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로시마에서 닉을 만나다
일본 여행은 지난여름에 닉을 시내에서 만났을 때, 그가 일본에 돌아가면 10월에 마지막 콘서트를 할 거라고 했던 것이 계기였다. 그때 우린 너무 재미있게 얘기를 나누느라,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나도 그 콘서트 보고 싶다.”
그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정색하듯 말했다.
“너 꼭 보러 와야 해.”
그때는 내가 그 콘서트를 보러 일본까지 갈 일은 없을 거라 여겼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재미있겠다며 가라고 부추겼다. 일본까지의 비행기 티켓 값이 거의 제주도 가는 정도와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교토의 단풍에 대한 기사들도 내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래서 별 생각도, 계획도 없이 일주일 간의 일본 여행을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히로시마에서는 콘서트를 보고 닉을 만나 식사하는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운 좋으면 그와 하루 더 함께 주변을 돌아볼 것이다. 그렇게 히로시마에서 3일, 다음 교토에서 2박 예정이지만, 정확히 교토의 어디를 가보겠다는 것도 없었다.
교토의 단풍, 그리고 막연히 청수사 단풍이 좋다니 그곳을 보고, 일본의 건축과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교토 거리를 볼 예정이다.
그다음 다카야마는 리틀 교토라 불리는, 닉이 아름답다고 추천해서 가는 곳이니 더욱 모르는 곳이다.
다만 다카야마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그곳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시라카와고를 염두에 두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니 볼만한 곳이라는 것은 확실한 데다, 인터넷에서 본 사진도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정도가 내 일본 여행 계획의 전부다.
히로시마 공항까지는 제주도 가는 것만큼이나 순식간이었다. 여행자 안내소에서 호스텔까지 가는 길을 안내받았으나 조금 복잡해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일단 공항버스를 탔다.
45분 만에 히로시마 기차역에 도착했으나, 어디로 가서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막막할 뿐이었다.
일본인인 듯한 두 청년에게 길을 물으니, 구글맵을 검색해 보고는 버스 정류장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홍콩에서 왔다고 홍키라고 했다.
걷는 방향이 같아서 함께 가다가, 저쪽 아래로 내려가 오른쪽으로 가서 거기서 다른 사람에게 또 물어보라고 했다. 15년 전 유럽 여행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신기할 만큼 영어가 잘 들린다.
버스정류장에는 승객들을 안내해 주는, 제복을 입고 나이가 지긋한 남자들이 영어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버스 요금을 내면서 그 도움에 대한 스마일 페이를 추가로 받는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막막함에 비하면.
가르쳐준 정류장에서 내려 구글맵을 켰는데, 호스텔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정말 깨끗하고 조용한데 흠이라면, 룸이 너무 좁아서 복도에 캐리어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후에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닉이 아침에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 생일 파티가 있어서 종일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고. 이른 저녁에 보자고, 6시쯤 연락하겠다고 했다.
짐을 풀고 가까운 곳에 있는 평화공원을 돌아보았다. 더러 관광객들이 보였으나 한산했다. ‘원폭 돔’은 내게 역사적 의미와는 관계없이, 그냥 원폭으로 부서진 흔적을 가진 묘한 분위기의 건축물일 뿐이었다.
사진을 좀 찍었다. 라이카의 정방형 프레임 속에서, 풍경은 육안보다 근사해 보였다.
졸음과 멍한 기분을 날리기 위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호스텔로 돌아와 마이크의 연락을 기다렸다.
마이크를 만나러 6시에 시내 동키호테(쇼핑몰)로 택시를 타고 갔다. 반가운 포옹, 닉은 매니저 요시와 함께 왔다. 닉의 반가운 포옹은 조금이라도 어색해지려는 내 마음을 항상 따뜻하게 풀어준다.
거리를 조금 돌아보다가 닉이 잘 아는 식당으로 갔다. 정말 조그맣다. 커다란 철판 조리대가 거의 양쪽 벽면에 가 닿아 있고, 먼저 온 손님 셋, 그리고 우리 셋, 총 여섯 명이 조리대를 사이에 두고 셰프를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뒤로는 벽 쪽에 붙은 테이블 하나. 그게 끝이다. 그 철판 조리대 밖으로 20센티미터 정도 나무 판이 쭉 둘러 있었는데 그것이 음식과 술을 놓는 테이블인 셈이다.
셰프는 눈앞에서 퍼포먼스를 하듯 요리 과정을 보여준다. 거의 예술의 경지다. 그렇게 서로 보여주고 보면서, 먹고 얘기한다. 눈앞에서 바로 완성되는 음식은 모양뿐 아니라 맛도 일품이다.
신선할 뿐 아니라 처음 혀끝에 닿은 맛이 또 다른 맛으로 이어지며, 마치 맛의 변주 같다.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은 곳이다.
모든 것이 흥겹고 좋았다. 곱창과 얇은 비프 요리, 특히 그 비프 요리의 맛이 일품이었다. 그리고 오코노미야키는 유난히도 퍼포먼스가 요란했다. 히로시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라고 했다.
요시는 먼저 들어가고, 닉과 나는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시내를 횡단해서 평화공원까지 갔다. 내가 묵는 호스텔 근처였다. 조명이 켜진 원폭 돔은 아이러니하게도, 강을 배경으로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원의 야경도 좋았고 우리의 산책도 좋았고, 강가에 앉아 나눈 얘기들도 좋았다.
근처에 친구가 운영하는 바가 있다고 해서 거기에 가기로 했다. 가다가 또 아는 사람이 하는 레스토랑이 보여서 거기 먼저 들르자고 했다. 마침 닉과 함께 영상작업을 하는 일본 여성과, 인테리어를 하는 프랑스인 커플, 그렇게 세 명이 앉아 있었다.
거기에 우리 둘이 옆에 나란히 앉으니까 레스토랑은 꽉 찼다. 역시 주방과 셰프를 마주하고 앉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우린 와인을 한 잔씩 했다.
히로시마의 작은 식당 주인들은 손님이 갈 때면, 밖에까지 따라 나와서 배웅을 하고, 갈 때까지 손을 흔든다. 닉이 고대 이집트 술잔처럼 생긴 잔이 마음에 든다고 몇 번 말하자, 주인은 닉에게 술잔 하나를 가지라고 준다.
그곳을 나와서 닉은 말했다.
“이제 뭐 하지? 이게 다야?”
친구가 하는 바에 가고 싶은 것 같았지만 이미 12시를 넘긴 시간이라, 난 그냥 “응.”하면서 호스텔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음 날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으나, 오후에 리허설이 있고 그 후에 비디오 편집을 해야 해서, 몇 시에 끝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호스텔 문간에서 우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너무 좋다며 따뜻한 굿나잇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