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개월 중남미 여행의 경유지
긴 여행을 앞두고 공항에 앉아있다. 여행이라기보다는 도망이라고 해야 맞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어디로든 도망을 가야 했고, 그 어디를 찾다 보니 중남미가 되고 말았다. 지금껏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도, 끌려본 적도 없었던 곳이다.
다낭에서 만난 나빗이 콜롬비아를 추천했을 때도, 페루의 마추픽추에 한 번 가보고 싶다 생각했을 때도, 고산병까지 있다는 그 멀고 더운 곳에 실제로 내가 갈 일은 0퍼센트에 가까웠다.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 지역 모두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한 데다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곳이라 하니, 이곳을 여행 후보지로 올려놓은 후에도 나는 수없이 포기하고 싶었다.
출국 티켓을 끊어놓고서도 여전히 똑같은 물음, 이런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설렘 없이, 과제를 수행하듯 떠나는 게 맞나? 나는 그렇게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돌아가지도 못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2주를 보냈다. 알아볼 것이랑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지만 십 분의 일도 마치지 못한 채, 그냥 가서 부딪쳐 보기로 한다.
카메라도 들고 가기는 하지만, 최근에야 손에 넣은 그 카메라 또한 짐만 같다. 기능도 잘 모를뿐더러 무겁고 투박한 게 매력도 없다. 게다가 그 카메라를 쓸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현지인들이 관광객들에게 휴대폰이나 카메라를 꺼내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로 위험한 곳이라 하니 말이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겁다.
어떤 나라는 와이파이 연결도 어렵다고 한다. 뭐 그렇다면 그곳에선 거기에 맞추어 여행을 해야겠지. 조금 느긋하게, 시간이나 돈, 정보가 부족해서 가기 어려운 유명 여행지는 기꺼이 포기하면서. 애써 이렇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첫 행선지인 멕시코에서 다음 여행지, 쿠바로 넘어갈 비행기 표도 끊어두지 않았다. 내가 거쳐 가야 할 여러 나라들, 콜롬비아,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채 떠난다. 심지어 칠레는 갈지 말지도 결정도 못했다.
그렇게 많은 것들이 미정인 상태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지금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난 왜 이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이 여행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일들과 마주하게 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3개월 가까운 이 여행을 통해 달라질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크리스마스이브에 한국을 떠나 12시간여의 비행 끝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시차로 인해 이곳은 다시 12월 24일이다. 여기서 11시간을 보낸 후에 멕시코시티 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한다.
출국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 샌프란시스코 경유에 11시간 대기라고 해서 내심 반가웠었다. 아주 오래전 미국 여행길에 들렀을 때, 그 화사한 느낌이 참 좋았던 터라 그곳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인천까지 버스로 4시간 이동하고, 공항에서 3시간을 기다린 후에, 12시간 동안 밤 비행기를 타고 온 참이었다. 물어물어 지하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의 도심인 유니온 광장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연히 기진해 있었다.
광장 앞에는 색색의 불을 밝힌 꼬마전구들이 가로수에 매달려 있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눈이 내리지 않는 기후 특성상, 경사 가파른 길이 굽이굽이 뻗어있는 도로를 보고 신기해했던, 오래 전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바로 거기였다.
그 언덕 도로가 시작되는 곳에 사람들이 길게 줄 서있는데, 무슨 줄일까? 광장 주변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와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20여분 정도 돌아다니며 느꼈던 그곳의 밝은 분위기는 딱 그 시간만큼의 인상일 뿐이었다. 그 후로는 그저 여느 대도시의 번화가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흐린 하늘, 조금 쌀쌀한 날씨, 대형 쇼핑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칙칙한 분위기다. 그 거리에는 홈리스들과 군데군데 모여서 마리화나를 피워대는 흑인 젊은이들만 보일 뿐이었다. 거리에 스며있는 마리화나 냄새로 머리가 아파왔다.
햇살 환한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내다보며 멋진 카페에 앉아 있을 상상을 했었는데,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며 글도 쓰리라 생각했었는데, 카페라곤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햄버거 가게나 마트 내에 편의점 의자 같은 것들이 몇 개 놓인 곳, 백화점 내의 혼잡한 푸드 코트 같은 곳들뿐이었다. 그냥 먹기 위한 단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을 뿐, 내가 바라던 여유로운 휴식의 공간은 없었다.
