽음을 당하면서 4~5일 사이로 정치인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마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카르텔이 정치권과 결탁하면서 그들의 부정과 부패를 지켜내기 위해 사람 목숨 따위는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엘리트 스쿼드>가 보여준 부패한 경찰들의 모습은 애교처럼 보일 수준이다. 브라질의 경우 여느 남미국가가 그러하듯 정치권의 부패와 공권력의 타락이 심각한 나라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경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증오하고 경멸한다. 좋은 경찰이 되길 꿈꾸는 청년 마티아스는 이런 현실에 좌절한다. 법대생으로 위장해 대학에 침투한 그는 한 수업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들을 내뱉자 당황한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경찰 선배들은 학생들의 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교황이 브라질 슬럼가 역의 한 호텔에 묵기를 고집하면서 그 일대 갱들을 청소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웃긴 건 그들의 치안 상태다. 분대장은 특수 부대를 꾸려서 갱을 청소해야 할 만큼 평상시 브라질의 치안은 엉망이다. 이들은 어떻게든 6개월 안에 지역 갱들을 소탕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한 첩보 작전을 진행하고 과도한 훈련으로 지원자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이 스피디하고 익스트림한 영화의 이면에는 썩을 만큼 썩은, 그래서 특별한 대청소를 하지 않으면 지워지지 않을 브라질의 오염된 현실이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위의 작품들이 현실을 축소시킨 영화들이라면 다음에 소개할 작품은 현실의 숨기고 싶은 진실을 꼬집는 영화라 할 수 있다. <네이키드 키스>의 오프닝은 충격 그 자체다. 대머리의 여자가 한 남자를 폭행하는 장면을 얻어터지는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여 보여준다. 켈리는 포주인 남자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그를 폭행하고 돈을 가지고 시골로 도망친다. 이 장면은 켈 리가 도시에서 당한 고통과 수모, 이에 대한 그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극대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하는 시골 마을은 평화로워만 보인다. 이 마을에서 그녀는 과거를 모두 지운 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매춘에 빠지려는 동료들을 앞장 서 막아내기도 한다. 켈리에게 시골은 기회의 장소이며 바라보는 수많은 눈이 없는 평화로는 공간이다. 헌데 그녀와 좋은 관계를 맺던 남자가 알고 보니 아동성범죄자라는 걸 알게 되고 그녀가 그를 죽이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켈리가 믿었던 동료들은 그녀를 배신하며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은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낸다. 시골은 도시에 비해 살기 좋은 곳으로 흔히 인식된다. 맑은 공기와 산과 들판이 아스팔트와 아파트로 가득한 도시의 답답함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특히 도시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눈이 감시처럼 느껴지는 환경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크다. 하지만 시골 생활은 편하지 않다.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보다 더 집단적인 결속력이 강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에 누군가 함부로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많은 걸 의미한다. 왜 켈리는 다시 도시로 돌아간 것일까. 모든 오해가 풀렸음에도 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도시를 다시 택한 걸까. 그녀는 시골 사람들의 눈에서 느꼈을 것이다. 저들은 편견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들 사이의 탄탄한 결속에 자신의 공간은 없다고 말이다. 이 작품에서 남자가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감시의 눈에서 벗어나서이다. 시골의 결속력은 편견을 강화시키고 진실을 은폐한다. 외적으로 이미지가 좋았던 남자에게 감시의 눈은 작동하지 않는다. 도시의 수많은 눈들이 시골에는 없기 때문이다.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을 생각해 보라.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사건임에도 불구 해당 지역은 제대로 된 판결을 내지 않은 건 물론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 시골과 관련된 문제가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올라오고 기사로도 나가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방송은 시골 민심을 말하고 정을 부각시킨다. 단점을 부각시키는 건 편견을 조장하고 부추기는 행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난민 문제를 생각해 보라. 정치권에서는 값싼 노동력 문제로 이들을 환영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불만을 내뱉으려는 국민들을 향해 인권을 주장한다. 사회적인 혼란과 치안 문제에 대해서는 숨기기에 급급하다. 


