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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순택 씨의 소확행

이렇게 참으면 사라지는 것은 가난인지, 혹은 아이의 희망인지

불 꺼진 방 안, 초침 소리가 맥박처럼 울린다. 순택 씨가 고개를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밤빛 아래, 살아 숨 쉬는 핏덩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초침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누가 밖에서 보면, 그들을 포함한 그 공간을 까만 상자로 볼 것 같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까만 상자들의 집합체였다. 분명 분리되어 있었지만 분리되지 않았고, 둘만 있었지만 둘만 있는 건 아니었다. 상자들의 벽은 종잇장처럼 얇았고, 그래서 그들의 소리는 벽을 너머 앞집, 옆집으로 흘러 들어갔다. 고시원이었다. 순택 씨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고시원에 누워 아이와 함께 ‘말하는 사람 지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에이!” 아이의 입에서 얄따란 탄성이 새어 나왔다. 혹 구멍에 낀 강아지가 도움을 청하는 소리 같았다. 순택 씨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순택 씨는 아이가 입에서 나오는 ‘취’를 두 손으로 짓누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내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손에 튕겨 아이의 입 속으로 들어간 ‘취’는 목을 타고 몸속으로 어딘가로 들어가 응어리가 될 것만 같았다. 순택 씨는 문득 저 아이는 하나의 응어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아이는 점차 말이 없어졌다. 어떤 때는 자신보다 더 점잖고 과묵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한이 쌓이고 쌓여 단단한 응어리처럼 굳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순택 씨가 몸을 사선으로 뉘이고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아직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재채기가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 있으면 사라지는 것. 순택 씨는 참고 있으면 사라지는 무언 가에 가난도 포함되는 것인지 생각했다. 열 밤만 자면 된다며 이곳에 들어왔다. 열 밤이 지났다는 아이의 말에 지금부터 열 밤이라고 말했고, 언젠가부터 열 밤은 서른 밤으로 늘어나 아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열 밤만 자면 된다는 말은 빚처럼 더하고, 더해져만 갔다. 순택 씨는 이렇게 참으면 사라지는 것은 가난인지, 혹은 아이의 희망인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아” 순택 씨가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말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게임에서 지게 하려는 유인책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순택 씨가 아이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아빠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순택 씨가 말했다. “철이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아이는 말없이 천장만 보고 있었다. 답답한 순택 씨가 아이에게, 묵언 게임은 끝이라고, 더 이상의 묵언 게임은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아이가 순택 씨에 다가갔다. 아이는 두 손을 모아 순택 씨의 귀에 작은 성벽을 쌓고, 그 위로 입을 갖다 댔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아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불 꺼진 방 안, 초침 소리가 맥박처럼 울렸다. 순택 씨의 눈동자에 아이가 들어섰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순택 씨와 아이는 서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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