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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Aug 16. 2022

애월에 가거든 김창열 미술관에

 - 3일 동안의 제주 여행, 2019


  11시가 거의 다 되어 호텔 룸에 도착했는데 번갈아 씻고 나자 사라는 바로 자겠다고 했다. 12시가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난 좀 어리둥절했다. 

  누군가와 함께 나선 여행이 여행지를 돌아보는 것만은 아닐 터, 난 함께 간 그 누군가와의 시간에 대한 기대도 여행지 못지않게 컸기 때문에, 이런 기능적인 동반에 대해 조금 당혹스러웠다.   

   

  둘 중 하나가 이제 자겠다고 하면 나머지 하나도 당연히 불을 끄고 자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새벽 두 시쯤에 잠드는 나도 할 수 없이 누워야 했고, 메시지 알림음이 사라를 깨우지 않도록 묵음 모드로 돌려놓아야 했다.      

   잠이 안 오면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했었는데 푹 잠기는 것처럼 부드럽고 쿠션이 좋은 이불과 베개 덕인지 의외로 난 금방 잠이 들었고 아침까지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난 사라는 자기의 루틴이라며 휴대폰으로 클래식 아침 방송을 틀어놓고, 내가 샤워하는 동안 커피포트에 물을 데워서 버터 커피를 마시고, 요가를 하며 아침 배변을 위한 일상을 집에서처럼 그대로 하고 있었다.      

  

  여행 스타일을 얘기하자면 그녀는 여행의 환경을 자기의 일상에 그대로 맞추고, 나는 여행의 환경에 나 자신을 맞추는 경우이다. 나는 여행을 탈 일상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것이 여행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행지의 숙소가 여럿이서 공유해야 하는 호스텔 도미토리가 아니라면 이런 아침 루틴을 지키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이틀간의 풀데이 여행을 위해 차를 렌트할 것인가 택시를 이용할 것인가로 고민했지만, 결국 사라가 선호했던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첫날엔 애월 근처에서 놀기로 했기 때문에 일단 근처의 '김창열 미술관'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그곳까지의 택시비는 경악스럽게도 37,000원이었다. 왕복이면 벌써 택시비만 74,000원으로 하루치 차 렌트비였다. 게다가 우린 소소하게 또 몇 번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택시 기사는 저녁 6시까지 택시를 렌트하는데 10만 원을 제안했지만, 그러면 일정이 택시에 매이게 된다고 사라는 거절했다.      


  미술관은 예술가 마을 안에 있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동네를 배회하다 실수로 담장이 없는 어느 갤러리 마당에 들어갔는데 그곳은 개인 작업실인 것 같았다. 애써 꾸미지는 않은 것 같으면서도 작은 나무들과 꽃 덤불이 보기 좋게 어우러져 있고 잔디까지 깔려있는 예쁜 마당이었다.

  

  마당 구석에는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목줄에 묶여있었는데 크기에 비해 무척 온순해 보였다. 사라는 그 개가 너무 함부로, 지저분하게 키워지는 것을 보고 주인에게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김창열 미술관'은 건축이나 주변 정원도 근사했지만, 일단 김창열이라는 화가와 작품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김수근에 비길만한 유명한 화가로 프랑스에서 예술인 훈장까지 받았다고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본 적이 있을 만큼 눈에 익은 물방울 작품들인데 그는 이 물방울을 이용한 작업을 40년 가까이했다고 한다.     










 

  어떻게 40년 동안이나 물방울이라는 한결같은 소재로 작업을 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동양적 순환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겸허와 무한한 가능성이 동시에 교차하는 것이다. 나는 이 원형의 액체를 캔버스에 재현시키며 우주적 공과 허의 세계로 파고든다. 너무 흔해서 무심코 지나치는 물방울이지만 거기에는 삼라만상의 이치가 투영돼 있다.... (중략)     

  아직 물방울로 그릴 게 많다.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소재로 어떻게 감동을 주느냐가 중요하다. 일생을 했어도 아직 할 것이 많다.”

              - 김창열 미술관 전시 브로셔에서 인용.     


  같은 주제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은 무한히 새로울 수 있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그랬다. 그는 어릴 적 공부했던 천자문을 모티브로 물방울에 한자를 넣기도 했고, 물방울을 만들고 그리면서 생기는 물의 흔적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들은 40년 연륜을 담은 정교함과 현대적 표현이 잘 어우러져 있어서 무척 인상적이었다. 















  미술관 경내에는 쉼터를 겸한 작은 도서관 건물도 있었다. 그곳엔 꽤 많은 미술 서적들이 비치되어 있어서 한나절 정도 이곳에 머물며 욕심껏 책들을 넘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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