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남아 3국 중 베트남
마음이 불안하고 이 불안으로 인해 속도 안 좋았다. 난 그런 불안한 모습을 애들에게 다 내보이고 말았다.
터미널에 앉아 공항행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봄이 어깨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딸이지만 그렇게 기댈 누군가가 있어서 좋았다.
차창 너머로 병아리 같은 딸들이 서로 기대어 서서 내게 손을 흔든다. 지난해, 내가 퇴직한 후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되풀이되는 풍경이다.
하노이 호스텔에 도착해서, 115달러에 1박 2일 하롱베이 크루즈를 예약하고 100달러를 환전했다. 인천공항에서는 유심이 일주일간 2기가에 3만 원, 한 달이면 12만 원이었는데, 여기 호스텔에서는 2개월간 7기가에 8천 원이었다.
오늘은 베트남 축구팀이 아시안 컵에서 최초로 준준결승에 진출해 경기를 펼치는 날이라, 많은 근로자들이 휴무라고 한다.
저녁 먹으러 나왔을 때는, 베트남이 이겨서 준결승 진출이 확정된 후였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쏟아져 나와, 국기를 휘날리고 경적을 울리며 무리 지어 질주한다.
마치 눈앞에서 무슨 혁명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쏟아져 나온 오토바이들로 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뭔가 함께 열광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집단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경험한다. 국가적으로는 축구나 올림픽 같은 스포츠, 대통령 선거 등, 우리나라의 촛불 혁명 같은 것.
지금 베트남에서는 그것이 축구로 폭발하고 있다.
이틑날은 호안끼엠 호수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냥 호수 주변의 카페에 앉아 글도 쓰고,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나 하며 여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호수는 생각보다 크고 괜찮았다. 나는 종일 호수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다. 주변에 불이 켜져서 호수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파티세리라는 괜찮아 보이는 베이커리에 들어갔는데, 베트남 면 요리와 라임 주스, 패션푸르트 타르트까지 콤보로 6천 원이었다. 너무 아끼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동남아는 충분히 즐기면서도 저렴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어차피 한국에서 지내는 생활비인 셈 치면 되리라.
점심을 먹고 나와 호수 주변을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다니다가 약간 서늘해져서 허리에 두른 카디건을 풀어서 입었다.
노트를 꺼내 막 뭔가 쓰려고 하는데 옆자리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1분 정도 그대로 쓰다가 고개를 돌렸더니, 한 남자가 나를 보며 인사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온 케머론. 57세. 면도하지 않은 얼굴이 조금 메마르고 지쳐 보인다. 6개월 여행 일정인데 지금 2개월째라고 했다.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 남부 호찌민에서 하노이까지 거슬러 올라오고 있었다. 내 여행 루트와 완전히 역방향으로 일치한다. 단 그는 조금 더 길게, 더 많은 곳을 들러오고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특수학생(지체장애 및 정신장애)들을 돌보는 사회 복지사 같은 일을 했었고, 2개월 전에 일을 그만두었다. 여행을 하는 이유는, 일을 그만두면 여행을 할 거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얘기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침 집을 구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세를 주고 왔기 때문에, 6개월 동안은 집에 돌아갈 수 없어. 집이 없으니까, 하하.”
여행은 엄청 신나지는 않지만 별 탈 없이 즐길 만해서,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했다. 다만 베트남 무비자 체류가 15일밖에 안 돼서 비자 때문에 영어 가르치는 일을 구하고 있다고 했다.
“내일은 뭐해?” 그가 물었다.
“하롱베이 크루즈를 예약해두었어.”
“어, 나도 내일 하롱베이 크루즈 가는데. 우리 이러다 같은 배에 같은 캐빈을 쓰게 되는 거 아닐까? 하하하.”
“그러게. 진짜 그러는 거 아니야.” 나도 맞장구를 치며 깔깔 웃었다.
“선실을 다른 사람과 함께 써야 한다니 끔찍하지 않아? 누군지도 모르는데. 난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것도 싫어. 하지만 너하고라면 좋겠다.”
우린 또 깔깔 웃었다.
그는 내 이메일 주소를 따갔고, 난 그에게 페이스북 신청을 했다. 우린 내일 같은 배로 크루즈를 하게 될까? 해외여행을 하면서 내 나이 또래의 사람과 이렇게 얘기해보기는 처음인 것 같다. 설렘은 없지만 나름 편안했다.
사거리 2층 카페에 앉아 있으니, 하노이 구시가의 복잡한 거리 풍경이 보인다. 얽히고설킨 오토바이 떼와 차들,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사람들. 그 많은 오토바이와 차들이 계속 울려대는 경적들에도 다들 태연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나는 얽히는 오토바이들 때문에 길을 건너지 못하고 한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나도 태연히 그 차와 오토바이의 물결을 가르며 건너고 있다.
이곳 오토바이 무리들은 마치 기병대들 같다.
남자고 여자고, 부부 사이에 아이가 서거나 앉아서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오토바이 의자와 운전대 중간의 발판에 서있는 아이도 너무 편안해 보인다. 심지어 네 명의 가족이 한 오토바이에 타고 간다.
그러고 보니 이곳 베트남에선 뚱뚱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오토바이를 타고 이 복잡한 거리를 뚫고 다니는 여자들은 예쁘게 차려입은 가녀린 한국 여성들과 많이 달라 보인다. 그들은 당차 보인다.
여기 카페에 앉아 있다가 호수의 야경을 돌아보고 가야지.
호스텔 로비의 컴퓨터로 후에, 다낭, 호이안에 대한 정보 검색을 하고, 후에 행 비행기 티켓, 다낭에서 씨엠립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한국 떠나기 전 차일피일 미루면서 검색하지 못했던 것들, 여기 와서 발등에 불 떨어지니 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