개인적으로 <범죄도시>나 <청년경찰>을 통해 조선족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이 문제가 더 공론화되기를 바랐다. 조선족에 대한 문제는 그들에 대한 인식과 씌워진 베일에 있다. 다문화를 이야기하려면 이 문제에 대한 정보가 풍부해야 하며 선택적 정보의 주입이 아닌 폭 넓은 정보의 주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정보를 통해 다수의 국민들이 갑론을박을 펼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이런 과정을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특정 세력들에 의해 암적인 부분은 더욱 까매지고 이내 썩어 악취를 풍긴다.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런 문제의 해결방식이다. 우리가 영화나 만화,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통쾌한 ‘사이다’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악당과 비슷한 악행을 반복하는 악역이 등장하는데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주인공이 이를 처단하기 때문이다. 바로 폭력이다. 소년만화 중에 법으로만 상대를 처단하는 만화는 드물다. 주인공은 있는 힘껏 악당을 줘 패고 독자는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악당을 향한 처단이 그러기를 바란다.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는 참전군인 출신인 오쿠자키 겐조가 뉴기니 고립 당시 사형을 당한 두 군인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옛 상관과 동료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당시 두 군인은 전쟁이 끝난 이후임에도 불구 탈영을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 겐조는 동료들을 만나 당시 뉴기니의 극심했던 상황, 그리고 인육을 먹어야만 했던 실상을 추궁한다. 이 과정에서 겐조는 강압과 폭언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참전군인 출신이 직접 자신들의 전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가는 이 과정은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한 피해 국가였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진실을 숨기고 만행을 감추고 옹호하려는 이들을 향한 폭력에서 쾌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헌데 영화가 주는 느낌은 예상과 다르다. 겐조가 행하는 폭력에는 정당성이 있는가. 그는 상관의 아들을 총으로 쏴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이전에 그는 부동산 중계업자를 죽여 징역을 산 경험이 있다. 그는 이 모든 폭력을 신에 의해 행하고 용서받았다 말한다.


과거 일본의 폭력이 어땠는가. 그들은 일왕을 신으로 모셔 천황이라 말했고 천황의 이름을 등에 업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의 잘못된 정신의 바탕에는 일왕에 대한 신적인 믿음이 있었고 이 믿음이 잔혹한 폭력을 낳았다. 겐조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하고 신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그는 일왕과 다른 신을 섬기며 폭력을 행사하는, 일본 폭력의 또 다른 잔재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법은 가진 자들의 최후의 탈출구이기 때문에 신뢰에 있어 부족하고 처벌에 있어 미진하다. 하지만 정당성에 있어 법은 그 위력을 지닌다. 법의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처단은 또 다른 공포를 낳고 피해자를 발생시키기 마련이다. 만화 속 주인공은 지나칠 만큼 반듯하고 정의로우며 어떠한 유혹에도 빠지지 않지만 현실의 인간은 다르다.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되는 지점이 있고 유혹에 강한 부분이 있으면 약한 부분이 있다. 또 만화나 영화 속 주인공들과 달리 가족이나 친구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다.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완벽한 복수 또는 처벌을 꿈꾸기 힘들다. 사회는 약자를 보호하고 악인을 처단해야 하지만 그 기능에 있어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사회의 복잡한 기능을 개인이 해내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시스템의 변화와 개선을 추구해야지 매스컴을 통한 인민재판이나 힘과 권력에 의한 폭력은 옳지 못하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의 반복을 이끌 뿐이다. 현실은 영화와 다르다. 시간이 흐르기에 사람은 변하고 시대의 목소리는 달라진다. 또 끝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에 대한 해결은 공론화와 관심, 연대를 통해 해결하는 것이지 신의 사자(使者)를 자처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건 또 다른 오만과 교만이며 문제의 씨앗을 심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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