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

부다페스트

by 최열음

아주 높은 통유리 빌딩과 아주 뾰족한 첨탑이 달린 중세 건물 사이를 걷고 있다. 양쪽 다 호화롭기는 마찬가지라서 이질감이 들지는 않는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있으면 내가 사소해지는 느낌이라 좋다. 마침내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것이다.

한국인이 몹시 많은 도시라고 하던데, 얼마나 많은 이들과 말을 트게 될지 궁금해졌다. 한국어가 들리면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던데. 우리는 웬만하면 인사라도 건네는 편이다. 안녕하다는 말에 안녕하지 않다고 말할 한국인은 없으니까. 짧은 대화로 이어지면 흥미진진한 거고, 결렬되면 그냥 오지랖 넓은 여행객이 되는 것뿐이다.

구글맵으로 부다페스트 도시를 예습하다가 아주 깜짝 놀랐다. 스타벅스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데 쉽게 설레는 내가 속물적이다. 이전 도시에 없던 것들이 참 많다.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아름다워서 그만이었던 한 세계를 끝내고 왔다. 그치만 편리하고도 아름다운 세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찮았다. 우리는 크로아티아, 류블랴나, 부다페스트를 시작으로 비엔나, 프라하를 돌고 영국, 프랑스, 스위스로 넘어갈 계획이다.

야간버스를 타고 아침에 도착했기 때문에 거리를 전전하게 됐다. 이럴 땐 맥도날드나 스타벅스가 딱이다. 우리 숙소가 스타벅스, 자라와 한 건물에 있는 걸 알고 아주 놀랐다. 이토록 중심지인 곳에 숙소가 있는 건 정말 처음이다. 항상 도보 10분에서 20분 정도는 가야 하는 곁들이에 머물렀는데. 계란 흰자를 맴돌다 노른자 속으로 점프한 것 같다. 정말 촉촉하고 고소한 여행이 될 것이다.

3시 체크인이지만 일찍 들어갈 수 있는지, 짐은 맡길 수 있는지 열심히 문답한 끝에 호스트의 배려로 짐만 먼저 맡길 수 있게 됐다. 리셉션도 따로 없는데, 우리만을 위해 나와준 호스트가 너무 반갑고 고맙고 미안했다. 당연히 유럽인일 줄 알았는데 아시안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더 반가웠다. 혹시 한국인인가, 하고 혼자 생각했으나 아주 빠른 태국어 같은 게 들렸다. 같은 아시안끼리도 어느 국적인지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점심으로 쌀국수나 먹어야지.

외국인이 더 많은 쌀국숫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양이 좀 적지만 국물이 기가 막힌 쌀국수를 뚝딱했다. 칼칼하고 기름지고 눅진한 맛이 위장을 적셨다. 어째서 아시안 음식의 국물은 하나의 결로 이어지는가. 새로 산 바지가 너무 길어서 수선집을 찾는 중이다. 부다페스트에서 수선집을 찾게 될 줄이야. 가는 동안 한국인 부부와 말을 트게 됐다. 생각보다 오래 대화하게 됐는데 역시 이럴 줄 몰랐다. 여행은 변수와 서프라이즈의 연속인 것 같다.

가는 길이 좁다 보니 나와 아버지, 현아와 어머니가 대화를 하면서 걸었다. 이 한국인 아버님은 기장님이라고 했다. 비행을 오는 김에 며칠 동안 이곳을 여행하는 중이라며. 우리가 슬로베니아에서 왔다는 사실에 가장 흥미로워하셨다. 거긴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말씀에, 다른 곳은 비행기를 몰고 가보셨을 거라는 어마어마한 상상이 따라왔다. 아들 둘이 있는데 첫째는 이번에 따라오지 않았다고. 가족과 여러 번 여행해 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동시에 우리 아빠와의 여행을 생각해 봤다. 엄마가 없기 시작한 후로 우리는 한 번도 다 같이 여행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어설픈 가이드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걸었다. 동시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포기해야 할 여행이 될 것이었다. 아무래도 가족 여행은 투어를 끼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언젠가 당도할지도 모를 흥미로운 미래를 생각하며 걸었다.

