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덕길의 아폴론>
일본 영화 <언덕길의 아폴론>의 국내 개봉 소식을 접한 뒤 약간의 의아함이 들었다. 첫째 미키 타카히로 감독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로 국내에서 마니아층을 형성하긴 했지만 그의 영화는 겨우 4편만 국내에서 소개됐을 뿐이다. 그 중 흥행작인 <핫 로드>는 VOD로도 안 나왔을 정도였다. 둘째, 원작이 2009년 이 만화가 굉장해! 여성부문 1위 수상, 2012년 제57회 소학관 만화상 일반부문 수상을 했지만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 만한 소재가 아니다. 셋째 일본 내에서도 박스오피스 8위로 진입 후 별다른 인기를 보여주지 못한 이 작품을 왜 국내에서 개봉하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 번째 의문이 풀리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영화의 개봉에는 감독이나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두 남자 주인공보다 고마츠 나나의 영향이 컸다. 네이버 예고편만 봐도 플래시백과 런칭 예고편에 고마츠 나나의 얼굴이 메인으로 박혀 있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그녀를 중심으로 한 홍보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의문은 영화를 보면서 해결되었다. 이 영화에는 세 가지 포인트가 있다. 이 세 포인트 모두 관객들이 충분히 흥미와 재미를 느낄 만한 것들이다.
첫 번째 포인트는 인물 사이의 관계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다섯 명의 캐릭터는 각각 뚜렷다. 작고 왜소한 카오루는 부모님의 죽음 후 큰집에 얹혀살면서 눈칫밥을 먹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가족이라는 따뜻함 하나 없는 집이 외롭기만 하고 의사가 돼라는 큰어머니의 강요에 꿈마저 마음대로 말하지 못한다.
센타로는 카오루와 반대로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다. '똘끼충만'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자신감이 넘치지만 과거의 아픔 때문에 거친 면모를 보인다. 리츠코는 큰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지만 사랑에 있어 수줍음이 많고 감정 표현에 서툴다.
여기에 서브 캐릭터로 등장하는 학생운동가 쥰이치와 그를 좋아하는 부잣집 아가씨 유리카까지 다섯 명의 인물들은 서로의 사랑과 우정에 상처와 감동을 받는다. 이런 인물들의 관계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지며 관객들에게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두 번째는 브로맨스다. 상반되는 이미지의 카오루와 센타로는 서로가 간직한 아픔과 말보다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음악을 통해 사랑보다 진한 우정을 보여준다.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도 브로맨스가 유행인 만큼 이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는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음악이다. 영화 속 재즈 음악은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특히 공연 장면이 인상적인데 카오루의 피아노와 센타로의 드럼이 선보이는 호흡은 신 나는 스윙감에 빠져들게 한다. 이런 영화 속 공연 장면은 재즈의 특색이라 할 수 있는 임프로비제이션(즉흥연주)에서 보여줄 수 있는 창조성과 활력, 연주자의 개성이 잘 나타난다는 점에서 자신의 청춘과 꿈을 써나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다루는 영화의 주제의식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
특히 원작이 소재적인 측면에서 코스프레에 가까운 영화들만 만들 수 있는 여타 일본 소년만화들보다 영화화하기 더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런 장점들은 굳이 흥행영화가 아니더라도 국내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정적 장점으로 뽑고 싶은 점은 역시나 이야기다. 원작이 좋은 작품이라는 걸 증명하듯 매끄럽지 못한 전개와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냉각되는 인물들의 감정이 약간 거슬림에도 불구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재미와 감동의 크기가 크지 않다. 이는 이 영화가 지닌 단점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은 시대와 재즈다. 1960년대 중반 일본 나가사키 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 시대적 배경과 재즈 사이의 연관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 이는 영화가 재즈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리츠코의 아버지가 이 역할을 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즈가 지니는 의미가 청춘인 세 주인공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기에 그저 음악만 즐기는 입장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왜 60년대가 배경이 되어야 하는지, 왜 60년대에 재즈가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키지 못한다.
두 번째는 앞서 이야기했듯 어설픈 관계설정이다. 포스터를 보면 알 수 있듯 영화의 주인공은 카오루, 리츠코, 센타로 세 사람이다. 이들 사이의 사랑과 우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브로맨스는 부각이 되는 반면 사랑은 미약하다. 그 이유는 리츠코 캐릭터가 부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카오루가 집안에서 무시당하는 장면, 센타로가 선배들과 옥상에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의 캐릭터를 부각시켰다. 이렇게 부각된 두 캐릭터가 서로 맞붙다 보니 합이 생기고 우정에 불이 붙는다.
반면 리츠코에게는 이전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의 할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애절함과 설렘이 느껴져야 될 카오루와 리츠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느껴져야 될 카오루와 센타로의 관계가 무미건조하게 다가온다. 이런 어설픈 관계설정은 유리카와 쥰이치의 캐릭터도 기운 빠지게 만든다. 셋의 관계도 완벽하지 못한데 여기에 둘이 더 추가되니 이미 기울어진 관계가 더 기울어지게 된다. 주말연속극으로 따지자면 총 다섯 커플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중 한 커플 이야기만 재미있고 나머지는 다 시시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재미있는 커플의 이야기만 많이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세 번째는 미키 타카히로 감독에게 기대할 수 있는 여운이다. 그의 작품 중 여운이 없는 작품을 뽑기 힘들 만큼 작품마다 진한 여운을 남겼다. 한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런 느낌이 없다. 여운을 줄 수 있는 지점이 있었고 거기서 끝내야 했건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의 장기 중 하나인 아름다운 영상미는 여전하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이 작품을 잊을 수 없게 만드는 여운이 빠졌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