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갑지 않은 가족의 1박 2일
전혀 예정에 없던 가족여행이었다. 여행이라 하니 너무 거창한 것 같기도. 우리 가족은 여름을 맞이해서 모처럼 집이 아닌 대관령에서 1박 2일간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쉽게도 남편이 휴가를 맞춰 쓰지 못해, 안 그래도 네 명뿐인 우리 가족이 더욱 단출한 모양새로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함께 하게 되었다.
셋이 함께 여행을 떠났던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일 년 뒤쯤이었나. 홍콩으로 패키지여행을 떠났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내가 엄마를 모시고, 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떠나는 여행은 간간이 있었지만 셋이 함께 떠날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우리가 함께 어딘가를 간다니. 남편이 함께, 넷이 놀러 가는 것과는 어쩐지 기분이 달랐다. 처음에는 취향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서 맞추기 어려운 엄마를 남편 없이 모시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조금씩 설레고 말았다.
나는 결혼한 유부이고 동생은 올해, 타지로 취업을 했다. 지금까지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 한 달에 한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지만 앞으로는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번 여행 준비를 꼭 잘 해내고 싶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싶어서 홀로인 엄마에게, 또 동생에게 약간의 이벤트를 하고 싶었다.
바로 '가족티'를 맞추는 것. 그저 같은 디자인의 티를 입고서 함께 사진 한 장 남기고 싶었다.
참고로 나는 남편과 7년간 연애하는 동안 한 번도 커플티를 맞춰본 적이 없다. '커플티 극혐! 절대 타도!'까진 아니더라도 굳이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해야 하나? 싶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는다는 걸 좀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애정 하는 옷이더라도,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마주치고 나면 더 이상 꺼내 입지를 못했다. 그러니까 이런 나에게 '가족티'라는 건 꽤나 파격적인 이벤트였다.
사실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건지 모르겠다. 자주 구경하던 브랜드에서 마침 눈여겨보던 심플한 회색 맨투맨 티를 할인하고 있었고 나는 어느덧 사이즈별로 총 4장을 결제하고 있었다. 그냥 같이 입으면 괜찮겠는데?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옷을 입게 될 다른 이들의 의견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워 결제를 한 뒤에야 걱정이 됐다. 식구들이 별로 안 좋아하면 어떡하지? 그래. 우리 가족은 평소에 연락도 안 하고 만나면 마주 보고 웃는 시간보다 서로 고집부리고 짜증 내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다른 가족들이 어떤지 모르겠어서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적당한 애정과 신뢰가 있지만 살갑고 화목한 그런 가족은 아니다. 내가 그걸 간과했다.
특히 남동생. 얘는 내가 카톡을 다섯 개 정도 보낼 때, 단답형의 답장 하나 보내오는 그런 애다. 분명 파워 인 싸기질을 타고나서 친구들과도 연락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누나인 나랑은 연락이 잘 안 된다. 한 번은 하도 답을 잘 안 하니까 전화를 했는데 받자마자 "왜 전화했어?"라고 해서 화를 내고 말았다. 어쩜 잘 지내냐는 말보다 왜 전화했냐가 먼저라니. 진심으로 울컥했고 서운했다. 동생과 나 사이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물론 동생은 기억하지 못할, 나만 혼자 서운해서 꽁기했던 기억들일 거다.
나이를 먹을수록 '가족'이라는 단어에 집착을 하게 된다. 아마 혼자 타지에 계신 엄마에 대한 '걱정'이 불어난 감정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는데 그걸 동생에게도 강요하게 되는 게 문제다. 친구보다 가족을 먼저 여겨줬으면 하고 몸이 좀 고되더라도 가족과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해줬으면 하는 것. 그래. 분명히 동생은 때때로 버거울 거다. 그래도 좀 해줬으면 하는 건... 안다. 다 내 욕심이다.
이런 동생에게 가족티 이야기를 꺼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일단 동생에게 카톡을 보내는 것조차 좀 눈치 보일 때가 있고 하물며 가족티라. 유난이라며 질색팔색 하는 건 아닐까? (나는 꽤 소심한 편이다) 아무렴 우리가 언제부터 그리 가족애가 넘치는 분위기였다고... 너무 오버했다 싶기도 해서 그냥 취소를 할까. 아니면 엄마랑 나랑만 맞출까. 수십 번 고민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처럼이잖아 모처럼. ‘벼르고 별러서 처음으로’ 하고 말아야겠다. 동생에게 예약한 숙소가 어떠냐며 슬며시 톡을 던졌는데 웬일로 답장이 빨리 왔다. 씹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디냐 싶어서 잽싸게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모처럼 같이 놀러 가는 거잖아. 티 하나 맞춰 입는 건 어때? 사진도 같이 찍고 블라블라.
-좋지.
좋다고? 너무 쉽게 좋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좋다니? 왜 좋지? 심지어 동생에게 주문한 티 사진을 보여주니 선뜻 마음에 들어했다. 그렇게 혼자 속 끓였던 가족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성사되었다.
결국, 내가 원했던 대로 우리 가족은 대관령에서 가족티를 맞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SNS에 자랑할 만큼 예쁜 사진도 아니고 그냥 핸드폰 하나 세워두고 찍은 사진이지만 소중한 기억을 남겼다. 딱 여기까지 였다. 저녁을 먹고 펜션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는 각자 방에 들어가서 다음날 퇴실 시간까지 나오지 않았다. 가족티를 맞추었다고 해서 우리 가족의 스타일이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함께이지만 또 따로. 따로이지만 그래도 함께 그렇게 보냈다.
누군가는 가족 여행이 뭐 저래? 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퇴실하면서 이 시간이 무척 만족스러웠음을 떠들기 바빴다.
그리고 나는 이번 1박 2일 여행으로 여태껏 동생을 잘 몰랐음을 인정해야 했다.
물론 내 동생은 여전히 살갑거나 다정한 성격은 못된다. 그러나 함께 있는 동안 동생이 저 나름대로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내가 보려고 하지 않았던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선 모습들.
오대산에서 전나무숲길을 걸을 때,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 바쁜 나를 대신해 엄마와 걸음을 맞춰 걸었고 가족티를 입고 밖에 나가기는 부끄러웠던 나와 달리(안에서만 입을 계획이었다..), 이렇게 입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보챘다. 그 모습이 꽤 뿌듯했는지 돌아올 땐 길 한복판에서 타이머를 맞춰 사진도 찍었다. 심지어 펜션에 돌아와서는 본인이 음식을 해보겠다며 한 손에는 유튜브,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거들었던 나도 똥 손이라 한 입 먹고 다 버렸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참 별 거 없던 이틀이 새롭게 느껴진다. 집에 오면서 참 좋았다고 다음에도 함께 놀러 가자고 했지만 사실 그다음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좀 더 길게, 멀리 가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평균 나이 40세의 가족은 저마다 다 바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