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렁한 영혼

포르투

by 최열음

나는 졸라 헐렁한 사람이다. 친구들 앞에서 옷도 훌렁훌렁 잘 벗는 사람이다. 많은 것을 잊고 빼먹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나 영혼 같은 건 철석같이 믿으면서, 칼로리나 가격 같은 건 자주 망각하는 사람이다. 바로 결과가 보이지 않는 걸 미루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른다. 잠을 아주 오랫동안 자는 사람이다. 생각한 것만큼 말을 뱉지 않는 사람이다. 충청도인이라 그런가, 그냥 나인가. 생각과 말보다 몸이 앞서는 사람이다. 일단 움직여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자주 낭비한다. 시작에 강하고 끝맺음에 약한 사람이다.


나는 왜 이토록 헐렁하고 마는가. 완벽주의란 건 내 인생에 적용되지 않는 개념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헐렁함들이 가끔은 참 통탄스럽다. 아주 가끔은 사랑스럽고 대개는 어이가 없는 편이다. 시작을 가볍게 하기 때문에 끝까지 가볍기만 한 것들이 참 많다. 내게 밀도 있는 작업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끈기 있게 반복해 온 무엇이어야 가능한데, 현재까지 잘 지속해 온 것은 2년 10개월 간의 연애와 1년 간의 브런치 연재, 각기 고유한 시간의 우정들, 4번의 카페 알바, 딱 한번 성공한 다이어트 등이 있다.

엊그제는 대학 동기의 생일을 잊어버렸다가 다음날에 축하 카톡을 보냈다. 다행인 건 우리가 선물 같은 건 잘 교환하지 않는 나이 또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물다섯만 돼도 이렇게 생일이 덜 귀중해지는 건가. 곧 졸업을 앞둔 동기에게 졸업 후 계획 같은 걸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직업을 가진 어른들이 물어보면 짱날 수 있지만 같은 백수 입장에서 물으면 좀 양해가 되지 않나. 나는 그냥 궁금했다, 남의 앞날과 계획 같은 추상적이고 귀중한 것들이.


걔는 자기가 정석대로 갈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턴을 마치고 정규직이 되어 회사원으로 일할 것 같다고. 아직 무얼 하고 싶은지 몰라서 일단 인턴을 시작해 본다고 했다. 그 방법이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사회인으로서는 이해가 됐다. 백수에게 시간은 참 야속하고 마음은 언제나 조급하기 마련이니까. 내가 대놓고 일 년을 쉬고 여행하며 글을 쓰는 게 한국인으로서 얼마나 흔치 않은 일인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었는지 다시 기억이 났다.


여행 초반엔 휴학하지 않은 자의 객기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재수하고 바로 대학에 들어와서 4년을 스트레이트로 달렸으니 1년쯤은 쉬어가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지만 역시 그보다 더 큰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을 이렇게 사용해도 괜찮을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해 온 나였다. 분명 확신을 가지고 여행을 시작했는데도 끝물이 되니까 한국에 돌아가서 취준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다. 사회적 관념이 이렇게 무서운 거였다. 조금이라도 멈춰서 고개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은 한국에 돌아가면 쓰고 싶은 만큼, 쓰고 싶은 사람과 양껏 글을 써보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포르투에 있는 한 브런치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우리 세 명은 지금 삼단분리 중이다. 한빈이는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혼자 떠났고, 현아도 축구를 보러 마요르카로 떠났고, 나는 포르투의 카페들을 열심히 돌아다닐 계획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이런 시간이 꼭 필요했는지 모른다. 급조된 가족처럼 모든 시간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잠시 각자의 마음에 따른 여행을 해볼 필요가 있다. 현아가 포르투로 돌아오기까지 이틀의 시간이 있다. 그동안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일단 오늘 아침엔 에그타르트를 생각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브런치 카페에서 글을 쓰다가 거리를 구경하다가 또 카페를 갈 계획이다. 사실 한 도시에서 좋은 카페 몇 개만 가도 충분한 게 나의 여행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열정적인 관광객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아침으로 에그타르트를 두 개 골랐는데도 2유로 대였다. 이 정도면 너무 훌륭하다.

포르투는 확실히 뜨겁고 열정적인 느낌이 든다. 스페인과 비슷한 무엇이지만 또 다른 느낌이다. 더 시골스럽고 사람 사는 도시 같달까. 이 도시에서 나와 현아는 6일간, 요아오라는 이름의 포르투갈인이 운영하는 비앤비에 머물 것이다. 그는 우리의 캐리어를 척척 들어서 숙소에 옮겨주고 지도를 펼쳐서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준 뒤에, 우리의 생일을 물었다. 자기가 휴먼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주 같은 걸 봐줬다.


요즘은 앱으로도 사주를 볼 수 있었다. 그 또는 앱이 보기에 현아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고, 감정적인 사람이고, 신중한 사람이랬다. 결정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현아보다 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고, 고집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28살까지는 인생을 충분히 탐색할 것이고 그 후에는 열심히 달려서 50살쯤에는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고작 내 생일과 이름과 태어난 시간을 가지고 성격을 가늠하는 게 어이가 없고 신기했다. 그런데 또 진짜 비슷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태어난 시간도 잘 모른다. 대충 12라는 숫자를 넣으라고 해서 넣었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내가 몇 번 모른다고 말했더니 그가 엄마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래서 아이 돈 해브 마더, 라고 말해야 했다. 대충 둘러대기엔 꽤 질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엄마 없다는 말은 처음 해봐서 나도 여유로운 반응을 준비하지 못했다. 보통 한국어로 그런 말을 하면 미안하다고 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상대방에게, 괜찮다는 말을 여러 버전으로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로는 잇츠 오케이, 아임 쏘리밖에 할 수 없었다. 그도 미안하고 나도 미안하고 모두 미안한 상황이었다.


그가 사주 얘기를 꺼낸 건 우리가 크리스천이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태 가톨릭이었지만 이것저것 제약당하는 게 싫어서 버렸다고 했다. 그에겐 그렇게 쉽게 버려질 수 있는 종교이자 믿음이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다니는 교회와 가톨릭이 다른 게 뭐냐고 물었다. 내가 우리는 마리아를 믿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가 퍼킹, 하면서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서 나왔냐고 반문했다. 그에겐 여러모로 엄마의 존재가 중요한가 보다. 온 얼굴과 손과 몸짓을 써가며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였다. 아주 풍부하고 실감 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니까 자꾸 웃음이 났다.

그리고 그가 일러준 집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현아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우리 사이에 쌓인 작은 오해 같은 것들, 함께 3개월 남짓을 보내면서 느낀 것들, 15년을 알고 지냈음에도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처음 먹어보는 포르투 음식을 앞에 두고 얼굴에 열을 올려가며 열심히 얘기했다. 사람은 참 다르지 않냐며, 서로가 부딪히며 가졌던 생각에 대해 털어놨다. 여행을 하면 사람은 민낯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자주 화나고 피곤해하는 나의 민낯을 모두가 알게 된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게 나였다. 그냥 나였다.


그러니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시간을 보내는 지금, 나는 나의 성향과 여행 취향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생긴 것이다. 계획적이지만 그렇게 치밀하지는 않은 나의 성격이 혼자 여행할 때는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하여. 일단 지금까지는 에그타르트 두 개 먹고 카페 와서 아사이볼 먹은 것밖에 없다. 오히려 그래서 너무 좋은 걸지도. 나의 포르투 여행은 카페와 에그타르트로 점철될 게 벌써 뻔하기 때문이다. 가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바쁘다. 유명한 성당 같은 건 카페 가는 길목에 슬쩍 둘러봐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