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 / 멕시코시티
새벽 5시,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했는데 캐리어를 찾고 보니 손잡이가 부서져 있었다. 밖은 껌껌한데 혼자 택시를 타기에는 무섭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들 터였다. 그래서 동행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일면식도 없는 무작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동행할까?’ 하고 물어보는 게 너무 이상해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서진 손잡이 때문에 끌기 힘든 캐리어와 씨름하며 공항을 몇 바퀴나 돌았지만 택시를 함께 탈 사람은 찾지 못했다.
결국 공항 택시 창구에서 연결해 준 택시를 22달러 주고 탔다. 소개받은 기사는 넥 워머로 코까지 가리고 두 눈만 내놓고 있었다.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인사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한참 후에야 그 말을 기억해 내고서, “아! 올라!” 했더니 그의 눈이 싱긋 웃는다. 그전까지는 이 낯설고 어두운 도시에서 어디로 팔려가는 건 아닌가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그 눈웃음이 나를 안심시켰다.
한참 후 택시가 큰길을 벗어나 사잇길로 접어들었는데 어둑한 거리 양쪽에 똑같은 높이의 낮은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있었다. 굳게 닫힌 금속 질감의 문들이 차갑고 섬뜩했다. 사람도 차도 없이 새벽의 어스름만 스며있는 그 거리에 순간 무서움이 확 끼쳤다.
이곳 어딘가에 나를 내려놓고 택시 기사가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지?
한참을 그렇게 달려도 거리 풍경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 한가운데 택시가 섰다. 여기라고?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어떻게 하지? 여기가 맞긴 한 거야?
호스텔이 아직 문을 안 열었으면, 이 인적 하나 없는 거리 한 복판에서 난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하는 사이 기사는 트렁크에서 내 짐을 내려놓았고 나는 굳게 닫힌 호스텔 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기사가 초인종을 찾아서 눌렀고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기사가 뭐라고 대답하자 한참 뒤에 누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그 무서운 거리에 나를 내려놓고 바로 떠나버리지 않은, 초인종을 누르고 함께 기다려준 그가 고마워서 택시비는 이미 공항 사무실에 치렀지만 그에게 20페소의 팁을 주었다.
기진한 나는 호스텔 주인에게 체크인이 오후인 것은 아는데, 이틀 째 잠을 거의 못 자서 너무 피곤하다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더니, 반나절 추가 요금을 받고 체크인해 주었다.
배정받은 8인실 혼성 룸은 침침한 데다 건너편 침대에는 한 남자가 자고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편안하게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방을 옮겨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6인실 여성 룸으로 바꿔주었다.
그곳은 환하고 쾌적했다. 룸메이트로 한국인 아가씨 두 명이 있었는데,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며 아주 붙임성이 좋았다. 한 명은 남미를 다 돌았고, 마지막으로 멕시코 여행을 더 할 계획이다. 다른 한 명은 6개월간의 콜롬비아 어학연수까지 마친 참이라,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다들 참 야무지다.
내가 모르는 사이 중남미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미 각광받는 여행지가 되어 있었다. 또 다른 세 번째 걸도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워낙 잘했고, 홍콩에서 온 여성과 함께 이 호스텔을 베이스로 멕시코 시티 근교 여기저기를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난 그녀와는 그냥 영어로 얘기했다. 둘 다 그것이 더 편했고 필요했던 것 같다.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한국어로 얘기하다 보면 한국에서의 태도나 관성으로 돌아가기 마련이어서, 모처럼 해외여행을 나온 자유로움이 그 흐름을 타지 못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왠지 조심스러워지고, 더구나 나이 차이가 날 때는 한쪽은 예의를 차려야 할 것 같고 다른 쪽은 나이 값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서로 원치 않는 틀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한국인임을 알면서 계속 영어로 대화한다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종일 유심 카드를 사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녔지만, 크리스마스 날이라 모두 문을 닫아서 결국 사지 못했다. 봄이가 페이스톡을 걸었던 기록이 떠있었다. 유심을 사지는 못했으나, 유심을 찾아다니느라 자연스럽게 멕시코시티 도심을 한 바퀴 빙 돌았다.
멕시코시티는 올드 타운과 뉴 타운이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고, 그냥 도처에 옛 건축과 현대 건축이 혼재해 있었다. 사람들로 미어터질 것 같은 번화한 중심가를 걷다 보면 어느새 그 한가운데로 고풍스러운 옛 건물들이 출몰하고, 그 건물들 뒤로는 또 현대식 건물들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줄지어 있곤 했다.
시장 골목에서 길거리 음식을 사 먹어 보기도 했지만, 어쩐지 속이 편치 않았다. 여행 떠난 후, 뭔가를 먹고도 속이 거북하지 않게 되기까지는, 이후로도 2주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렇다고 배탈이 났던 것은 아니지만 몸이 음식을 잘 받아들이지도, 맛을 느끼지도 못했다.
멕시코시티의 밤은 내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소깔로 광장 가까이에 묵고 있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연일 불야성 같았고 요란한 소음들이 깊은 밤까지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마법의 귀마개 덕분에 잠을 자는데 큰 불편은 없었다.
호스텔 라운지에서 늙수그레해 보이는 남자, 짐을 만났다. 그는 나의 질문에 시종 농담 같은 대답을 던졌고, 난 그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의 말끝에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는 기억할 수 없는 무슨 병 이름을 대며 자기가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 말조차 농담으로 들렸고 난 그 말에도 깔깔대고 웃었다. 캐나다에서 왔고 몸이 아파서 외출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잠시 라운지에 나왔다가도 다시 가서 누워야겠다고 금방 들어가곤 했다.
난 그 호스텔이 좋았다. 직각을 이루며 이어지는 두 면의 벽에 넓고 긴 창들이 나 있어서, 이층 침대에서 바라보면 해 뜨는 모습과 지는 모습, 야경까지 시원하게 보였다. 별천지 같았다. 방을 옮기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햇빛이 잘 들어 환한 것도 방에 쾌적함을 더해주었다.
아침 식사는 갈색으로 구운 토스트 두 조각, 바나나 한 개, 요거트 한 개가 전부였다. 토스트에 바나나를 얇게 썰어 올리고 그 위에 요거트를 얹으면, 보잘것없이 평범한 재료들이 근사한 핑거 푸드로 변신했다. 테라스에서 따스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커피와 함께 이렇게 만든 아침을 먹을 때면 집처럼 편안하고 좋았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이른 오후에 호스텔로 돌아와 씻고, 테라스에 앉아 젖은 머리를 햇빛에 말리면 충만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여행에 대한 불안감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짐이 멕시코에서는 테라스를 파티오라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우린 키친 라운지에서 마주칠 때마다 서로 몹시 반가워했고, 한참 얘기를 하며 웃다 보면 그는 늘 피곤해져서 좀 누워야겠다고 이내 들어가곤 했다.
그는 무슨 병에 걸린 걸까? 이역만리 이곳 호스텔에서 만난 그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내 멋대로 상상해 본 ‘엉클 짐’이었다. 그것도 지병이 있는. 그런 생각을 하면 밑도 끝도 없이 조금 슬퍼졌다. 난 그에게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짐, 너 죽는 거야? 죽지 마. 너무 슬프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