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야!

포르투 3

by 최열음

새로운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 포르투를 가장 웃기고 기쁜 여행지로 만들어준 사람들이다. 이렇게 순도 100퍼센트의 웃음으로 누군가를 웃겨한 건 참 오랜만이다. 한국에서도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 어려운 걸 낯선 여자들이 해냈다. 모든 건 포르투의 동행과 반말을 쓰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포르투에 위치한 에어비앤비. 수도인 리스본도 아닌 작은 도시지만 한국인이 참 많다. 우리 에어비앤비 숙소에도 한국인 여자 넷만 머물고 있었으니까. 한국인이 한 달 살이를 하러 많이들 오는 곳이라고 했다. 유명한 관광지나 서유럽 도시들은 너무 비싸고 오래 머물기 척박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이 뿌리를 내리려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처럼 따뜻하고, 가성비 좋고, 맛 좋은 곳이 제격인 것 같다.


아무래도 여러 이유로 모인 우리는 한 집에 머물게 됐고, 그건 그냥 우연은 아닐 것이었다. 서울에서 한 명, 부산에서 한 명, 그리고 청주에서 두 명. 우리는 브런치를 함께 하기로 했다. 내가 찾은 비건 맛집에서였다. 사실 비건 식당은 처음이었는데, 단지 신념과 건강 때문에 많이들 먹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후무스와 각종 채소들이 조화롭게 올라간 샌드위치, 크레페, 덮밥, 아사이볼은 아름답고 맛이 좋았다. 이런 음식을 먹고살 수 있다면 육류를 멀리할 수 있게 될 것도 같았다.

아무튼 자꾸 존댓말이 나오는 유교걸들의 마음을 한 번에 뒤집어놓기 위해, 동시에 야-라고 외치자고 말했다. 예빈은 우리보다 3살 동생이었지만 걔가 야-라고 해도 아무도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의 금기를 깨버리는 것 같아서 좋았을지도. 물론 이후에도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던 예빈이었으나 왠지 우리가 모두 동갑 같다고 느꼈다. 비슷한 마음과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여행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닮은 게 많아질수록 나이라는 건 왠지 멀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조용하고 신중하게 이야기를 꺼내던 시연이 점점 웃겨지기 시작했다. 걔는 자기 얘기를 시작할 때 빌드업을 잘 쌓는 편이었다. 대화의 지분이 많지 않으니까 걔가 한번 말을 꺼내면 모두가 집중했는데, 이야기가 시작되기까지 로딩 시간도 길었다. 그래서 우리는 흥미진진한 마음과 얼굴로 걔 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연은 열심히 전개를 끌고 가다가, 클라이맥스라는 게 없이 결론을 툭 떨어뜨렸다. 그 허무함에 몇 번 속은 우리는 걔가 얘기를 할 때마다 자꾸 웃음을 참아야 했다.


브런치를 먹던 중에 다음 일정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와 현아는 근처 빈티지샵을 구경하고 시장을 둘러보다가 저녁에 모루 정원을 올라갈 참이었고, 다른 둘은 딱히 계획이 없었다. 예빈은 어제 자기가 먹었던 타파스 집이 너무 맛있었다고 했고 현아는 저녁에 축구 경기를 보러 갈까 고민스럽다고 했다. 나는 에그타르트를 먹고 카공을 하고 싶다고 했으며 시연은 모두 좋다고 했다. 그래서 그 모든 일정을 다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브런치를 먹고 빈티지샵에 갔다가 시장을 둘러보고, 모루 정원에 갔다가 에그타르트를 사서 카공을 하고 축구를 보러 갔다가 저녁으로 예빈이 추천한 맛집을 가기로 한 것.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이유는 세 명이나 계획형이었기 때문이다. 일정의 윤곽이 잡혔으니 순서대로 정리해서 읊었다. 그러면 우리의 머릿속에는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다. 어쩌면 머릿속으로 체계를 정리하느라 바깥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현아가 있으니까. 현아가 아니었다면 우리의 추억에 갑작스러운 축구 경기 같은 건 없었을 거였다.

모든 일정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어쩐지 모루 정원에 갈 때쯤엔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놀랍게도 시연만이 우산을 챙겨 왔으므로 우리 넷은 빠르게 숙소 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시연의 가방에서는 물과 우산과 약 같은 것들이 자꾸 나왔다. 필요할지도 모를 많은 것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걔가 든든했다. 나는 그날 립스틱도 놓고 오고, 물 대신 제로 콜라를 챙긴 데다가, 우산은 생각지도 못했으므로 시연의 가방에서 뭐가 척척 나올 때마다 감탄을 연발했다. 너는 어쩜 이렇게 철저하냐고, 치밀한 구석이 이렇게 많은데 말은 자꾸 흐릿하게 하는 걔가 더 웃겨졌다.