열쇠방을 겸하고 있는 수선집에 도착했다. 아주 힙한 주인장 언니가 있는 곳이었다. 코 피어싱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미지는 그랬다. 입고 온 바지 끝단을 보여주면서 ‘컷 디스 팬츠’, 하고 말했더니 다음 주는 돼야 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 주말에는 일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뭔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쨌든 안 된다고 했다. 주말에도 문을 여냐고 물어본 건데, 게으르다고 말한 걸로 생각하려나. 아무튼 바지를 빨리 자를 수는 없다고 해서 원래대로 질질 끌고 나왔다. 아마 부다페스트 거리도 내가 다 청소하게 될 것 같다.

더는 끌리지 않을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꿀잠을 자고 나왔다. 여행을 하면서 낮잠의 단맛을 알아가는 중이다. 구글맵에 저장했던 무수한 카페들 중, 디자이너 샵과 함께 있다는 작은 카페를 들르게 됐다.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생각보다 더 내 취향이라 조금 흥분했다. 직접 디자인한 듯한 가방들 사이에 딱 필요한 커피 머신과 메뉴판만 있는 미니멀한 공간이었다. 스페셜티 커피라서 저렴하진 않았지만 주인장의 프로페셔널함이 느껴져서 괜히 믿음직스러웠다. 작은 가게지만 그의 취향과 온전함이 공간을 꽉 채우고 있는 듯했다.

저녁에는 헝가리 음식이 세트로 나오는 플래터를 주문해서 먹었다. 밀가루와 고구마와 감자를 두고 소스에 절인 고기, 끓인 고기, 볶은 고기 등을 함께 먹었다. 국물에 탄수화물을 찍어 먹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처음 먹어보는 것들이지만 익숙한 음식인 것처럼 편하게 먹었다. 새로운 음식도 꽤 도전해 볼 만하다. 사실 헝가리 음식도 괜찮았지만 가장 기대했던 건 마지막 일정인 재즈 클럽이었다. 평소에 째즈를 즐겨 듣는 건 아니지만 역시 들으면 되게 좋은 장르 아닌가.

이 재즈 클럽은 술을 사서 각자 즐기는 형식이 아니라, 박스 오피스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는 형식이라 더 공적이고 편했다. 8시부터 시작된 공연은 이미 진행 중이었고 우리는 조금 지각했지만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성공을 예감했다. 너무 좋을 것을 직감했는데 그걸 넘어서게 좋았다. 어떤 헝가리안 트리오가 연주하는 무대였다. 그 음악 안에서 그들은 각자 마음껏 망가지고 휘두르고 그 와중에도 하나로 합의됐다. 재즈란 건 암묵적인 합의 그 자체 같았다.

어떤 노래는 너무 좋아서 웃고 있었는데, 어떤 건 너무 좋아서 슬프기도 했다. 카메라를 들다가 말다가 하면서 자주 들썩였다. 언젠가 또 듣고 싶을 것 같은 음악들이라서 소중히 담았다. 연주와 연주 사이에,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헝가리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다들 웃고 난리가 났지만 우리만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나 음악이 시작되면 우리도 같은 정서를 공유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크게 아쉽지 않았다.

친구는 이 공연을 들으면서, 지금이 여행에서 두 번째로 좋은 순간이라고 했다. 과연 첫 번째는 무엇일지 궁금했지만 장내가 조용해져서 궁금해하기만 했다. 나는 이 순간이 첫 번째로 좋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물어보니 축구 직관을 했던 게 1등이라고 한다. 듣고 보니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 환호와 격정 속에 좋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이 째즈를 들으면서 속으로 열심히 흥분하고 환호했다. 나의 격정은 딱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남은 여행 동안 이런 황홀함을 얼마나 더 느낄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앞으로도 크고 작은 환희를 맛볼 거라는 거였다. 그러나 가장 좋은 순간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조금은 부동하는 게 있어야 여행이 더 견고해지지 않나. 지금은 스타벅스에서 새로 합류할 친구를 기다리면서 글을 쓰고 있다. 이제는 셋이 함께 여행하게 될 것이다. 물론 쓰는 것은 나만의 일이겠지만, 이 낯선 동행이 설레고 즐겁다. 한국에서 날아오는 친구를 기다리는, 여행의 중간점에 위치한 나와 현아. 이제 한 세계를 접고 다음 세계로 넘어갈 시간이다.


2023.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