처음엔 시간이 부족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그렇게 쉴 곳을 찾아 30분 정도 돌아다니다 더 이상 걸을 기운도 남지 않게 된 나는 어디든 들어가서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룻밤을 꼬박 비행기에서 보낸 데다 내일 새벽 다섯 시까지의 비행이 또 남아있다. 막상 멕시코시티에 도착한다고 해도 호스텔은 오후 2-3시에 체크인이므로 난 그때까지 또 어딘가에서 선걸음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제 크리스마스이브에 한국을 떠났는데, 이곳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시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한다. 나는 어찌하여 크리스마스이브를 비행기에서, 그리고 외국의 낯선 거리에서 혼자 휘적거리며 보내고 있나?
체력이 안 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냥 공항으로 돌아가야겠다. 내가 무리한 욕심을 부렸나 보다. 그런데 돌아갈 힘도 없다. 다시 기운을 모아 카페를 찾으러 빙빙 돌다가 결국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한국 카페들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형편없는 곳이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변변한 카페 하나 없다니. 7달러에 커피와 조그만 빵 하나를 시켰는데, 빵은 정말 맛이 없었다. 자꾸 무너질 것만 같은 몸을 좀처럼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데, 의자 3개를 사이에 두고 남자 한 명이 들어와서 앉는다.
작은 백팩을 멘 것이 관광객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너무 지쳐있는 상태라 쉽게 말을 붙일 여력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여기서 비행기 출발할 때까지 6시간을 혼자서 죽치고 있느니, 일단 말이라도 붙여보자.
“여기 살아요, 아니면 관광객이에요?”
그는 웃으며 여행자라고 대답한다. “함께 얘기할까?” 하고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캐나다(빅토리아)에서 왔다고 했다. 내가 멕시코시티 행 비행기를 기다린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다고, 비행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똑같은 비행기다. 우와! 이렇게 반가울 데가! 그는 멕시코시티를 거쳐 바로 하바나행 비행기로 갈아탄다고 한다.
그가 트롤리를 타고 가서 케이블카로 갈아타면 롬바르드 거리를 구경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우린 의기투합하여 거리로 나섰다. 방금 전까지도 지쳐 쓰러질 것 같던 나는 힘이 솟고 몸이 가벼워졌다.
이제 보니 내가 지하철에서 내려 맨 처음 맞닥뜨린 풍경이 바로 그 트롤리를 타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었다. 우린 각각 14달러를 주고 케이블카 티켓을 사서 줄을 섰다.
문득 이런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 사람이 사실은 캐나다 여행자를 빙자해서 여행자의 등을 쳐 먹는 사기꾼은 아닐까? 누가 먼저 멕시코시티 비행기 얘기를 했더라? 아니야. 그가 자기 표를 먼저 확인하고, 비행기 출발 시간을 얘기했었어. 그런데 우연치 곤 너무 희한하잖아?
잠시 의심병이 도졌던 나는 결국, “잠깐 널 그렇게 의심했었어.”라고 깔깔대며 털어놓았다. 그러는 사이, 갑자기 길었던 줄이 흐지부지 흩어져 없어지고 있었다. 어찌 된 상황인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 트롤리 운행이 일찍 끝났다는 것이다.
마치 파티에서 빛나던 신데렐라가 자정이 되며 재투성이 소녀로 변해 버리 듯, 설렘으로 늘어서 있던 줄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티켓 부스에 가서 물어보니 여기서 한 블록 올라가면 셔틀버스가 있으니 그것을 타거나, 아니면 2킬로 정도 거리니 걸어가라고 했다. 현재 우리의 체력으로 걸어갈 수는 없어서, 셔틀버스 타는 곳을 찾아보았다.
조금 걸어 올라가니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그 줄이 케이블 카를 타러 가기 위한 셔틀버스일 거라는 기대로 서있기는 하지만 맞다는 확신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지금 기다린 지 15분 되었다고 했다. 5분 정도 그 줄에 서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다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티켓부스에 돌아가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환불은 인터넷으로 신청을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린 결국 14불씩 날린 채,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공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어제 비행기를 놓쳐서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묵었는데,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이 충분해서 샌프란시스코 도심이나 돌아보자고 나온 참이었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피곤해진 우리는 활기찬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는 호텔에 맡겨둔 짐을 찾아 공항으로 가겠다고, 공항에서 보자며 공항 근처에서 먼저 내렸다. 그의 이름은 마이크였다.
불발되기는 했지만 트롤리만 운행됐더라면 기가 막히게 좋았을 뻔했던 우연한 만남이었다.
에너지도 의욕도 소진된 순간에, 여행 시작부터 맞닥뜨린 암담함 앞에서, 잠시나마 비타민 같은 활력을 안겨준 마이크,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