걸어가면서 나는 우리 성격의 조화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엠비티아이로 따지자면 외향형 둘과 내향형 둘, 직관형 둘과 현실형 둘, 감정형 둘과 이성형 둘, 계획형 셋과 즉흥형 하나. 모두 한글로 작성해서 의미가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여러 특징이 골고루 섞인 모임이라는 것. 각자에게 없는 것들을 새롭게 채워줄 이들을 만난 것 같아서 더 기뻤다. 존경하고 귀여워할 만한 누군가를 만나는 걸 좋아한다. 영어 학원 선생님인 예빈과 곧 학교 선생님이 될 시연과 현아, 아마 자기들도 모른 채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흡수시킬 것만 같았다.


축구를 보러 가기 전까지 자소서를 첨삭해야 했던 나는 카페에 다녀오기로 했다. 예빈은 프랑스어를 배우고 이런저런 잡무들을 처리하러 나와 함께했다. 하루에 하나 내지는 두 개의 카페를 꼭 다닌다는 점이 나와 같았다. 집 주변 카페들 중에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사실도. 언젠가 그런 카페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들이 좋아질수록 우리가 한국에서도 계속될 인연일지 궁금해졌다. 카페에서 예빈은 거의 미국인이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 정도로 자기 업에 충실한 사람이고, 능력 있는 사람인 걔가 부러웠다. 나이는 내가 더 많지 않나, 결국 삶을 결정짓는 데 나이 같은 건 하등 쓸모없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내가 자소서를 첨삭하는 알바를 가끔 한다고 했더니, 걔가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멋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번역 알바를 가끔 한다고 하길래, 역시 사람은 잘하는 걸 잘하면서 살아야 한다며 멋지다고 말했다. 서로의 일상을 조금 멋져하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포르투 축구팀 컬러에 맞게 파란 옷들을 대충 챙겨 입고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는 중에 한 갈매기가 무언가를 쪼아 먹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죽은 비둘기였다. 나는 소리를 지르며 싫다고 했고, 예빈은 눈을 가렸다가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시연은 속으로 으악하며 간밤에 자기가 들은 짐승 소리가 갈매기였던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현아는 택시를 부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거리 위의 사고에 반응하고 있었는데, 어떤 외국인 남자가 그 갈매기를 영상으로 찍기 시작했다. 잠깐 멈춰서 보는 것도 아니고 잠깐 찍고 가는 것도 아니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찍고 있었다. 갈매기가 비둘기를 들고 떠날 때까지. 그게 너무 기괴하다고 생각하다가, 그가 여자 일행에게 돌아가는 걸 보면서 남자친구가 저러면 어떨 것 같은지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조류학자나 다큐 감독이나 수의사가 아닌 이상, 모두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없다는 데 동의했다.

다행히 갈매기 사건은 금방 잊혔다. 몇만 명이 모인 축구 경기장에 당도했기 때문이다. 30분이나 지각을 해버렸지만 충분히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정말 축구에 관심 없을 것 같은 모양새의 여자들이 거기 앉아서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조금 웃기고 귀여웠다. 현아는 축구를 보는 게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지만 나머지 셋에게 설명해 주느라 애를 써야 했다. 물론 그런 것에 크게 방해받지 않을 만큼 걔는 축구에 진심이었다. 걔가 알아본 시간과 걔가 사 온 티켓과 걔가 챙겨 온 머플러 덕분에 우리도 제법 본격적으로 응원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렇게 심장이 터질 만큼 달리고 열정을 쏟아붓는 일을 지켜본다는 게 좋았다. 어떻게 사람이 90분 동안 달릴 수 있지. 홈팀은 격렬한 응원이라도 받지, 원정팀은 아주 치사한 야유와 조롱 속에서 달려야 한다. 한쪽은 폭주하는 아드레날린을 잘 다스려야 하고, 한쪽은 귀를 막고 이를 악 물어야 한다. 그래도 포르투 쪽에서 골을 3번이나 넣은 덕에 우리 아드레날린도 잠깐씩 터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런 짜릿함을 오랜만에 느끼니 정신도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역시 운동하는 사람이 정신도 건강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굶주린 우리는 포르투 음식들로 배를 잔뜩 채운 후에 맥플러리까지 먹었다. 시연이 마지막 밤이라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던, 세상에서 제일 예쁜 맥도날드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각자 플레인, 쿠앤크, 킷캣, 엠엔엠즈 맛을 골랐다. 그리고 왠지 라면이 먹고 싶다는 예빈의 말에 시연이 불닭볶음면 커리맛을 기증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사 온 뚜론이라는 간식까지. 많은 걸 나눌 줄 아는 시연 덕분에 풍족한 밤이었다.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밤인 예빈과 시연을 위해, 하고 싶은 모든 걸 미루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미루지 않는 건 단순하지만 행복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걸 미루지 않는 날들이 남은 여행에서도 자주 있기를 바랐다.


오늘은 나와 현아가 포르투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다. 이제 우리 숙소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이번처럼 한국인만 모여있는 날은 다시없을지도 모른다. 아주 흔치 않은 날의 흔치 않은 여행이었다. 결국 여행을 풍요롭게 하는 건 건물이나 광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다시 생각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영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최소한 웃기는 사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웃음 뒤에 남는 일말의 찝찝함도 없이 깔끔하게 웃긴 시연처럼. 다음 주면 우리는 한국에 있을 텐데. 지금은 포르투 내일은 파리, 다음 주는 한국.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2023.05.28