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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Sep 16. 2022

나를 직원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까?

한 스타트업과의 인터뷰 이야기

어느 날 날아든 제안

가파른 성장세가 인상적인 스타트업에서 보내온 제안이었다. 먼저 모 대기업의 제안을 고사했기 때문에 스타트업인 이 회사의 제안이 그다지 끌리지는 않았다. 제안 단계에서 거절하려 했으나 마음을 바꿨다. 인터뷰는 가보고 결정하기로! 이유는 딱 하나, 포트폴리오 때문이었다.  


왜, 고급진 파인다이닝의 한 땀 한 땀 정성 들인 한 접시보다는 한 접시에 푸짐히 쌓아 담는 패밀리레스토랑의 뷔페 음식이 끌릴 때가 있지 않은가?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여기가 딱 그랬다. 포트폴리오가 익숙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아주 잘 차려진 한 상이었다. 어쩜 그렇게 내 취향으로 꽉꽉 눌러 담았는지! 어디 맛을 안 볼 수가 있나. 일을 오랫동안 해왔지만 아직 많이 다뤄보지 않은 매체들도 있었고 또 그렇다고 마냥 낯설지만은 않은, 자신감과 도전 정신에 불을 살살 지펴대는 그런 포트폴리오였다.

이래서 포폴, 포폴 하는구나. 그렇게 인터뷰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대표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말은 안 가도 그만이라 했지만 정작 이 회사에 못 들어가면 큰일 날 사람처럼 열과 성을 다해 준비했다. 면접 준비가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썩 할 만했다. 이왕 하기로 한 거 즐기기로 했다.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내가 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거든! 내가 NO 하면? 아쉬운 건 그들일 테지.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서둘러 나왔더니 3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근처 스타벅스 2층에서 긴장을 풀고 가기로 했다. 아니 근데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떨리는지... 안의 염소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멋진 나를 뽐내고 싶었는데 나오는 목소리는 음메메에에… 염소세요?


스타트업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트렌디한 분위기를 기대했었는데 회사 내부는 평범했다. 회의실에 앉아 두리번거리며 대표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 뒤로 회의하는 내용들이 귀에 꽂혔다. 바쁘구나 여기. 다들 정신없이 일하느라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저기, 물 한잔은 내어줄 수 있지 않나요? 손님맞이 참 박하다 싶었는데 대표는 10분이 지나도록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덕분에 내 안의 염소는 썩 꺼질 수 있었지만 빈정은 좀 상했다. 아, 물론 아무도 모르겠지만 내가 갑이라고.

몇 분이나 더 지났으려나, 대표가 급한 발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이때부터였을까요? 뭔가 잘못되었던 게...

“많이 기다리셨죠. 번개씨죠?”

“아뇨. 안개인데요.”

“지원하신 직군이… PD 였나요?”

“아뇨. 작가인데요.”

아아! 대표는 뒤에 잡혀 있는 PD 인터뷰와 헷갈렸다며 당황했는지 노트북 키보드를 우당탕 두드렸는데 그보다 내가 더 황당했다. 인터뷰할 사람 이름도, 직군도 숙지하지 않고 들어오는 대표라니?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게 식었다. 솔직한 심정은 지금이라도 나갈까 싶었다. 그러니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덕분에 준비해온 멘트도 막힘없이 술술 나왔고 그제야 대표도 나에게 집중하는 것 같았다. 


내가 준비해온 이야기를 듣고 대표는 회사에 대한 소개를 늘어놓았다. 젊지만 똑똑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내놓는 비전이 조금 허황되게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은 언젠가 해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같이 뭔가를 해낸다면 좋을 것 같다는 마음이 미약하게나마 싹트는 중이었다. 

어디 더 해봐. 더! 앞 선 실수를 열심히 만회해 보라고.

대표는 나에게 제안한 자리는 일단 인터뷰 대상자부터 찾기가 너무 힘들었고 인사 팀장의 평가(1차로 비대면 인터뷰를 진행했다.)가 아주 좋았다고 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상세한 부분을 협의하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갑이라고

나는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나 혼자 평가받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나 역시 당신과 이 회사가 나를 모실 준비가 되어있는지 궁금해. 이 상태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궁금했던 것들을 하나씩 물었다. 보내주신 회사 소개서에서 보기로는 직원 복지가 약하다고 느껴졌는데 혹시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복지보다는 연봉을 대폭 인상하는 쪽을 택했다는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현재 준비된 게 없더라도 직원들과 만들어가겠다는 답변 정도를 원했다.

가장 크게 걸렸던 부분인 지난해 인력의 절반이 퇴사한 것을 언급하며 직원들과의 소통을 위해 하는 노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팀장급들과의 소통은 신경 쓰고 있다는 어리둥절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아직 그럴 규모는 아닌 것 같은데요.

흐음. 긍정의 새싹이 자라나다 말고 구둣발에 밟혀나가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질문을 했다. 내가 합류했을 때 업무적으로 기대하는 바에 대해 물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쓰일지가 제일 중요한 사람이다.

"보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바쁜 회사예요. 그걸 즐기면서 일해줬으면 좋겠어요."

흐음. 나는 내가 하게 되는 업무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 답변을 원했다. 그런 고민이 1도 느껴지지 않은 저 답변은 낙제점이었다.


우리는 여기까진 것 같아요.

저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나를 직원으로 모시기에는 부족합니다.



회사를 나오며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나는 이 회사를 베스트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인터뷰 준비를 했다.

포트폴리오도 이 회사와 결이 맞는 프로젝트 위주로 다시 꾸렸고 자기소개는 물론, 회사에서 제시한 질문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답을 냈다. 절대 대충 하지 않았다. 이를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끔 시간을 투자한 연습도 필요했다. 그게 나에게 좋은 자리를 제안해준 것에 대한 예의고 임하기로 한 시간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마음이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분명 제안을 해온 건 이쪽이었는데 나에 대한 예의와 책임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게 실망스러웠다. 적당한 연봉과 괜찮은 포트폴리오만으로 회사를 판단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만. 인재 채용이라는 게, 쌍방의 마음이 맞아야 하는 건데 왜 일방적인 구애만을 바라는 걸까?


돌아오는 길에 인사 팀장에게 입사 확정을 위한 서류 요청 문자를 받았지만

좋은 제안은 감사하나 더 이상의 진행은 어려울 것 같다며 답을 보냈다.


이렇게 생명 연장된 백수 생활,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더 즐겨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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