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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비 Mar 31. 2021

나는 다르고 너도 다르고 그러니까 우리는 같지 않고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꽃을 좋아한다. 절화는 뿌리도 없이 찬란하게 시들어 가는 게 감동적이고 화분은 그 조금의 땅 안에서 물과 빛과 양분만으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게 기묘하다. 꿋꿋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꽃을 보고 있으면 더뎠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쏜살같던 시간은 잠시 멎는다. 그런 순간이 좋아서 꽃을 좋아한다. 처음엔 야생화만 좋아했는데, 코로나로 밖에 나가기가 어려워지면서 화병을 들였다. 이에 대해선 조금 더 긴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다음에 써야겠다. 그러면서 꽃집을 자주 드나들게 됐다. 화분을 사고 화병을 갈아주느라 달에 두세번은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모조리 여자일까.

꽃을 좋아하는 것도 받는 것도 파는 것도 왜 여자인가. 채소며 과일이며 다른 건 모두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고 팔고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왜 꽃은 유독 여자만이 그 대상일까. 이게 사회적 여성성일까?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보자. 우리나라의 마카롱 가격이 프랑스 현지보다 비싸다는 보도가 연잇던 시절이 있다. 그러면서 마카롱이 핑크택스가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분명 마카롱을 여자만 먹게 한 것은 아닌데, 왜 여자들이 많이 먹는 걸까? 이런 핑크택스에 관한 얘기를 친구랑 떠들다가 짐짓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떡볶이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떡볶이 가격은 이제는 2만원대에 육박하고 있다. 그런데 떡볶이는 대부분 여성들이 즐겨 먹는다. 그런 걸로 보면 떡볶이도 마카롱과 같이 핑크택스인걸까? 그런 생각에 머리 아파 하다가 제육볶음으로 이야기가 튀었다. 물론 제육볶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호하는 음식이긴 하지만 유난히 남성이 좋아하고 제육볶음의 가격은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별로 오르지 않았다. 비슷한 예로 돈까스와 국밥이 있다. 이런 음식의 선호도 사회적 여성성/남성성으로부터 시작된 걸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는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여자인데 떡볶이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내가 아는 남자는 마카롱을 정말 좋아하는데?'.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나도 마카롱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고 떡볶이보다 돈까스를 좋아한다.

내가 꽃을 좋아하고 돈까스를 좋아하고 마카롱을 즐기지 않고, 이런 사소한 것에 대한 기호가 쌓이면 그 합집합 안에 내가 포함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일개 음식과 취향일 뿐이지만 누적되다 보면 내 정체성을 구성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좋아한 것들이 뭉치고 뭉쳐 취향이 되면 그 취향 자체가 나를 가르키기도 한다. 그러면 단발머리를 좋아하고 구불구불한 앞머리를 좋아하며, 신체 운동보다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게 좋은 것도 나의 취향이고 나를 구성하는 것일 수 있겠다. 치마를 예뻐하고 개를 귀여워 하며 인사와 다정에 기꺼워 하는 것까지 모두.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 건 스터디 때문이다. 스터디의 첫 주제는 트랜스젠더였고, 때문에 트랜스젠더에 대해 이리저리 자료조사를 하고 있다. 그러다 '성별 정체성'이란 단어를 맞닥뜨렸다. '자신을 어떠한 성별로 인식하는가' 그것이 지정성별과 다르면 트렌스 젠더이고 같으면 시스젠더다. 함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렸을 적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걸 드라마로 알게 됐을 때처럼 말이다. 성별 정체성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지각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의 괴리로 자아정체성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들을 부정하는 측에선 트랜스젠더의 성판정법이 사회적 여성성/남성성에 의거했기 때문에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가 차별적 성 역할을 고착화 시키며 여성혐오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성판정법이 실제 트랜스젠더의 경험인 지는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냐며 뒷목 잡고 쓰러지는 퀴어 퍼레이트 반대 시위의 논리와 닮아 있단 생각을 한다. 내가 겪지 않은 일이니 있을 리 없으며 설득력 없다고 공격하고 부정하는 게 비슷하지 않나.

내가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을 자유롭게 향유하고, 나를 나라고 말해주는 사회적 지지기반이 필요하다. 생식기능을 떼고 본다면, 성별은 돈까스나 마카롱이나 꽃이나 차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성별 정체성이 두루뭉술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인생을 크게 쥐흔들고 있는 사람도 있을 거다. 다만 모두가 자아정체성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나. 그런게 평등이고 인권이며 사회존속의 이유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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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스틱을 꼭 쥐고 모로 누워 도리를 바라봤다. 도리가 내게 그것을 주어서 내가 그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황량하게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끝도 없는 길 위에서, 불행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 틈에서 나는 바로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지만 나를 좀 더 나답게 만드는 것. 모두가 한심하다고 혀를 내두르지만 내겐 꼭 필요한 농담과 웃음같은 것. 그리고 후회했다. 한국을 떠나며 엄마 유품이라고 챙긴 건 사진 몇 장 뿐인데, 이런 걸 챙겼어야 했다. 엄마의 화장품, 엄마의 스카프, 엄마의 잠옷처럼 향기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해가지는 곳으로>,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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